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퍼스트레이디, 올레나 젤렌스카 인터뷰: 용기의 초상
‘전시 상황에 퍼스트레이디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 전례 없는 질문에 우크라이나의 퍼스트레이디 올레나 젤렌스카(Olena Zelenska)는 훌륭한 선례를 만들고 있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젤렌스카는 쭉 비극의 중심에 서 있다. 비가 내리던 어느 오후 공습경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키이우(Kyiv)의 북적이는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녀의 복잡하지만 다부진 표정과 녹갈색 눈은 현재 우크라이나를 관통하는 모든 감정을 담은 듯했다. 깊은 슬픔, 때때로 번뜩이는 어두운 유머, 좀 더 안전하고 즐겁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 강철과도 같은 민족적 자부심 같은 것들 말이다.
“우크라이나의 국민 모두에게 최악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모두가 어떻게 이 힘든 시기를 버티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고통스러운 나날에도 그녀에게 커다란 믿음과 영감을 주는 이들은 다름 아닌 우크라이나의 국민이다. “모두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국 승리할 것이며, 그런 믿음이 우리를 나아가게 합니다.”
처음 젤렌스카를 만난 곳은 경비가 삼엄한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정말이지 긴 여정이었다. 민간 항공기의 비행이 금지된 우크라이나로 가기 위해선 폴란드에서 새벽 기차에 탑승해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을 겪은 지역을 지나쳐야만 했다. 집무실이 있는 건물에 들어선 뒤엔 수많은 보안 검색대와 모래주머니, 군인들이 줄지어 선 복도가 이어졌다. 전시의 삶, 그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지상전과 정보전이 몹시 치열한 양상을 띤다. 항상 올리브색 티셔츠 차림으로 TV를 비롯한 여러 미디어에 모습을 비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 대통령의 경우, 정보전을 매우 잘 이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크라이나가 국제 원조와 군사 원조를 요청하며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퍼스트레이디의 역할 역시 중요해졌다. 전쟁 초기에 공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44세의 젤렌스카는 이제 여성이자 어머니, 한 인간으로서 우크라이나의 얼굴이 되었다.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수만 명의 우크라이나 여성처럼, 젤렌스카의 역할 역시 변화한다. 비록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그녀는 최근 워싱턴을 방문해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 질 바이든(Jill Biden), 행정부 국무 장관 안토니 블링컨(Antony Blinken)과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그저 영부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어머니이자 딸로서 양당 의원들에게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러시아의 공습에 죽음을 맞이한 다운 증후군을 가진 네 살 아이와 다른 아이들의 사진을 함께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원하지 않던 무언가를 지원받고자 합니다. 바로 무기입니다. 다른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집을 지키고 무사히 아침을 맞이하게 해주기 위한 무기 말입니다.”
이 메시지는 그녀의 남편,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전달해온 것, 즉 이 전쟁은 단지 우크라이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질서와 범세계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는 이야기와 동일 선상에 놓여 있다. 만약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려는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의 야망을 제지하지 않는다면, 그가 우크라이나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세계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종전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이 전쟁에서, 과연 젤렌스카와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군을 설득할 수 있을까? 젤렌스카가 연설한 날, 러시아의 외무 장관은 서구권 국가에서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무기를 지원할 경우 더 적극적인 공세를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철수하기 전까지는 협상을 논의할 생각이 없다. 우크라이나는 승리할 수 있다고 믿지만, 러시아 역시 현재까지 차지한 영토를 포기할 것 같지 않다. 이 모든 과정에서 미국 백악관은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러시아를 적대시하지 않는 미묘한 선을 지켜왔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국가 역시 우크라이나에 군사적이고 기술적인 도움을 주지만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가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러시아에 전쟁 자금을 조달하는 셈이다.
젤렌스카의 워싱턴 방문이 실질적인 결과를 불러올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미지 메이킹의 힘을 상기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보그 우크라이나>에서 에디터로 근무한 테탸나 솔로베이(Tetyana Solovey)는 젤렌스카의 존재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번 전쟁에서 우리는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젤렌스카는 개인이 전쟁을 겪는 과정을 처음 이야기한 사람이에요.” 테탸나의 말처럼 젤렌스카는 우크라이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전쟁 초기에 미디어에는 온통 ‘바이든은…’ ‘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은…’ ‘올라프 숄츠(Olaf Scholz)는…’ 같은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거물 정치인들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의견과 푸틴이 무엇을 원하는지와 같은 것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젤렌스카의 존재는 더 특별합니다. 그녀 덕분에 우크라이나가 현재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지 모두 알 수 있었으니까요.”
6월 초 젤렌스카는 키이우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찾았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어린아이 200여 명(한 달 뒤엔 300여 명이 되었다)의 부모들을 위로하는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크라이나의 모든 이가 여러분의 슬픔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고 세상을 떠난 그들에게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의 바람을 들어주세요. 본인을 돌보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후 젤렌스카와 부모들은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을 위해 나무 위에 종을 걸었다. 젤렌스카가 그때를 떠올리며 더없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히 울릴 그 종은 무고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합니다. 성당 앞에 머무는 1시간 내내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요.” 러시아의 미사일이 민간 시설을 폭격하는 가운데, 젤렌스카는 트라우마를 겪는 우크라이나인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정신 건강의와 교사, 약사, 사회복지사와 경찰관 등이 카운슬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트레이닝 세션을 지휘한 것이다. “더 크게 보자면, 이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 차원에서 모두의 정신 건강 증진을 꾀하고자 합니다.” 이는 구시대적 전쟁과 폭력에 대한 완벽하게 현대적인 대처이며, 단순한 생존을 넘어 장기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훌륭한 방안이기도 하다.
내가 만난 젤렌스카는 솔직하고 근엄하면서 우아한 사람이었고, 우크라이나 디자이너들의 프로모터였다. 첫 만남에 그녀는 아이보리 컬러 실크 블라우스와 벨벳 소재 나비넥타이, 종아리를 살짝 가리는 블랙 스커트에 금발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음 날은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와이드 청바지와 적갈색 버튼다운 셔츠 차림에 하얀 스니커즈를 신었다. 우크라이나 브랜드 더 코트의 모금 프로젝트로 판매하는 하얀 스니커즈엔 우크라이나의 국기 컬러 파란색과 노란색이 더해져 있었다.
순간 그녀의 셔츠가 키이우 교외의 이르핀(Irpin)과 부차(Bucha) 지역에 줄지어 있는, 불타버린 러시아군 탱크와 비슷한 색깔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의 집단 학살로 지금은 악명 높은 공동묘지가 돼버린 부차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의 전범 행위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군이 부차에서 저지른 잔혹한 행위에 대한 소식이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았을까? 젤렌스카는 이렇게 답했다. “첫 몇 주간은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 자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부차 학살 이후, 러시아군이 우리를 몰살시키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몰살을 목표로 하는 전쟁과 우크라이나의 패션계를 같은 기사에서 논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이 우크라이나의 현실이다. 디자이너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모국을 위해 국내외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고 혼란스럽다. 키이우의 카페에서 평온하게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데, 고작 차로 1시간 거리인 부차에서는 이토록 참혹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이 믿어지나?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전쟁이 젤렌스카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녀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운 채 지내야 했다. 목숨을 잃은 어린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두 눈은 슬픔으로 가득 찼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창밖을 바라보며 배를 감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군의 최우선 타깃이었고, 젤렌스카와 그녀의 아이들은 두 번째 타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젤렌스카는 불안감을 내비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요.”
2월 24일 전쟁이 발발한 새벽에 젤렌스카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두 자녀, 열여덟 살 올렉산드라(Oleksandra), 아홉 살 키릴로(Kyrylo)와 함께 대통령 관저에 머물고 있었다. 수개월간 바이든과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와 유럽 국가에 러시아군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경고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도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바로 집무실로 가서 계엄령을 선포했다. 러시아의 탱크가 키이우를 향해 돌진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결코 숨지 않았다.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 국가를 버리고 도망친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 그는 전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이 남긴 “우리에겐 탈것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는 말은 모두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전쟁 둘째 날 젤렌스키 대통령은 본인의 팀과 함께 영내를 벗어나 (지금은 아주 유명해진) 핸드헬드 영상 메시지를 직접 촬영하며, “저희는 바로 여기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를 지키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로 우크라이나인을 독려했다. 그 후 매일같이 촬영한 영상은 국민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젤렌스키는 인기 코미디언이자 연예인이었다. 영화 <패딩턴>의 패딩턴 배역 성우였고, 우크라이나판 <댄싱 위드 더 스타> 우승자였다. 당선 후 젤렌스키는 방송사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친구들을 불러 모아 정부 요직에 등용했고, 무능한 내각을 구성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최근 그는 우크라이나의 보안 기관을 총괄하던 어린 시절 친구를 해고했다.)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현재 젤렌스키 대통령과 그의 팀이 매우 훌륭하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럽연합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하는 우크라이나 앞에는 수많은 개혁과 아주 긴 여정이 기다리겠지만, 대통령은 전성기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전쟁 직후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와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미국과 유럽의 원조를 요청했지만, 젤렌스카와 두 자녀는 안전한 장소를 오가며 공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혼란 속에서 젤렌스카는 영부인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의자에 앉아 부정적인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전시 상황에 맞춰 본인의 루틴과 계획을 수정했고, 때로는 아이들의 온라인 학습을 도와주었으며, 함께 보드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다시 읽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일종의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끔찍한 우연의 일치입니다. 지금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부분이 정말 많아요.”
한동안 젤렌스카는 남편이나 부모와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전쟁 전엔 매일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다행인 것은 두 자녀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보안상 이유로 아직도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그는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다른 수많은 우크라이나의 가족처럼 젤렌스카 가족 역시 헤어진 채로 지금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900만 명 정도의 우크라이나인이 전쟁 이후 나라를 떠났고, 그중 대부분은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었다. 18세에서 60세 사이의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국경을 벗어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우크라이나 국토방위군에 복무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절망적이게도, 전쟁이 발발하는 동안 5,000여 명의 우크라이나 민간인이 사살됐다. 전쟁이 가장 격렬하던 때는 하루에 200명의 우크라이나군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5월 8일 어머니의 날, 젤렌스카는 질 바이든과 함께 우크라이나 서부의 피란민 보호소를 방문하며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결코 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모두를 위해 일할 것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졌다. 국민의 봉화이자 감정적인 피란처. 그것이 젤렌스카가 새롭게 정립한 자신의 역할이었다.
전쟁 전에도 그녀는 취약 계층, 특히 소외 아동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가정 폭력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저명한 셰프를 데려와 공립학교 식당의 영양을 점검하며 고기와 감자 위주로 제공되던 기존 식단에 채소와 과일을 추가하도록 하고, 세계 각지의 유명 박물관에 우크라이나어 오디오 가이드를 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젤렌스카의 노력이 해외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러시아군이 학교 건물을 폭격하며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해지자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하던 젤렌스카는 러시아의 전략을 영화 <헝거게임>에 빗대어 설명했다.
그 연설은 강경한 메시지를 부드럽게 전달하는 젤렌스카의 스타일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젤렌스카와 그녀의 가족은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더 이상 소수 집권층, 부패한 정치인이 지배하던 소비에트 연방 해체 직후의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자주적이며 젊고 미래지향적인 나라가 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실제 런던에서 주로 활동하며 이 기사의 스타일링을 맡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디자이너 줄리 펠리파스(Julie Pelipas)는 젤렌스카를 “모던하면서도 현실적”이라고 묘사했다. “젤렌스카는 옷차림에 대해 매우 엄격하면서도 다양한 실험을 위해 약간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수트 팬츠를 입고 대통령 옆에 서면 너무 남성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같은 걱정은 하지 않아요.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여성들도 그녀와 같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두려움이 없죠.”
젤렌스카가 워싱턴을 방문하기 얼마 전, 나는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젤렌스카에 대한 생각과 그녀가 어떤 도움을 주는지에 대한 질문을 보냈다. 그리고 그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보안 요원을 통과한 뒤 키이우의 관저에 도착하자 비로소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깨달았다. 발밑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나무 바닥이, 눈앞에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를 통해 익숙해진 책상과 우크라이나 국기가 있었다. 그리고 젤렌스키 대통령이 올리브색 스웨터와 팬츠를 입은 채 피곤한 얼굴로 긴 테이블 끝에 앉아 있었다. 악수를 나눈 뒤, 나는 그가 집무실에서 치르는 전쟁에 대해 물었다. “여기도 최전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나라를 떠난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을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본인의 가족을 포함해 남아 있는 국민 모두가 롤모델과 같다고 덧붙였다. “젤렌스카와 아이들이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우크라이나의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훌륭한 모범 사례죠.”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의 영토 중 상당 부분이 러시아군에 점령당하며 전쟁은 중대한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2월 이후 러시아군이 점령한 영토와 2014년 러시아가 합병한 크림반도 수복을 목적으로 더 많은 군사 지원을 원한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시들어가는 반면에 전 세계적으로 휘발유값을 비롯한 물가는 급속도로 상승 중이다. 이런 국제 상황에 대해 묻자 아주 솔직한 답변이 돌아왔다. “형식적인 답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휘발유, 심지어 코로나마저도 현재 우크라이나의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나라가 우크라이나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때도 휘발유값이나 전기세를 먼저 생각할까요?” 그리고 대통령은 이 전쟁이 우크라이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일이 다른 나라에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만일 세계가 러시아의 침공을 좌시한다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가치가 지켜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크라이나에는 더 많은, 확실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그의 가족에게 전쟁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물었다. “다른 가장들처럼 저 역시 가족의 안전이 몹시 걱정됩니다. 그들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으면 하죠. 키이우 외곽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일과 러시아군이 점령한 영토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세요. 당연히 가족이 보고 싶고, 그들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젤렌스카가 모든 것을 견뎌낸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고 말을 이었다. “원래 그녀는 강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인할지도 모르죠. 누구나 전쟁을 겪다 보면 자기도 몰랐던 모습을 발견하기 마련입니다.”
단호한 말투로 영부인 젤렌스카에 대해 이야기하던 대통령은 한결 부드럽고 따뜻한 어조로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와 부부가 함께한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죠. 우크라이나를 깊이 사랑하는 애국자이며, 이상적인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젤렌스카는 고등학생 시절 고향인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공업 도시 크리비리흐(Kryvyi Rih)에서 처음 만났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젤렌스카의 인상과 표정에서 매력을 느꼈다. “보통 사람을 처음 만날 때는 눈과 입을 가장 먼저 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했다. “누군가와 놀라울 정도로 대화가 잘 통하면 호감이 사랑으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제가 딱 그랬죠.” 젤렌스카에게 젤렌스키 대통령과 처음 만난 때에 대해 질문하자, 그녀는 유머 코드가 맞았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젤렌스카에게 농담을 던졌는지 그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녀가 내 농담에 항상 웃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요.”
젤렌스카의 본명은 올레나 키야슈코(Olena Kiyashko)다. 어머니는 건설 회사의 매니저이자 엔지니어였고, 아버지는 공업학교의 교수였다. 그녀와 젤렌스키 대통령 모두 형제자매가 없다. 둘 다 러시아어를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후에 우크라이나어를 배웠다. 그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열한 살이었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하던 1991년에는 중학생이었다. 사춘기의 젤렌스카는 에어로스미스와 비틀스를 들으며 자랐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될 무렵, 저희는 10대 소년 소녀였습니다.” 젤렌스카는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두고 개인적으로 “세상이 열리기 시작한” 경험이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더 충격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30대의 우크라이나인 대부분이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뒤에 태어났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대라 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배경이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젤렌스카는 건축학, 젤렌스키 대통령은 법학을 전공했지만 둘 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미디 쪽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처음 젤렌스카는 코미디언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그땐 이미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명 대회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는 코미디 극단을 차린 뒤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훌륭한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던 셈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극단은 이후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는 2003년 젤렌스카를 포함한 친구들과 함께 러시아어권에서도 손에 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프로덕션 컴퍼니 ‘크바르탈 95’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은 그들이 자란 크리비리흐의 한 구역에서 비롯됐다.
‘크바르탈 95’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출연했고, 젤렌스카가 작가로 활동한 인기 프로그램 <이브닝 크바르탈(Evening Kvartal)>을 제작했다. 젤렌스카는 이 프로그램의 유일한 여성 작가였지만, 그 상황을 즐겼다. “코미디 업계의 문은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열린 듯 보이지만, 남성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여성이 이 길을 택해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죠.” 더 인기 있고 덜 신랄한 버전의 <SNL>이라고 할 수 있는 <이브닝 크바르탈>은 우크라이나 정치인에 대한 풍자가 주를 이룬 쇼였는데,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엄청난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TV 제작자인 젤렌스키 대통령의 오랜 친구 알렉산더 로드니안스키(Alexander Rodnyansky)는 <이브닝 크바르탈>이 구소련 지역의 유일한 정치 풍자 프로그램이었다고 꼬집었다. 로드니안스키는 황금 시간대에 <이브닝 크바르탈>을 방영한 우크라이나 방송국의 총책임자였다. “젤렌스키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우크라이나의 사회적, 정치적 과정 전반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젤렌스키는 2015년 TV 시리즈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에서 지배층의 정실주의와 부정부패를 비판하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가 결국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된 ‘바실 페트로비치 홀로보로드코’ 역을 연기하며 더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젤렌스키가 대선에서 승리하며 시리즈의 내용을 현실로 만드는 묘한 일이 벌어졌다. 로드니안스키는 젤렌스키의 당선이 확정되기 전 그와 나눈 대화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딱 5년만 할 거야. 우크라이나를 더 나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 오스카를 탈 거야.’ 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죠.”
하지만 젤렌스카는 남편의 출마를 반기지 않았다. “물론 그의 결정을 존중했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뒤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게 제게 더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처음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저와 가족의 삶이 아주 많이, 어쩌면 영원히 바뀔 거라고 생각했죠. 제게도 많은 일이 주어질 거라 예상했고요. 물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젤렌스카는 전쟁 이전, 영부인이 되기 전을 회상할 때 가장 편안해 보였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아델의 콘서트에 간 일, 친구들과 함께 폴란드 크라쿠프(Kraków)에서 마룬5의 콘서트를 본 일, 주말을 이용해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간 여행, 가족과 함께 본 영화… (젤렌스카는 <가을의 전설>과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매우 좋아하고 가족과 함께 <포레스트 검프>를 수없이 봤다.) 모든 우크라이나 국민이 그렇듯, 그녀 역시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를 간절히 원한다.
젤렌스카에게 전쟁을 예상했는지 묻자,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죠. 하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그녀의 공포와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가 전혀 없으니까요. 요즘 같은 때 쇼핑하러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죠.” 하지만 그녀는 국가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우아하고 용감하게 본인 앞에 닥친 상황에 대처했다. “책임감이라는 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키이우에서 보낸 마지막 날 아침 폴란드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기 전, 나는 마이단 광장을 걸으며 시민들에게 젤렌스카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대답은 모두 긍정적이었다. (‘러시아 전함이여, 엿이나 먹어라’라는 유명한 우표를 발행한) 우크라이나의 주 정부 우표 디자인 사무소에서 근무한다는 안토니나 시리크(Antonina Siryk)는 젤렌스카를 “매우 겸손하며 현대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보험업에 종사하는 스비틀라나 카르포우(Svitlana Karpov) 역시 “젤렌스카의 가족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집니다”라고 말했다.
집무실에서 젤렌스카에게 작별을 고하기 전, 그녀가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러시아가 폭격을 가한 하르키우(Kharkiv)라는 도시에 관한 책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러시아군은 전방과는 거리가 먼 키이우 남서부에 있는 도시 빈니차(Vinnytsia)에도 폭격을 가했다. 이건 안전지대는 없다는 뜻과도 같았고, 젤렌스카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녀는 보좌관의 휴대폰으로 빈니차에서 폭격으로 사망한 아이의 사진을 보여줬다.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지금 젤렌스카는 본인이 원치 않던 일을 최선을 다해 해내는 중이다. 나는 젤렌스카와 악수를 나눴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줬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곧 가족과 다시 만나 식탁에서 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그녀의 답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그럴 수 있기를 꿈꿉니다.”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크라이나의 가족을 위하여.
- 포토그래퍼
- Annie Leibovitz
- 글
- Rachel Donadio
- 스타일리스트
- Julie Pelipas
- 스타일 어시스턴트
- Anastasiia Popadianets, Maria Hitcher
- 헤어
- Igor Lomov
- 메이크업
- Svetlana Rymakova
- 프로듀서
- Maryna Sandugey-Shyshkina
- 라인 프로듀서
- Maryna Shulikina, Vlad Mykhnyuk, Kasia Krychow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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