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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 해방일지

2023.02.12

by 조소현

    나의 자랑 해방일지

    어릴 적엔 겸손이 에티켓이라 배웠는데, 이제 우리는 자랑과 자기 비하 사이에서 방황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MBTI부터 공개하자면 ENTP다. 관심을 먹고사는 관종의 자질이 있단 얘기다. 진단표 그대로 ‘‘능동적이며 호기심이 많고 적극적이며 뜻밖의 사건을 좋아하고 도전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이런 자질은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는 데 레고 조각 끼우듯 잘 들어맞는다. 새로운 기획을 찾아 이곳저곳 두리번거리고, 섭외할 대상이 생기면 사돈의 팔촌 옆집 고양이 손까지 동원해 설득한다. 인터뷰할 때는? 지식으로 배틀을 하거나 덫을 놓듯 날카로운 도발까진 못해도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질문하고 경청한다. 그런데 이런 내가, 이렇게 적극적인 내가 못하는 게 있다. 바로 자기 자랑이다.

    몇 달 전 신생아를 제외하고 모든 국민이 아는 K-팝 아티스트 화보 인터뷰 특집이 있었다. 제한된 조건 때문에 멤버별로 인터뷰어가 필요했다. 팀장으로서 적당한 인물을 찾고, 성격에 맞게 인터뷰를 분배했으며 편집과 교정까지… 요약하자면 인터뷰 파트를 총괄해서 일을 마무리했다. 워낙 섭외가 힘들기로 유명했기에 책이 발간되자 인터뷰어들은 ‘내가 누구를 만났다’는 소식을 SNS에 즉각 올렸다. 좋아요가 쏟아지고 팬들이 찾아와 감사의 댓글을 남겼으며 순식간에 팔로워가 최소 수백 명씩 늘었다. 개중 한 명은 뒷이야기로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게시물을 올리지 않았다. 모두가 만나고 싶어서 목을 매던 인물을 내가 만났다고 밝히는 게 너무 자랑으로 느껴졌다. ‘부럽다’는 말을 들으면 겸연쩍고 쑥스러울 것 같았다. 남들도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 정도는 해내겠지 싶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 필자는 답답해하며 열심히 한 일은 티를 내라고, 동네방네 알리라고 조언했다. 그때 속으로 ‘유명인의 인기에 편승하는건 좀 민망한 일 아닌가’까지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자랑 결벽증 아닐까 싶다.

    ‘자랑스럽다’와 ‘자랑을 하다’ 사이에 자랑에 대한 우리의 인식 차이가 있다. ‘어떤 일을 한 동료가 자랑스럽다’에는 타인의 장점을 찾아내서 널리 알린 미덕이 있지만, ‘어떤 일을 했다고 자랑을 했다’에는 노골적인 자기 과시가 느껴진다. 전자는 긍정적이고 후자는 부정적이다. 장점이 타인에 의해 밝혀지는 건 자연스럽지만 자의에 의한 공개는 불편하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는 자랑은 스스로 해서는 안 되는 영역으로 간주해왔다. 그 탓인지 본인 입으로 자기 자랑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사람들이 멋져 보이지 않았다. 진짜 실력이 있다면 세상이 알 테고 진정한 실력자는 ‘발견되는 것’ 아닌가. 스스로 자랑한다면 그런 존재에게 느끼듯 같잖게 여겨질까 두려웠다. 자랑 결벽증에는 ‘실력이 그 정도는 아니다’ ‘되게 잘난 척하네’ 같은 험담을 받을까 봐 무서웠던 마음도 자리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내 주변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성취를 밖으로 드러내는 데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한 줄만 읽어도 지성의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글을 써서 출판했으면서 쑥스러워서 동료 기자들에게 책을 못 돌리고, ‘축하한다’는 칭찬을 들으면 “대단한 책 아니에요, 1쇄나 팔릴까요”라고 말한다. 클라이언트로부터 한 달에 몇천만 원씩 받는 광고를 유치했으면서 조용히 결재만 올린다. 사실을 알고 놀라워하는 팀원에게는 “이 연차에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성향을 가진 이들의 공통된 화법은 자기 비하인데 ‘나는 왜 이렇게 글을 못 쓸까. 내 글은 쓰레기야’라든지, ‘가성비 높은 직원이지 뭐. 이렇게 광고 따봤자 몇 년이나 더 하겠어’ 같은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다.

    직장 생활을 하며 ‘누구 눈에도 띄지 않고 공기처럼 살겠다’가 목표라면 내면의 갈등과 지옥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낮은 연차에는 자랑이나 성취를 부각시켜야 할 일 자체가 없다. 막내에게 요구되는 건 재기 발랄함, 디지털 기술, 열심히 하는 열정, 터지지 않은 잠재력 정도이므로. 그런데 연차가 쌓이고 협업이 늘어 업무의 경계가 흐려지면 ‘누가 무슨 일을 했다’가 미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얼마 전 한 선배는 아이디어부터 전체 기획까지 했던 일을 회사 밖 업계 사람들은 다른 직원의 작업으로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워킹 맘이라 아이까지 친정에 맡기고 그 프로젝트‘만’ 해내는 동안 다른 직원은 그 과정을 자신의 SNS에 꾸준히 올린 것이다.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1인분 이상을 해내서 평판이 좋은 한 후배는 승진에서 누락되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성과는 자신이 나은데 최종적으로 상사와 살갑게 소통하는 동기가 먼저 승진했다고 말이다. 억울한 마음에 상사와 면담을 했는데 놀랍게도 상사는 후배가 해온 일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제야 후배는 자신이 무언가를 놓쳤음을 깨달았다. 어떤 일을 했고 얼마나 애쓰는지 떠벌리지 않는다고 해서 선배와 후배에게 인정 욕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번거롭고 쑥스러워 자랑하지 않은 그들은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애쓴 우리의 노고는 회사 수위 아저씨가 가장 감동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랑하면 안 된다고 훈련받은 것 같은데, 벗어나려고 애를 쓴 것 같지도 않다.” 앞서 프로젝트 성취를 빼앗긴 선배는 왜 자신이 일만 해왔는지 돌이켜보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다수에 어우러지는 법을 배웠고 ‘얌전하게 굴어’라는 메시지를 숨 쉴 때마다 주입받았다고 말이다. 가정마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모나지 않고 열심히 하다 보면 보답이 온다는 메시지를 자식에게 전하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 ‘겸손하라’는 분명 예의범절의 영역이었다. 세상은 변했지만 조금 전에도 나의 어머니는 “수학 100점 받았어!”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너무 잘난 척하면 애들이 싫어해”라고 타일렀다. 돌이켜보면 건강한 방식으로 칭찬을 주고받은 경험이 없었다. 공부는 당연히 잘해야 하는 것이었고, 못하면 혼나야 하는 일이었다. ‘말 안 해도 부모의 마음을 알 것’이라고, 지레짐작으로 키워진 우리는 작은 일상의 성취는 축하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되었다.

    기업인이며 작가, 강연자로 활동하는 메러디스 파인먼(Meredith Fineman)은 저서 <자랑의 기술>에서 자랑에 대해 완전히 다른 관점을 드러낸다. 자랑이 아니라 사실을 말할 뿐이고, 자랑도 업무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녀는 정말 많은 사람이 자기가 잘한 일을 남에게 말하기 힘들어한다며 오죽하면 사람들이 자랑하도록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자신 같은 사람까지 있다고 말한다. (수업 시간에 경쟁하듯 ‘저요!’ 손을 드는 문화권으로 보이는 바다 건너편에서도 자랑을 힘겨워하는 사람이 다수라 기술까지 전파해야 하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능력이나 자신감을 실제보다 부풀려서 연기하라거나 대화 중 은근슬쩍 자기 PR을 하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견, 능력, 배경에서 확실한 자신감을 찾은 뒤, 목소리를 높여 상사, 클라이언트 등 세상에 자신의 업적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능력을 강조하는 법을 배우라는 조언이 다가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성취를 말하지 않으면 오히려 사회가 오판해 실력은 없는데 목소리만 큰 사람에게 계속 기회를 주게 되니 전체적으로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는 관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를 통해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을 때 일시적으로 속상한 데서 나아가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감정이 장기적으로 이어질 때 나 스스로에게 끼칠 영향까지 파악해볼 수 있었다. 나의 오랜 매너리즘은 어찌 보면 성과를 인정받지 못해서 생긴 증상이자 자랑 결벽증이 부추긴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증상은 한 몸처럼 굴며 오늘의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

    메러디스는 여자들이 좀 더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길, 자신이 해낸 일이 부족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길 바랐다. ‘현재 커리어가 어느 지점이든 무언가를 이뤘으면 자랑할 만하다’고도. 우리 사회는 산 정상에 올라 바람을 만끽하는 순간에만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만들었지만, 올라가는 한 걸음 한 걸음에 필요한 건 인정과 응원이다. 자랑은 이를 알리는 태도이고 말이다. 귀신은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한 일은 직접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우리의 자랑 해방일지는 여기서 시작된다. (VK)

    에디터
    조소현
    포토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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