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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명의 번역가’ 실화 그 이상의 물음표

2022.09.09

by 민용준

    ‘9명의 번역가’ 실화 그 이상의 물음표

    현실에서 길어낸 아이디어로 겨냥한 장르적 물음의 비범한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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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는 다 계획이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4,5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다빈치 코드>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 댄 브라운의 신작 <인페르노>의 출판사 몬다도리는 2013년 5월 14일 전 세계 동시 출간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작이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는 묘안을 떠올렸다.

    전 세계 각국의 번역가를 보안 상태가 완벽하게 유지되는 공간에 가둬놓고 동시 번역을 시킨다는 것. 다소 황당한 소리 같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2013년 2월 11개국 번역가들이 이탈리아 밀라노 모처의 지하 벙커에 초대됐다. 사실상 끌려가 감금됐다. 휴대폰은 압수당했고, 노트북과 종이를 비롯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여타 물품 반입과 반출 자체가 금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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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번역가 중 누군가에게 소설을 도둑맞는다면?” <인페르노>의 번역가 11인이 지하 벙커에 갇혔다는 실태를 보도한 기사를 본 프랑스 감독 레지스 로인사드의 머리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9명의 번역가>는 거기서 시작된 영화다.

    실화는 아니지만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다.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 <디덜러스> 3권 ‘죽고 싶지 않았던 남자’를 번역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가장 판매고가 높은 9개국의 번역가를 프랑스 파리 외곽의 한 저택으로 초대한다. <디덜러스>의 팬이자 종말을 믿는다는 어느 러시아 부호가 소유했다는 이 저택에는 세상이 멸망해도 흔들림이 없을 듯한 벙커 시설이 있고, 9명의 번역가는 러시아 출신 덩치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번역을 이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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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9명의 번역가>는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물론 실제 상황과는 일말의 차이가 있다. <인페르노>의 번역가들은 벙커에 갇힌 채 생활한 것이 아니라 번역 시간 동안만 벙커에 있었고, 번역한 원고를 제출한 뒤에는 미니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호텔로 돌아간 뒤 자유 시간을 가질 수는 없었고, 보안 요원들의 감시하에 생활했으며, 식사조차도 출판사 직원을 위한 구내식당에서만 가능했다고 한다.

    밀라노 관광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고, 번역 시간에 쫓긴 것도 모자라 감시당하는 스트레스까지 감내해야 했다. <9명의 번역가>는 이런 상황을 보다 극단적으로 묘사해 벙커에 갇힌 채 번역에 몰두해야 하는 9명의 번역가가 겪게 되는 뜻밖의 사건을 그려나간다.

    <9명의 번역가>는 실제로 벌어진 기이한 상황 자체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장르적 흥미를 연출하는 작품이면서도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겠다는 야심까지 거머쥔 작품이다. 벙커에 갇혀 번역의 의무를 이행해나가는 9명의 번역가가 원작 소설의 유출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점차 폭력적인 감시와 억압에 시달리는 과정에서는 이중적인 물음표가 발생한다.

    과연 이 중에 누가 범인인가라는 ‘후더닛’ 구조의 흥미를 자아내는 물음표가 발생하는 동시에 세상과 괴리된 지하 벙커라는 밀실 구조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상황이 어떤 양상으로 발전하거나 진압될 것인가라는 상황 자체를 향한 물음표도 떠오른다. 장르적 물음과 서사적 물음이 연동된 호기심은 분명 <9명의 번역가>라는 미스터리 스릴러에 대한 흥미를 이끄는 두 바퀴일 것이다. 하지만 <9명의 번역가>의 각본가이자 감독 레지스 로인사드는 단순히 장르적 목적만으로 이 영화를 구상한 것 같지 않다.

    레지스 로인사드 감독은 <9명의 번역가>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번역가를 만나 자문을 구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처럼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번역가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가운데 토머스 핀천의 전속 번역가로 유명한 니콜라스 리처드의 자문은 결정적이었다.

    니콜라스 리처드는 대중적으로 얼굴 한번 제대로 드러낸 바 없는 은둔 작가로 유명한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토머스 핀천의 소설을 다수 번역한 바 있는 번역가였다. 이는 <9명의 번역가>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등장하는 <디덜러스>의 작가 오스카 브라흐가 대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라 설정한 것과 흥미로운 연관성을 추측하게 만든다.

    레지스 로인사드 감독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인기 작가와 번역가의 익명성이 유사하면서도 대조적인 흥미를 자아낸다고 느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인기 작가의 익명성은 신비주의로 간주돼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기여하지만 필연적으로 대중적 관심을 받기 어려운 번역가의 익명성은 당연하면서도 씁쓸한 일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번역가들은 그들이 해내는 일에 비해 처우가 너무 좋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9명의 번역가>에 중요한 자문을 한 니콜라스 리처드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번역가는 일종의 변압기와 같다. 작가의 목소리를 단순히 다른 언어로 똑같이 재현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인기 작가의 작품을 전 세계에 번역하는 번역가들의 역량과 노력에 따라 원작자의 명성과 수입도 좌우되기 마련이다. 결국 그 명성과 수익에 일조하는 번역가의 위치는 벙커 아래 자리한 9명의 번역가의 처지를 통해 비유적인 상태로 묘사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9명의 번역가>는 번역가라는 직업의 처지에 관한 비유이자 그림자 노동에 관한 우화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9명의 번역가>는 벙커에 갇혀서 베스트셀러 번역을 해낸 번역가들의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실재적인 긴장감을 주입하는 장르물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메시지를 담아낸 목소리이기도 하다. <9명의 번역가>는 제임스 조이스와 셰익스피어 같은 대문호의 이름을 언급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그중에서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작품은 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복선이자 단서로서 주요한 기능을 해내기도 한다.

    동시에 프랑수아 오종의 <8명의 여인들>이 가진 다단한 캐릭터 구조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스티븐 소더버그의 <오션스 일레븐>과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 같은 트릭 구조를 떠올리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그만큼 <9명의 번역가>는 문학적인 모티브를 직간접으로 활용하고 녹여내는 흥미를 자아내면서도 장르 영화의 작가적 기질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적 문법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구체화한 성취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굶어 죽기 싫어서 자본에 굴복한 거지.” 그리스어 번역가는 <디덜러스>를 칭송하고 찬양하는 번역가 무리 안에서도 냉소적 관점을 드러낸다. 그의 냉소적 언어는 번역가들 스스로가 그 자리에서 감내하는 불합리한 현실을 되짚게 만든다. 혹은 관객이 그들의 안락한 벙커 생활 이면에 자리한 부조리를 깨닫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9명의 번역가>는 그림자 노동의 불합리를 짚는 동시에 창작적 성취가 세상에 판매되는 메커니즘의 부조리 또한 주목하게 만든다.

    어느 개인으로부터 비롯된 창작적 성취가 도매금으로 팔려나가는 세상의 이치를 돌아보게 만든다. 물론 재능은 값비싸게 팔려야 한다. 다만 그것이 다른 누군가의 재능을 값싸게 파는 방식이 돼선 곤란하다. <9명의 번역가>는 우리가 믿는 거대한 재능을 위시하는 이름 아래 짓눌린 어떤 이름을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대단한 재능을 추앙하는 산업이 실상 추앙하는 자본의 가치 아래 압사한 여느 재능을 착취한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다소 빤한 장르물처럼 보이지만 그 이상의 미덕이 있다.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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