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서바이벌
대한민국만큼 음악 평가를 즐기는 나라가 또 있을까? “쟤는 고음이 불안해.” “다 좋은데 플로우가 별로야.” “춤 선이 안 예뻐.” 섬유2팀 노래왕 김 과장도, 중동고등학교 2학년 1반 고등 래퍼도, 교동초등학교 박 모 어린이도 저마다 음악관을 드러낸다. 불광1동 노인정 최 모 할머니는 <미스터트롯> 이찬원의 ‘삑사리’도 사랑스러운 모양이지만.
이처럼 전 국민이 음악 평론가로 나서기 시작한 시점은 2009년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가 방영되면서부터다. 그 후로 음악 경연 프로그램은 힙합(<쇼미더머니>), 아이돌(<프로듀스×101>), 트로트(<미스트롯>, <미스터트롯>)로 세분화됐고, ‘가왕’을 줄 세우는 경연(<나는 가수다>)까지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엔 ‘K-팝 프로듀서들의 프로듀싱 배틀’이라는 신박한 컨셉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리슨 업>까지 등장했다. 이렇게 해가 갈수록 모든 종류의 음악 배틀이 생기는 분위기라면, 실로폰, 캐스터네츠 같은 기악 대결 프로그램도 생기는 게 아닐까.
록 밴드 서바이벌 프로그램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
경연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 ‘록 밴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또다시 등장했다. Mnet에서 지난달에 처음 방송한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은 총 18팀의 밴드가 상금 1억원과 해외 진출 기회를 놓고 경쟁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제목만 보면 난데없이 ‘서울을 왜 침공한다고 난리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1960년대 비틀스를 필두로, 영국 록 음악이 로큰롤 종주국 미국을 뒤흔들며 역사적인 성공을 거둔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염두에 둔 제목이다.
“120여 일간의 혹독한 생존 게임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생존한 단 한 팀의 밴드만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특권을 독점하게 될 것입니다.” 정체를 감춘 외국인 ‘미스터 G’가 서바이벌 우승자를 스타로 만들겠다는 설정. <오징어 게임> 같으면서 별로 위트 있지는 않지만, 프로그램 룰은 퍼즐 게임처럼 복잡하다.
온라인 예선을 거친 18팀의 밴드가 평가 위원에 해당하는 ‘팀 리더’ 앞에서 공연을 펼치고 팀 리더들은 해당 밴드를 자기 팀에 넣을지 선택한다. 선택받지 못한 밴드는 탈락한다. 여기에 밴드끼리 서로 공연을 평가해 100점 만점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 추가된다. 끝이 아니다. ‘추가 합격’에 ‘체인지 카드’ 같은 룰을 더해 누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는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보지 않으면 알기가 쉽지 않다.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은 참가 밴드 18팀을 각종 그룹으로 엮었다. 무대 경험이 적고 평균 나이가 적은 ‘성장 밴드’ 그룹, 홍대에서 활동 중인 ‘검증된 실력파 밴드’ 그룹, 아이돌 소속사 출신의 ‘K-팝 보이 밴드’ 그룹, 어떤 기준인지 확실치 않은 ‘여심 저격 밴드’ 그룹 등이다.
제작진 설명대로라면 햇병아리 밴드와 검증된 실력파, 이미 해외 투어 일정이 잡힌 대형 기획사 출신 아이돌 밴드가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고 팀 리더의 선택을 받은 뒤 그들의 티칭에 따라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소속사 자본으로 프로듀싱된 아이돌 밴드와 다년간 라이브로 홍대에서 실력이 검증된 밴드의 성장을, 그들과 음악 경력이 별로 차이 나지 않는 팀 리더들이 돕는다는 게 앞뒤가 맞는 건가?
밴드판 <쇼미더머니>?
평가 위원에 해당하는 팀 리더는 적재, 페퍼톤스, 엔플라잉, 노민우, 권은비, 고영배, 윤성현, 김재환 등이다. 앨범 발매 기준으로만 보면 2014년 EP를 발표한 밴드 ‘워킹애프터유’와 같은 해 데뷔한 아이즈원 출신 권은비의 음악 경력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 2017년 워너원으로 데뷔한 김재환은 2014년 데뷔한 ‘나상현씨밴드’보다 음악 경력이 짧다.
‘애초에 밴드 음악을 왜 아이돌이 평가를…’ 같은 편협한 시각은 제쳐놓더라도, 팀 리더들의 역할이 온전히 밴드를 평가하고 성장을 돕는 것이라면, 일부 출연진의 음악 경력과 관련된 역량은 고개를 끄덕일 수만은 없는 실정이다. 고등학교 1학년이 수능 앞둔 수험생을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니까.
특히 국내 록 밴드 경연 프로그램 최초로 도입한 참가자 간의 ‘자체 평가’ 방식은 부정적으로 신선했다. Mnet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퀸덤>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이 시스템은 서바이벌 참가자들이 다른 참가자의 공연을 평가하고 최고점과 최하점을 준 팀을 공개해 밴드 간에 무의미한 신경전을 벌이도록 만들었다.
자기 밴드에 최저점을 준 밴드에게 똑같이 최저점을 주고 사실상 프로그램 진행 역할을 맡은 팀 리더들이 밴드 간 싸움을 부추기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피로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저 팀은 마이너스 점수 줄 수 없나”, “저런 음악은 신선하지 못하다”와 같은, 홍대 클럽 대기실에서도 밴드끼리 나누지 않을 얘기를 마이크에 대고 공공연하게 말하도록 만드는 비정한 연출은 정말 ‘밴드 음악을 위한 프로그램’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이번에도 디스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참가자 간 경쟁을 유발하는 ‘디스전’ 자체가 의미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국내 오디션 프로그램 최초로 10년을 넘긴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의 흥행 요소 중 하나는 참가자 간에 일대일 랩 대결을 벌이는 ‘랩 배틀’이다.
즉흥적인 가사를 사용해 경쟁하거나 서로 싸우는 ‘랩 배틀’과 서로를 자극하는 ‘디스전’은 힙합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미국 서부 힙합 신을 대표하는 투팍과 동부를 대표하는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의 디스전은 힙합 역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결론적으로 힙합은 ‘경쟁 시스템’이 일반화된 음악 장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록 음악은 태생적으로 배틀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일대일로 랩 배틀을 벌이는 래퍼와 달리 록 밴드는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파트가 각각 소리를 내며 곡을 들려줘야 하고, 똑같은 곡을 서로 다른 밴드가 연주하지 않는 이상 실력 대결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게다가 배틀 문화가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힙합처럼 다른 뮤지션을 비난하기 위한 곡 만들기에 정성을 쏟지도 않는다. 비난 대상이 자국 최고 권위자(Sex Pistols ‘God Save the Queen’)거나, 백인 우월주의자 경찰관(Rage Against the Machine ‘Killing in the Name’)이라면 모를까.
또한 록 음악이라고 하나로 묶는 게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 장르와 형태가 다양해 음악 간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메탈리카의 ‘Master of Puppets’가 너바나의 ’Lithium’보다 연주하기 어렵다고 더 나은 곡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본 조비의 보컬 역량이 존 레논보다 뛰어나다고 본 조비가 비틀스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밴드 ‘차세대’의 자진 하차
그럼에도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이 열과 성을 다해 밴드 간의 경쟁을 유발하는 가운데, 지난 3일 방송분에서는 급기야 밴드 ‘차세대’가 자진 하차를 결정했다. 윤성현, 김재환 팀의 선택을 받아 2라운드 진출을 확정했으나, ‘체인지 카드’ 시스템에 의해 ‘탈락-추가 합격’ 과정을 거친 차세대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길과 맞지 않는 프로그램”이라며 무대를 떠났다.
팀 리더 윤성현, 김재환은 “그럴 거면 애초에 나오지 않는 게 맞지 않았을까?”, “그럼 왜 나온 거냐, 놀러 나온 거냐?”라는 말로 비아냥댔다. 그럼에도 차세대는 ‘우리만의 길을 가겠다’는 메시지를 전할 뿐 ‘2라운드 진출 팀 결정’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팀 리더에게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차세대의 하차 선언 직후 “홍대 자존심 챙겨버리는구나”라고 말한 다른 참가자의 발언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록 밴드스러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보면 대답이 이어지지 않을까.
그들이 떠난 지난 10일 방영분에선 2라운드 살아남기 대결이 시작됐다. 자작곡 대결이었다. 그러나 3라운드 패자부활전에서는 방탄소년단의 노래 커버 미션이 예고됐다. 그 진부하디 진부한 ’커버 곡 대결‘이었다.
프로그램 제작 발표회 당시 “커버곡이나 보컬 위주의 무대보다는 밴드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로 준비했다”고 설명한 제작진의 취지가 무색하게도.
이런 인과를 생각해보면 적어도 지금까지 이 소모적인 프로그램에서 가장 ‘서바이브’한 건 차세대일지 모른다.
록 밴드 경연 프로그램이 밴드 음악의 부흥을 이끌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밴드 음악이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으면 했다’는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 측의 제작 의도대로 이 프로그램이 국내 록 음악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영향을 미칠까?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 심사에 참가한 어느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좀 더 유니크한 밴드는 초반에 탈락할 수밖에 없고, 결국 규격화된 음악을 하는 밴드밖에 남을 수 없는 구조라고 할 수 있죠. 록 음악은 밴드 각각이 가진 치명적 결함이 하나씩 매력으로 변모하고, 뭔가 하나 비어 있는데 그게 멋있어서 사람들이 반응해온 역사로 흘러왔어요. 그런데 뭐든 강박적으로 채우고 잘 보이기 위한 액션을 하지 않으면 떨어트리는 구조인데 이걸 진짜 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데뷔 16년을 맞은 한 인디 밴드 뮤지션은 “록 밴드를 위한 프로그램이랍시고 진짜 밴드를 위한 프로그램이 한국에 있었나요? 진심이라면 그렇게 만들 수 없을 것 같은데. <탑 밴드>와 <슈퍼밴드> 덕에 공연장에 사람들이 늘었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2010년부터 지금까지 밴드가 꾸준히 줄어드는 이유가 뭘까요? 보러 안 오잖아요. 공연장에도 안 오는데 밴드 나오는 프로그램 하나 만들었다고 한국 밴드를 세계에 알릴 수 있을 거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라고 말했다.
‘10대 트로트 스타’도 나오는 세상에 ‘록 밴드 키드’가 되겠다는 10대는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중고 악기 사이트 ‘뮬’의 줄어든 악기 거래량이 말해주듯이. 록 밴드를 다룬 서바이벌 프로그램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의 등장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걸까? 살아남은 밴드는 ‘잘하는’ 밴드, 살아남지 못한 밴드는 ‘못하는’ 밴드라는 공식을 그들이 이어간다고 해도.
다만 음악을 듣고 ‘좋다’, ‘아니다’로 감상하기보다는 음악을 ‘잘한다’, ‘못한다’로 판단하는 사회라면, 과연 알게 될까? 비틀스가 미국을 점령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성공은 ‘살아남은’ 음악이라서가 아니고 ‘살아 있는’ 음악이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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