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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던 한국 미술, 이승조가 만든 무표정한 신세계 #친절한 도슨트

2022.09.16

by 정윤원

    우리가 모르던 한국 미술, 이승조가 만든 무표정한 신세계 #친절한 도슨트

    미술 애호가에게 가장 즐거운 순간이라면 시공간을 관통하는 새로운 작가의 존재를 만날 때일 겁니다. 지구 반대편의 동시대를 사는 작가일 수도, 이 땅의 앞선 시대를 이미 살아낸 작가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특히 저마다의 삶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토양을 묵묵히 일궈온 이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는 10 30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승조의 개인전이 반가운 이유입니다. 어떤 내러티브도, 서사도 드러내지 않은 채 엄격한 질서와 규칙에 기꺼이 스스로를 포박한 그의 기하추상 작품은 제가 알던 한국 미술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일깨우며 무심히 빛나고 있습니다. 

    국제갤러리 1관(K1) 이승조 개인전 <LEE SEUNG JIO>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1관(K1) 이승조 개인전 <LEE SEUNG JIO>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3관(K3) 이승조 개인전 <LEE SEUNG JIO>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승조 작가는 1960년대부터 조형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바탕으로 고유한 기하학적 추상을 선도한 인물입니다. 나아가, 한국 모더니즘 미술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미술가이기도 하지요. 1941년에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이승조는 해방 공간기에 남하한 후 평생을 자신만의 조형 질서를 정립하는 데 매진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의 시작은 20대 초반이던 1962 동료 미술가들과 결성한오리진이라는 전위 그룹입니다. ‘오리진이란 근원, 기원을 의미하지요. 그 이름처럼, 이승조 작가는 근원을 모색하는 새로운 예술 세계를 지향하는 데 온 인생을 바칩니다. 

    이승조 작가 프로필 이미지, 1969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승조(1941-1990), ‘Nucleus 77’, 1968, Oil on Canvas, 173.7×130.9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승조(1941-1990), ‘Nucleus PM-76’, 1969, Oil on Canvas, 161.4×161.5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그런 작가에게 가장 주효한 미술 언어는 바로 파이프, 원통, 원기둥 형태의 모티브였습니다. 매끈하고 단단한 금속을 연상시키는 자신의 작업에 작가는(Nucleus)’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란 모든 물질의 기본이 되는 요소, 즉 핵심을 의미하죠. 이승조 작가는 1967년부터 일명 ‘핵’ 연작을 통해 순수한 조형 질서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원자핵처럼 미시적인 세계와 현실 혹은 세계라는 광활한 시공간을 연결 짓는 사유의 장을, 본인의 작업으로 평생 구현한 겁니다. 

    핵’ 연작은 당시 미술계에서 가히 혁명이라 할 정도로 주목받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대담하고 거친 앵포르멜 계열의뜨거운 추상이 주로 통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승조 작가는 일체의 감정과 주관을 배제한 채 완벽히 기하학적 형상에 몰두한 ‘핵’ 연작을 통해 이른바차가운 추상을 각인했습니다. 게다가 이승조의 작업은 미술가에게는꿈의 무대였던 국전, 즉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4년 연속으로 수상하며 당시 보수적인 국전에 전위의 흐름을 불어넣었습니다. 말하자면 ‘핵’ 연작으로 한국 미술계에 없던 길을 만들어내고, 그 외로운 길을 몸소 걸은 셈입니다. 

    이승조(1941-1990), ‘Nucleus 75-10’, 1975, Oil on Canvas, 146×146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승조(1941-1990), ‘Nucleus’, 1976, Oil on Canvas, 116.5×91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작가가 작업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는 모두가 맹렬하게 산업화를 향해 돌진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혁신과 혁명 혹은 미래 시대를 꿈꾸는 분위기였지요. 작품 속 파이프의 형상, 차가운 금속성의 뉘앙스는 급속한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감성의 변화이자 당시 세계와의 시각적인 연관성 혹은 속도와 자연스레 연결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승조의 작업은 세상에 대한 사회적, 문명적 반영이자, 새로운 기계문명이 가져온 지각 방식의 변화가 평면이라는 캔버스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로 세상에 알려집니다. 

    이승조(1941-1990), ‘Nucleus 85-21’, 1985, Oil on Canvas, 199×299.5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승조(1941-1990), ‘Nucleus’, 1987, Oil on Canvas, 130×97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승조(1941-1990), ‘Nucleus 89-20’, 1989, Oil on Canvas, 145×89.5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작가가 세상을 뜬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작업은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렇게 맹렬히 변화하던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의 실체를 찾아내려고 분투하던 당시 미술계에서, 순수한 추상회화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한 이승조라는 존재 자체일 겁니다. 그의 형형한 ‘핵’ 연작 앞에 서보세요. 2차원적 평면과 3차원적 입체성이 오가는 환영이 눈앞에서 어른어른 펼쳐지며, 보이는 것 이상의 것에 마음의 눈을 열게 될 겁니다. 일견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그의 작업은 회화의 시각성을 탐구하고자 한 작가의 열정, 그리고 풍문으로만 들었던 당대 사회상 및 감성을 가득 품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유일한 이승조라는 이름의 예술적 풍경은 그렇게, 우리를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멋진 신세계로 이끕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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