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의 김민영’ 기꺼이 A를 주고 싶은
고요한 열기와 청정한 패기가 느껴지는, 올해의 발견.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니라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니, 가히 선언적인 제목이다. 채점 결과가 아니라 채점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라는 선언. ‘김민영의 성적표’라고 하면 성적표라는 결과에 물음표가 걸리겠지만 ‘성적표의 김민영’이라고 하니 김민영이라는 과정에 물음표가 걸린다.
전자는 김민영이 주체가 되는 1인칭 시점의 서사에 대한 예감을 부추기지만 후자는 김민영을 관찰하는 3인칭 시점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든다. 그리고 <성적표의 김민영>은 김민영에 관한 이야기지만 김민영에 대한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 제시하는 성적표는 김민영의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김민영만의 성적표가 아니기도 하다.
“이 선언문을 통하여 우리의 삼행시 클럽 해체를 선언합니다. 지금 우리는 수능 100일을 앞두고 학생과 자식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우리의 창작욕을 잠시 재워두려 합니다.” 고작 멤버 세 명인 비공식 삼행시 클럽 해체가 이렇게 엄숙할 일인가 싶지만 당사자들의 진지함이란 결코 함부로 폄하할 만한 것이 아니다.
마치 중세 시대의 비밀 결사단이라도 된 것처럼 기숙사 방 안에 모인 삼행시 클럽의 세 멤버 김민영(윤아정), 유정희(김주아), 최수산나(손다현)는 장엄한 침묵과 낭독으로 한 시대를 갈무리하듯 클럽 해체를 선언하며 수능 100일 전 체제에 돌입한다. 그렇게 차분하게 요동치는 마음을 억누르듯 100일을 보낸 세 사람은 수능 시험을 분기점으로 각기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청주에 남아 실외 테니스장에서 일을 시작한 정희와 대구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민영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수산나는 더 이상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기 힘든 처지지만 비대면 화상 모니터 앞에 모여 삼행시 클럽을 이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모임을 거듭할수록 예전 같지 않은 마음만 확인되는 것 같다. 삼행시로 백일장 대회 우수상까지 받았던 민영은 성의 없는 삼행시를 읊고, 심지어 모임이 있는 날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여전히 진중하게 모임에 임하는 수산나는 영문으로 사행시를 읊고, 시차에 대한 배려가 없는 멤버들을 타박한다. 홀로 청주에 남은 정희의 애착만 홀로 낡아가듯 나날이 안쓰러울 뿐이다.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 삼행시 클럽에서 유일하게 백일장 수상 경력을 거둔 민영이의 삼행시 마지막 문장처럼 클럽 활동을 함께 하던 세 친구는 수능 이후로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간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지난 시절 누구보다 가까웠던 친구들이 각기 다른 입장이 되어 허물어지는 과정을 홀로 남게 된 정희의 시선을 통해 차분히 응시한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테니스의 왕자를 찾아 테니스장 관리직에 지원했지만 나이 든 아저씨들만 즐비한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는 건 여간해선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정희에게 삼행시 클럽은 현재진행형의 낙이다. 하지만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은 친구들에게 삼행시 클럽은 점차 번거로워지는 과거의 역사일 뿐이다.
10대에서 20대로, 더 이상 미성년자는 아니지만 온전히 성인 같지도 않은 그 나이에 누군가는 이전에 없던 삶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하고, 누군가는 이전에 가능하던 삶이 허물어지는 상실을 맛본다. 누군가는 새로운 관계를 통해 이전과 다른 매일을 살고, 누군가는 소원해진 관계를 통해 이전처럼 되돌릴 수 없는 매일을 산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함께 소중하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손쉽게 과거로 밀어내도 무방한 일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지키고 싶어서 무력해지는 시간으로 흘러간다. 함께 사랑했지만 이별은 각자 하는 것처럼 미성년 시절의 우정은 학교라는 울타리로부터 벗어나 각기 다른 세계와 대면하는 20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곧잘 연약해지고 서서히 느슨해진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20대의 문턱을 넘어온 이들 대부분이 경험하던 망각과 상실의 시간에 관한 영화다. 누군가는 가볍게 잊고, 누군가는 끈질기게 기억한다. 하지만 그 불공평한 기억이란 저마다 편집된 현실의 왜곡된 반영이기도 하다. 잊은 이에게도 자신만의 기억이 있고, 기억하는 이에게도 지워진 기억이 있다.
그렇게 망각과 상실의 시계를 돌려 두 기억의 아귀를 맞추는 순간 알 수 없었던 마음이 그려진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보지 못하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봐야 하는 것을 권하고 그렇게 각자의 기억 속에 자리한 편린 같은 시간의 몸통을 되짚게 만드는 영화다. 친구의 현재를 관찰하고 채점한다는 건 결국 그 친구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되짚고 점수를 매기는, 자율 평가와 같은 시간일 것이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친구의 성격과 태도를 채점하는 성적표를 남기게 된 주인공에 관한 내용을 다룬 이재은 감독의 단편 시나리오로부터 확장된 결과라고 한다. 다만 단편 시나리오를 장편으로 발전시킬 계획은 애초에 없었고, 어느 영화 제작 워크숍에서 만났다는 임지선 감독에게 공동 연출을 제안할 때도 장편을 연출할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어쩌면 <성적표의 김민영>이 예정에 없던 장편영화로 완성된 건 두 감독의 만남에서 비롯된 필연과 우연 덕분이었을 것이다.
함께 공감하는 이야기의 뼈대를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각자 붙일 수 있는 살을 붙이며 영화에 새로운 결을 만드는 과정이 언뜻 그려진다. 이를테면 삼행시 클럽을 만들고 싶었다는 이재은 감독의 입장과 청주가 고향이라 익숙한 지역을 생각하게 됐다는 임지선 감독의 입장은 사소해 보여도 이 모든 반영이 <성적표의 김민영>의 개성을 이루는 주요한 특징이 됐다는 사실은 분명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여담이다.
그런 면에서 <성적표의 김민영>은 두 감독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은 대목이 곳곳에 산재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영화가 구사하는 기이한 유머 감각은 누구로부터 길어 올린 것인지, 직접적인 대사 대신 내레이션을 적극 활용하며 적막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톡톡 튀는 듯한 청량한 감각이 느껴지는 시각적 연출과 편집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비결은 어디서 비롯됐는지, 하나하나 캐묻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유튜브 시대의 시네마이자 웹소설 시대의 문학 같은, 참신한 감각으로 무장한 정통한 야심을 목도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할까. 묘하게도, 이옥섭 감독의 감각과 홍상수 감독의 화술을 신묘하게 아울러 빚어낸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언뜻언뜻 이경미 감독의 뾰족함과 김보라 감독의 미려함과 유사한 인상도 느껴진다.
물론 <성적표의 김민영>이 이 모든 고유명사의 아류처럼 보인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특히 망각과 상실의 대비로 점철된 두 인물의 심리를 원점으로 끌어당겨 재정립하는 결말부의 전개는 이 작품이 사려 깊은 마음에서 길어 올린 세계라는 것을 온전히 설득하고도 남는 것이다. 겉보기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만 한 지금의 친구가 한때 삭혔던 마음과 눌렀던 생각과 담았던 진심을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는 순간, 섣불리 지나왔던 시계가 다시 그 자리를 가리킨다.
그렇게 흩어진 것만 같던 시절 이전에 흔들리던 마음을 애써 잡았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스스로 손쉽게 떠밀어 보냈던 시간과 마주한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무심했던 그 시절의 너와 나로 돌아가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응원한다. 그 누구도 찾아가지 못했던 그 마음을 향해 깊숙이 발을 내딛고 손을 내민다. 청량하면서도 속 깊게, 적막하게 끝내 마음을 울린다.
그야말로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다림’을 기대하게 만드는 재능의 출현, <성적표의 김민영>은 기꺼이 A를 주고 싶은 영화다. 단일한 재능이 아니라 각각의 재능이 엮인 혼혈의 성취처럼 보여서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미래일지 몰라도 <성적표의 김민영>만큼은 고요한 열기와 청정한 패기가 공존하는, 사랑스러운 발견이다.
마음을 되짚어 지난 어느 날의 옆자리를 떠올려보고 싶게 만든다. 그 마음을 가만히 응시해보고 싶다. 거기 자리한 너와 나의 원형 같은 마음으로 오늘을 비춰보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런 영화는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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