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피아 자그놀리: 예술에서 기억, 컬러, 패션이란
여름날의 블루 스트라이프 수영복과 상큼한 스피리츠, 젤라토 한 컵. 올림피아 자그놀리가 개인전 <Life is Color>에서 입체적으로 풀어낸 그의 기억은 미디어 아티스트 장명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편적으로 공감 가능하며 패션을 작업에 투영하는 두 아티스트가 대화를 나눴다. 예술에서 기억이란, 컬러란, 패션이란.
지금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이탈리아의 청량한 여름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알록달록한 젤라토와 톡 쏘는 소다, 반짝이는 네온을 배경으로 각각의 개성과 이야기를 간직한 인물들, 그 교감의 순간이 어우러진 아티스트 올림피아 자그놀리(Olimpia Zagnoli)의 개인전 <Life is Color>. 제목처럼 이 전시는 하나의 컬러풀한 일기와도 같다. 작가는 삶의 추상적인 기억을 원색의 드로잉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입고 담으며 거닐 수 있는 입체로 펼쳐냈다. 간결하게 표현된 그의 기억은 우리 모두에게 다르게, 하지만 선명히 읽힌다. 자그놀리의 작품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직관적이라는 건 예술에서 간과하기 쉬운 미덕 중 하나다. 비비드한 컬러와 볼드한 형태로 표현된 그의 작업은 때로 예술과 패션 사이에 놓인 것처럼 느껴진다. 프라다, 디올 등 다양한 브랜드가 자그놀리와 협업한 것도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동시에 시대정신을 수용하고 대중적으로 공감 가능하며 약간의 아이러니를 간직한, 더없이 패션과 닮은 작품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새삼스럽게도 패션은 예술이 된다. 누구보다 자그놀리의 작업에 흥미를 가진 <보그> 디지털 디자이너 장명식이 그와 대화를 나눴다.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장명식 역시 꾸뛰르 컬렉션을 입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유동적인 젤리 캐릭터로 패션과 인체의 상관관계를 탐구해왔다. 패션을 작업에 접목시키는 두 아티스트가 나눈 대화. 패션이 주는 영감과 기억이 컬러의 예술로 탄생하는 일에 대하여.
Myungsik Jang 먼저 작품 속 인물들이 입은 옷이 눈에 띈다. 나 역시 <보그> 디지털 디자이너로 일하며 패션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특히 로에베, 스키아파렐리의 인체를 조각의 관점에서 해석한 오뜨 꾸뛰르 컬렉션 같은 것 말이다.
Olimpia Zagnoli 패션 그 자체보다 패션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낀다. 시대별 패션에서 의미를 찾아보면서 작업에 반영하는 식이다. 특히 전반적으로 밝은 컬러를 사용하면서 곳곳에 대비되는 색을 배치한다거나 다양한 패턴을 넣는 것은 1960~1970년대 패션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것이다.
MS 나 역시 1980년대 의상의 전위적인 느낌과 그 배경에 대해 리서치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1980년대 장 폴 고티에의 독특한 형태가 1920년대 바우하우스의 무대의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그렇게 재해석된 스타일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도 몹시 흥미롭다.
OZ 마냥 아름다운 것보다 심각한 화두를 비틀어 너무 어둡거나 밝지 않게, 약간은 낯설고 기괴한 은유로 표현되는 지점을 좋아한다. 1980년대의 모스키노, 장 폴 고티에, 꼼데가르송의 독특한 형태와 색에 담긴 아이러니는 나의 일러스트레이션에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MS 디올이나 프라다 같은 패션 브랜드뿐 아니라 일리, 인쇄 매체 <뉴요커> 커버와 <뉴욕 타임스> 작업 등 다양하게 협업해왔다. 가장 선호하는 협업 형태는?
OZ 일러스트레이션은 기본적으로 예술성과 상업성이 혼재된 장르다. 아주 아티스틱한 전시회부터 누구든 가질 수 있는 99센트 티슈 ‘템포’ 케이스의 인쇄 작업까지, 모두 좋았다. 개인적으로 종이 매체에 애정이 있고 자주 구매하기 때문에 에디토리얼 방향의 작업이 매력적이라면,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은 늘 새로운 매체에 대한 도전이기에 즐겁다. 어느 쪽이든 나의 그림이 인쇄된다면 모두 환영이다.
MS 새로운 시도를 격려한다는 것이 협업의 미덕 중 하나라는 데 지극히 공감한다. 더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브랜드와의 협업은 나의 세계관뿐 아니라 작품 자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OZ 앞서 언급한 티슈 브랜드 ‘템포’와의 콜라보레이션이 좋은 예다. 과정도 좋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곳곳에서 제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보통 티슈를 박스로 사면 한 번에 다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집 안에 돌아다니지 않나. 그래서 누군가의 주머니, 가방 속 혹은 거리에 돌아다니는 나의 작업물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작업물이 보호받는 문제와는 무관하게 일상에 녹아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낀다.
MS 이 대답이 예술성과 상업성에 관한 당신의 관점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다양한 디지털 채널을 통해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주변의 피드백도 굉장히 수용하는 편이다. 작업물을 많은 사람에게 보이는 일 자체를 순수하게 즐긴다고 할까?
OZ 100% 공감한다! 지금까지 전시에서 작은 규모의 키네틱 조각으로 교감에 관한 실험을 해왔는데, 작업물과 교감하는 관객을 보는 것은 예술가로서 큰 성취다. 대중적인 맥락에서 작업물을 선보이는 기회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대규모 퍼블릭 아트에도 도전하고 싶다. 날씨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는 점이나 관객이 주변을 거닐며 작업물을 만질 수 있다는 점, 갤러리를 쉽게 찾지 못하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는 점 모두 굉장히 흥미롭다.
MS 그 말을 들으니 두오모 광장에 우뚝 서 있는 당신의 작품이 그려지는 것 같다(웃음). 그만큼 당신의 작업이 퍼블릭 아트에 적합하다는 얘기다. 친근하고, 이해 가능하며, 유머러스하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스파게티나 에스프레소 같은 음식이 작업에 종종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음식을 대상으로 삼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OZ 나는 이탈리아인이니까(웃음). 알다시피 음식은 이탈리아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음식을 나눠 먹으며 사람들과 교감하는 그 순간이나 가끔은 음식 그 자체에서 영감을 받는다. 페이스트리 숍에 가서 아름다운 케이크나 빵의 형태, 색, 글레이즈를 구경하고 먹는 그 신나는 과정! 다양하고 흥미로운 맛, 색깔과 음영, 식감과 분위기까지, 그 모든 것 말이다.
MS 그렇게 일상의 경험을 그리기 때문에 색이 선명하고 형태도 대담한 게 아닐까 추측했다. 나는 심해 생물의 영상과 사진을 참고해 비정형적 형태, 유동적 움직임, 독특한 색을 관찰하고 작업물에 적용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직접 보지 못한 대상을 애니메이션화하는 셈이다. 나의 작업 톤이 대체로 한 겹의 막이 있는 듯한 색감인 것에 비해 당신의 작업은 굉장히 선명하다. 추상적인 기억을 선명하게 그려내는 과정은 어떤가?
OZ 현재 전시장에 있는 작업물 ‘Cuore di Panna(Heart of Cream)’로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이건 기억을 공간으로 옮긴 것인데, 먼저 눈을 감고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 거리의 바나 공원에 엄마와 앉아 있을 때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떠올린 것에서 출발했다. 화려한 색과 맛으로 나를 유혹하던 아이스크림과 소다 같은 다채로운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면 좀 더 디테일한 사물을 수집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이 마르셀의 유년기를 불러낸 것처럼 기억을 구체화하는 특정 사물이 있지 않나. 이 경우에는 클래식한 환타 보틀이었다. 이베이에 올라온 수많은 환타 보틀을 찾아보다가 어린 시절 그 디자인의 패키지를 찾은 순간, 관련된 모든 기억이 밀려왔다. 이런 리서치를 통해 추상적인 기억을 정물화, 조명, 네온 설치 작품, 비디오로 풀어냈다.
MS ‘노스탤지어’는 당신의 작업을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 과거의 기억을 현대적인 비주얼로 풀어낸다. 전통과 혁신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는 편인가?
OZ 사실 무언가를 더 선호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잠시 한국에 머물며 이곳은 이탈리아와 속도가 다르다고 느꼈다. 이탈리아에서는 전통이 굉장히 중요한 가치다. 패션에서도 오래된 대기업의 존재감이 절대적이고 경제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로 새로운 일을 도모한다. 반면 한국의 젊은 세대는 전통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적극적인 태도로 또 다른 시도를 하는 것 같다. 과정이 느린 문화에서 온 나로서는 계속 변화가 일어나는 점이 신선했다.
MS 반대로 나는 브루노 무나리나 알레산드로 멘디니, 아킬레 카스틸리오니 같은 이탈리아 디자이너의 작업물에 늘 감탄하곤 하는데(웃음). 서로 다른 것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가 보다.
OZ 나 역시 한국의 전통적인 부분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창덕궁 후원을 방문한 적 있는데, 건축의 장식적 요소와 원색의 조화가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 특히 복숭아 컬러! 아마 한국에서 받은 색상에 대한 새로운 자극이 자연스럽게 나의 작업에 녹아들 것이다. (VK)
- 에디터
- 권민지
- 포토그래퍼
- 이규원, Miro Zagnoli(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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