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하고 견고한, 더없이 크리스탈
영국, 오후, 정원, 저택… 더없이 정중한 크리스탈.
크리스탈은 대중에게 다가서기보다 그들을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그래도 되는 것은 그가 어떻게든 눈에 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조금씩은 연기를 하며 산다. 지향과 실재 사이 간극, 그것을 메우려는 욕망의 크기는 그가 쓰고 다니는 모자와 같아서 감추려야 감춰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그 모든 안간힘이 피곤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일체의 꾸밈에서 벗어나 물 흐르듯 사는 사람들, 자연스럽게 자신으로 존재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우리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크리스탈은 데뷔 초부터 그랬다. 내성적이고 낯가리는 성격을 애써 감추지 않았고 애정을 갈구하며 대중에게 아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차갑다는 오해도 받았지만 그를 오래 지켜본 팬들은 그의 친절함과 소탈함을 안다. 소통의 양이 중요해진 시대지만 그는 많은 말로 기억되는 스타가 아니다. 현란한 언어로 인터뷰어를 편하게 해주는 마감계의 월척도 아니고, 아이돌이라지만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소위 ‘망가지는’ 척하며 대중을 즐겁게 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질문을 위한 질문에 모른 척 맞장구를 치는 대신 멋쩍은 웃음으로 답하는 사람, ‘성공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대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애써 자신을 꾸미지 않지만 내실이 건강해 솔직함만으로 충분한 사람, 그게 크리스탈의 이미지였다. 이런 이미지도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겠으나 크리스탈의 아우라는 그것으로 완성되었다.
에프엑스로 활동하던 시절 크리스탈은 청순, 섹시로 양분되던 K-팝 아이돌 여성상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스스로 추가했다. 카리스마 있는 외모와 강한 눈매, 당시로선 희귀하던 복근의 조합은 단연 눈에 띄는 것이었고, 여성 팬들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유년기 해외 생활을 비롯해 다양한 경험에서 우러난 세련된 감각, 톱스타 자매 중 사랑받는 막내라는 배경, 특유의 무심한 듯한 성격이 결합해 그의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그가 랄프 로렌의 앰배서더로 오래 활동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단순하지만 그 안에 강한 캐릭터가 있어 시선을 잡아 끌고, 고전적 기품과 모던함이 공존한다는 건 그 자체로 크리스탈의 개성이기도 하니까.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걸 입는 게 최고! 개인적으로는 트렌디한 패션 아이템보다 클래식한 걸 많이 갖고 싶어요. 10년 뒤에도 입을 수 있는 것. 제가 생각하는 저의 패션 아이콘은 브리짓 바르도, 샬롯 카시라기, 재키 오나시스, 캐롤린 베셋 케네디 등 아주 많아요. 실제로 가까이 영감을 얻는 건 엄마, 아빠예요. 젊은 시절 부모님 사진을 보면 지금 당장 입고 싶을 정도로 멋져요.”
활동명에 정수정을 추가하고 본격 연기를 시작한 후, 그는 신인으로 돌아간 듯 크고 작고 역할을 가리지 않고 소화했다. <하백의 신부 2017>의 화려한 여신 무라는 고유의 냉미녀 이미지를 완벽하게 활용한 작품이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아픈 사랑을 하는 지호는 그를 보다 넓은 시청자층에 본격 배우로 각인시킨 역할이었다. 그 후 <플레이어>의 뒷골목 드라이버, <써치>의 강단 넘치는 군인, 환경을 극복하려 애쓰는 <경찰수업>의 악바리 강희, 첫 로코 <크레이지 러브>의 엉뚱한 신아, 영화 <애비규환>의 비혼모 토일, <새콤달콤>의 새침한 계약직 사원 보영까지, 그는 작품이나 배역의 규모를 떠나 “나에게 새로운지, 내가 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캐릭터를 선택해왔다. 아이돌 크리스탈이 어려운 춤을 쉽게 추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듯 배우 정수정은 심오한 고뇌나 동요 없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변화를 덤덤하게 소화해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는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왔다.
최근 정수정은 커리어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될 작품 한 편을 끝냈다. 김지운 감독이 연출하고 송강호, 임수정, 오정세, 전여빈이 함께 출연하는 <거미집>이다. <거미집>은 정수정의 첫 메이저 상업영화가 될 것이다.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편은 아니지만 첫 메이저 영화가 <거미집>인 게 의미가 없을 순 없을 것 같아요. 현장 분위기가 기대 이상으로 매우 좋아서 정말 재미있게 촬영했고, 잘해내야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임수정 언니와 김지운 감독님은 이전에 한두 번 뵌 적이 있어요. 사석이 아닌 현장에서 같이 작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설렜고 정말 신기했어요. 송강호 선배님 포함, 모든 배우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정말 좋았어요. 제가 막내여서 모두가 저를 많이 도와주고 리드해줘서 감사했죠.”
<거미집>의 배경은 1970년대다. ‘다 찍은 영화 <거미집>의 결말을 다시 찍으면 더 좋아질 거라는 강박에 빠진 감독(송강호)이 검열 당국의 방해와 바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우와 제작자 등 미치기 일보 직전의 악조건에도 촬영을 감행하면서 벌어지는 처절하고 웃픈 일들을 그리는’ 블랙코미디다. 그가 살아보지 못한 1970년대를 정수정은 어떻게 상상하고 있을까. “자유로움이 생각나요. 모든 게 가장 자유로웠던 ‘Decade’였다고 들었어요. 예술적으로도 자유롭게 많은 걸 표현할 수 있었던 시대. 그때의 영화, 모델, 배우, 음악, 스타일 등 좋아하는 게 너무 많은데… 몇 개를 꼽자면 미국의 <Soul Train> 쇼, 이탈리아 영화 포스터나 사운드트랙 앨범이 진짜 좋아요.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시대의 배우가 되어보고 싶어요.”
그에게 <거미집>은 꽤 즐거운 작업이었을 듯하다. 정수정은 극 중 인기 급상승 중인 신인 배우로 출연한다. <거미집>은 흑백과 컬러가 한 프레임에 담기는 독특한 형식의 영화로 알려졌다. 1970년대 배우로 분해 흑백 프레임에 담긴 정수정이라니 캐스팅이 이보다 적절할 순 없다. 그에게는 확실히 클래식 배우 같은 드라마틱한 이미지가 있다.
자신을 드러내는 취미도 없고 나르시시즘과도 거리가 먼 그는 아직 화면에 나온 자신을 보는 게 어색하다. 좋아하는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보는 타입인데도 자신의 작품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민망해요. 지인들과 TV 볼 때 채널 돌리다가 제가 나오면 리모컨을 뺏든지 도망가든지 해요.” 화면에 나온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는 지금의 자신에게서 멀어진 훗날에나 알게 될 것 같다.
연달아 드라마와 영화 촬영, 패션 브랜드 출장을 끝낸 정수정은 현재 LA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매년 겨울이면 저희 자매의 전통처럼 스키를 탄 후 휴양지로 여행을 갔어요. 예를 들어 스토에서 바하마, 베일에서 로스카보스 코스였죠. 그런데 최근 몇 년은 코로나와 일 때문에 못 갔어요. 얼른 다시 가고 싶어요.” 스키를 타는 대신 이번 여행에는 직접 요리를 하고 음악을 들으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배달을 시키거나 외식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그냥 간단한 거라도 집에서 해 먹는 게 좋더라고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최근엔 파스타, 김치찌개, 김치전 등을 해봤어요. 요즘 꽂힌 음악은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의 ‘Dreams’. 제 플레이리스트에 항상 들어 있는 곡인데 요즘 다시 매일 듣고 있어요.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노래예요.”
끝으로 그에게 스물여덟이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팬들이라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너무나도 정수정다운 답이 돌아왔다. 기발한 답이 아니어서 맥이 빠졌냐면, 그건 아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정수정이니까.
“나에게 오지 않을 것 같은 숫자면서도 늘 기다려온 나이.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인생의 어떤 단계에 있다는 건 본인이 판단하기보다 남들이 정해주는 것 같아요. 저는 그냥 늘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VK)
- 포토그래퍼
- 장덕화
- 패션 에디터
- 손기호
- 글
- 이숙명(칼럼니스트)
- 스타일리스트
- 윤지빈
- 헤어
- 경민정
- 메이크업
- 최수일
- 프로덕션
- 비주얼 파크(Visual Park)
- Sponsored by
- Ralph Lau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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