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트렌드

헤어 스탬프라는 신문물

2022.06.13

by 송가혜

    헤어 스탬프라는 신문물

    모발이라는 캔버스 위에 구현되는 무한대의 상상! 영감을 불러오는 헤어 스탬프라는 신문물이 등장했다.

    어린 시절 아기자기한 것들을 좋아했다. 서랍 두 칸은 거뜬히 채울 만큼 넘치던 다이어리부터 어머니가 손에 들려준 신발주머니까지. 얼마나 정성스럽게 꾸몄는지 모른다. 열정에 비해 손재주가 살짝 모자라더라도 좌절이란 없었다. 아무리 정교한 모양이나 글자여도 필름에 색색의 물감을 바르기만 하면 전문가가 찍어낸 듯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 탄생했으니까. 그 고마운 존재는 이름하여 스텐실. 벽이나 가구, 천에 패턴을 넣거나 그래피티 아트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여러분에게 이미 익숙하디익숙한 공판화 기법이다. 그런데 이 유용한 기술이 놀랍게도 최근 헤어 컬러링에 쓰인다는 소식이 <보그>에 전해졌다.

    몇 달 전 리한나(Rihanna)가 자신의 속옷 브랜드 새비지×펜티(Savage×Fenty)의 발렌타인데이 캠페인 광고에서 선보인 헤어스타일은 파격적인 란제리 룩보다 큰 파급 효과를 낳았다. 삐뚤삐뚤한 처피 뱅과 차분하게 떨어지는 모발에 라쿤의 꼬리를 연상시키는 줄무늬를 루비 컬러로 넣은 스타일이 ‘리한나 헤어’라는 이름으로 공개된 직후 무려 검색량이 6,700% 치솟았으니 말이다. 메건 더 스탤리언(Megan Thee Stallion)은 ‘Cry Baby’ 뮤직비디오에서 라푼젤처럼 긴 금발에 색색의 꽃을 그려 넣어 바비 인형처럼 변신했고, 두아 리파(Dua Lipa)는 햇살을 쬐며 잔디에 누워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자신의 SNS에 포스팅했다. 아찔한 핫 핑크 비키니와 탄탄한 구릿빛 몸보다 더 빠르게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플래티넘 블론드로 하이라이트 염색을 한 헤어 군데군데 깜찍하게 자리 잡은 네온 컬러 하트 무늬. 수작업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하게 규칙적인 모양으로 장식한 이 헤어스타일을 우리는 ‘ 헤어 스탬프(Hair Stamp)’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어린 시절 한 번쯤 가지고 놀던 각양각색의 도장을 마치 모발에 찍은 것 같지 않은가.

    흥미로운 사실은 이 헤어 스탬프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2001년 당시 ‘쎈 언니’로 힙합 신을 주름잡은 릴 킴(Lil Kim)은 샤넬과 베르사체의 아이코닉한 로고를 뒤덮은 가발을 착용했다. 1990년대 미국 초등학생들은 펜처럼 생긴 글리터라는 도구로 모발에 반짝이는 별이나 하트, 꽃을 그려 넣어 자신의 헤어를 뽐내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이 트렌드가 오늘날 이토록 빛을 발하는 맥락이 이해되지 않나. 그렇다. 지난해부터 패션과 뷰티 월드를 장악 중인 Y2K 붐으로 비롯된 흐름인 것이다. 두피에 착 달라붙을 만큼 일자로 편 스트레이트 헤어, 과감한 풀 메이크업과 함께 머리카락을 패턴으로 장식하는 이 세기말 헤어스타일은 할리우드의 셀럽은 물론, 수많은 틱토커와 아티스트의 감성을 제대로 사로잡았다.

    “헤어 스탬프가 매력적인 이유는 스타일링을 마무리하는 데 가장 창의적인 방법이라는 것이죠. 문밖으로 나서기 전 화려한 액세서리를 착용하듯 말이에요.” 헤어 스타일리스트 리카르도 로하스(Ricardo Rojas)의 말이다. 연출법마저 놀라울 만큼 간단하고, 모발에 특별히 손상을 입히지도 않는다. 앞서 언급한 스텐실처럼 투명 필름에 시도해보고 싶은 모양이나 패턴을 직접 그려 넣은 뒤 커팅하거나 시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도안을 활용하면 된다. 그저 원하는 위치를 고민하면 그만이다. 깔끔하게 빗은 모발에 필름을 대고 일시적으로 컬러를 입히는 스프레이 또는 헤어 틴트를 뿌리거나 바르면 완성. 주의할 점이라면 스텐실의 경계선 바깥으로 잉크가 넘치지 않도록 양을 조절하고, 건조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필름을 떼어내도록. 로하스는 최소 8인치 떨어진 위치에서 헤어스프레이를 뿌려야 모발이 고루 코팅된다고 조언한다.

    과거 브랜드 로고, 키치한 패턴 위주에서 그쳤다면 2022년 헤어 스탬프의 세계는 확장된다. 여러 컬러를 머리카락에 믹스해 현란한 패턴을 연출하거나, 애니멀 프린트, 사이키델릭하거나 추상적인 문양까지. SNS를 곧 자신의 작품 아카이브로 활용하는 요즘 세대 아티스트의 계정에선 이런 맥시멀한 창조물이 자주 목격된다. 컬러부터 패턴, 드로잉 등 그 어느 요소에도 구애받지 않으니 그들의 아이디어를 맘껏 표출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제약이 사라짐으로써 시야는 더 확대되고, 마침내 미의 기준이 더욱 다양해지는 이 흐름을 그들은 열렬히 반긴다. 헤어 숍에 사진을 들고 가서 “이 머리로 해주세요!”라고 외치는 사람도 머지않아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토록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헤어 스탬프를 매개로 상상을 펼치는 헤어 스타일리스트에게 직접 이 트렌드에 대한 의견과 그들이 구축한 세계관에 대해 물었다. 뉴욕과 파리, 중국과 국내에서 창의적인 스타일을 이끄는 아티스트 4인이 <보그>의 부름에 답했다.

    @olivierschawalder

    @olivierschawalder

    PARIS, OLIVIER SCHAWALDER (@olivierschawalder)

    아찔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요.

    <보그 프랑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매거진과 협업하고 있죠. <보그 코리아>와 함께하는 헤어 스타일리스트도 모두 그렇지 않나요(웃음). 최근에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토마스 드 클루이버(Thomas De Kluyver)와 흥미로운 작업을 마쳤습니다.

    헤어에 패턴을 더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언젠가 사진가로부터 촬영 무드보드를 건네받았는데, 1980년대에 찍은 듯한 소녀의 스냅사진이 있었어요. 소녀의 머리카락에 굉장히 많은 색상이 서로 충돌한 것처럼 뒤섞여 있었죠. 독특하면서도 이상했어요. 저만의 방식으로 이 헤어스타일을 더 완벽하게 재해석 해보고자 했죠.

    과감한 컬러와 선적인 요소가 돋보여요.

    헤어 스탬프만큼 자유로운 수단도 없지만, 저는 헤어스타일이 그래픽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지나치게 많은 컬러로 무질서한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건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요. 보는 사람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더 이상 좋은 디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보단 다양한 형태의 라인을 활용하는 걸 선호하죠. 모발에 더하는 순간 정적인 선도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요?

    지난해 말 <시스템> 매거진과 함께 작업한 호랑이 무늬 헤어스타일을 꼽고 싶군요. 그러고 보니 <보그 이탈리아>의 동물 이슈 특집을 위한 화보에서도 비슷한 헤어를 연출한 적이 있죠. 모발에 입힐 수 있는 라인 가운데 제가 가장 선호하는 패턴임에 틀림없어요.

    인스타그램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나요?

    단순히 보자면 다양한 광고와 에디토리얼 작업을 포스팅하는 플랫폼이지만 저라는 사람의 연대기이기도 하죠.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것들이 전부 녹아 있으니까요. 계정은 제 풀 네임이지만 SNS에선 저만의 브랜드처럼 작용하죠.

    그렇다면 브랜드의 슬로건은 무엇인가요.

    시적인 것(Poetic).

    @errolkaradag

    @errolkaradag

    NEW YORK, EROL KARADAĞ (@errolkaradag)

    새비지×펜티 캠페인의 리한나 헤어를 창조한 주인공이죠.

    그녀와의 작업은 매번 꿈만 같아요. 제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하면서 영감을 주는 뮤즈죠. 발렌타인데이와 어울리는 섹시함과 로맨틱 펑크가 공존하는 캠페인 컨셉과 부합하는 헤어스타일이 필요했어요. 타오르는 불처럼 시선을 사로잡도록 루비 컬러로 모발에 역동적인 스트라이프를 연출하게 됐죠.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인스타그램이나 주변 지인들을 통해 문의가 쏟아졌어요. 멋진 경험이었죠. 리한나처럼 그 헤어스타일을 트렌디하고 멋지게 소화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촬영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캠페인의 분위기에 그대로 녹아들어 진심으로 임했죠. 창조와 영감이 샘솟는 곳이었어요.

    호피 무늬를 자주 활용하더군요.

    사실 시작점은 1960년대 슈퍼모델 베루슈카(Verushka)의 사진 한 장이었어요. 프랑코 루바르텔리(Franco Rubartelli)가 촬영한 화보였죠. 호피 무늬 비키니를 입고 호랑이 가죽 위에 기대 누운 베루슈카의 머리칼에도 같은 패턴이 그려져 있었어요. 와일드하고도 강렬한 헤어스타일에 곧바로 매료됐죠.

    헤어 스탬프를 시도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조언을 건네자면요?

    요즘 젊은 세대는 밝은 컬러로 모발 전체를 물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어요. 헤어 스탬프가 돋보이는 더없이 깔끔하고 훌륭한 캔버스죠. 머리카락 섹션을 최대한 얇고 촘촘하게 나눠 스탬프를 연출하는 방법을 권합니다. 아무래도 실패 확률을 줄이고 실생활에서도 자연스러울 테니까요. 특히 탈색모는 머릿결이 뻣뻣하고 부스스하니 패턴을 넣기 전에 최대한 차분하게 빗어주는 것이 좋고요. 개인적으로 올라플렉스(Olaplex) 제품을 추천해요.

    아티스트로서 바라보는 헤어 스탬프 트렌드는?

    모든 사람이 이제는 규칙 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머리를 스타일링하죠. 스트리트 패션만큼 사람들의 헤어스타일 역시 실험적이지만 멋진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릴 거예요.

    올해 유행할 헤어 컬러를 꼽는다면?

    오렌지, 핑크, 블루, 그린, 레드!

    @issac_yu

    @issac_yu

    CHINA, ISSAC YU (@issac_yu)

    <보그>와 다양한 작업을 했어요. 영감을 어디서 얻는지 궁금합니다.

    망가(Manga)!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나 <더 킹 오브 파이터즈 ’97>처럼 사치스러울 만큼 과도하고, 우스꽝스러울 만큼 대담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화나 게임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주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콘텐츠죠. 혼란스럽지만 과감한 스타일링이 풍요로울 정도로 차고 넘치던 시대였으니까요. 이 가상 인물들의 스타일링을 연구하다 보면 이전에 해보지 못한 아방가르드한 작업물이 탄생하더군요.

    헤어 스탬프도 그런 캐릭터로부터 탄생했군요.

    컬러로 극대화된 헤어스타일을 시도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머리카락에 서로 충돌하는 색상을 믹스하고, 얼룩말이나 호랑이 무늬와 같은 패턴을 넣기에 이르렀습니다. 규칙적일 때도 있고, 두 눈이 어지러울 만큼 무질서하게 뒤섞일 때도 있죠.

    최근 리얼웨이에서도 이런 헤어스타일이 눈에 띈다는 점이 놀라워요.

    문화적 다양성이 불러온 가장 긍정적인 현상 중 하나예요. 2020년 이후로 젊은 세대는 기상천외한 변화나 모험을 받아들이는 데도 거리낌이 없어요. 일상에서의 가치관이나 어떤 상징적 의미를 머리카락에 담기도 하죠. 헤어 컬러는 자신의 정체성이나 창의성을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겁거나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이 트렌드의 미래를 예측한다면?

    타고난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동양의 한 헤어 스타일리스트로서 이 맥시멀한 흐름이 반가울 따름이에요. 머리 색에 어떤 한계점도 없다는 방증이니까요. 오늘날 세상은 다양한 인종의, 좀 더 다양한 의견으로 화려하게 점철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해요. 지금보다 더 많은 무지갯빛 헤어를 보고 싶군요.

    당신의 헤어 스타일링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혼돈(Chaos).

    @ozikc

    @ozikc

    KOREA, HYUNWOO LEE (@ozikc)

    이번 주제로 촬영을 기획할 때 일순위로 떠올린 아티스트였어요. ‘헤어 스탬프’라는 이름의 트렌드가 퍼지기 전부터 이런 유의 작업을 많이 해왔죠.

    지금처럼 과감한 컬러나 패턴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계기는 해외 매체와의 촬영이었어요. 그 전까지는 아무래도 헤어 스타일링에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거든요. ‘나의 이상’이라는 주제로 아이디어를 펼쳐야 했는데, 그 어떤 제한도 없어 두근거리는 반면, 강한 인상을 주고 싶다는 부담감도 컸죠. 당시 제 꿈의 자동차였던 벤츠 AMG GTS 로고를 형상화했어요. 헤어의 기하학적 형태도 독특했지만 두피 쪽은 패턴을 넣어 그러데이션하고, 모발 끝은 또 다른 컬러로 물들이는 시도를 했죠. 이날의 대담함이 제 터닝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어떤 질서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정확해요. 헤어피스를 제작할 때 컬러를 그러데이션하는 저만의 공식 몇 가지가 있거든요. 예를 들면 노랑에서 연두, 파랑까지 비슷한 채도가 스펙트럼처럼 이어지도록 한다든지, 서로 대비되는 보색을 레이어드하면서요. 컬러의 커다란 방향성을 짠 다음 프로젝트와 컨셉에 맞게 패턴은 추가하고요.

    어두운 모발에 헤어 스탬프를 연출하는 건 쉽지 않아 보여요.

    탈색이 전제 조건일까요? 밝은 컬러 베이스에서 더 눈에 띄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탈색모가 필수 요건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두운 모발에 군데군데 자신이 좋아하거나 피부 톤에 맞는 컬러를 하이라이트처럼 넣으면 더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죠. 목덜미 아래쪽 모발만 컬러로 포인트를 주면서 스텐실로 패턴을 넣을 수도 있고요. 여성분들은 스트레이트 헤어를 연출한 뒤에 주로 핀을 꽂는 위치에 문양을 시도해보는 것도 무난한 스타일링이 될 거예요. 스텐실로 사용할 필름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무궁무진하니까요.

    전문가는 어떤 제품을 사용하는지 궁금하군요.

    아이보리에 가까운 모발에 사용할 땐 매닉패닉(Manic Panic) 제품을 사용해요. 일시적으로 모발에 컬러를 입히는 스프레이 형태의 ‘앰플리파이드™ 템포러리 스프레이-온(Amplified™ Temporary Spray-On)’도 헤어 스탬프를 연출하기에 유용하고, 매니큐어 형태의 ‘크림톤 퍼펙트 파스텔(Creamtone Perfect Pastel)’은 색감이 예뻐서 헤어피스를 제작할 때 자주 사용하죠. 비비드한 컬러를 시도해보고 싶다면 크레이지 컬러(Crazy Color)나 아도레 헤나(Adore Henna) 제품도 눈여겨보세요.

    주목할 만한 헤어 트렌드가 또 있을까요?

    Z세대가 이끄는 헤어 트렌드는 이전보다 다원적이고 흥미롭죠. 서로 연결 고리가 없는 새로운 트렌드가 속속 등장하니까요. 그들은 유행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따르니 ‘트렌드’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헷갈릴 정도예요. 이제는 모두가 크리에이터죠. 헤어 세계의 일부분을 공유하는 것 같아요. (VK)

    에디터
    송가혜
    포토그래퍼
    김신애
    모델
    이예리
    헤어
    이현우
    메이크업
    황희정
    스타일리스트
    김예진
    네일
    임미성
    Photographer
    Carlijn Jacobs, Anthony Seklaoui, Alex Black, Nick Yang, Theo L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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