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

먹보들의 채소 찬미

2023.02.08

먹보들의 채소 찬미

여름이 계절의 절정이라면 가을은 계절의 만개다. 3년 전 〈보그〉에 해산물 예찬론을 보내온 필자 5인이 이번에는 채소의 생명력을 찬양하며 가을 잔치를 벌인다.

Giuseppe Arcimboldo, ‘Summer’, 1573, Oil on Canvas, 76×63cm.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작품으로 남겼다. 초현실적인 면이 도드라지지만 한편으로 그 시절 이탈리아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를 추측해볼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먹보들은 탐스러운 가지와 호박에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토마토가 결정하는 세계
<물욕 없는 세계>의 스가쓰케 마사노부는 “갖고 싶은 것이 없어지면 세계가 변한다”고 썼다. 이 표현을 빌리면, 먹고 싶은 것이 없어지면 애초에 살림이 존재할 수 없다. 살림의 축은 주방이자 요리이고, 어떤 식재료를 사는지가 살림의 세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살림의 세계는 토마토가 결정한다. 지난 12개월간 25kg 정도의 토마토를 먹었다. 그중 20kg 정도는 쓱배송과 새벽배송으로, 나머지는 스마트스토어 같은 직거래 플랫폼을 통해 샀다. 여기에 임윤찬 콘서트 티켓 예매만큼이나 어려운 마켓레이 지헤븐의 주문에 성공한 누나가 보내준 토마토까지 더하면 우리가 먹은 토마토는 30kg을 훌쩍 넘길 듯하다. 한 달에 2kg 이상의 토마토를 먹었고 3만원 정도의 돈을 꾸준히 토마토를 사는 데 썼다. 그러니까 토마토를 계속 사는 동안 내 살림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토마토는 논란의 채소다. 채소로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이 문제는 129년 전 법정까지 갔다. 1893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다룬 관세 사건으로 닉스 대 헤든 케이스로 불린다. 토마토를 수입해서 팔려던 과일 수입업자 닉스가 채소에 부과하는 관세 10%를 토마토에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관세청 공무원 헤든을 상대로 소송을 건 것이다. 식물의 꽃이 씨앗을 품은 열매로 자라면 과일이라고 설명한 사전을 들이밀었지만 정작 판사는 토마토가 디저트가 아닌 메인 요리에 나오는 식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채소라고 판결했다. 이후 지금까지 토마토는 채소로 불린다. 하지만 토마토는 여전히 과일의 자리를 노리고 있고 증거는 넘친다. 파리바게뜨 케이크 위에 올라가 있는 방울토마토라든가 보통의 찰토마토 당도 측정값이 5브릭스인데 10브릭스를 넘기는 젤리 토마토, 애플 토마토, 허니 토마토 같은 것들(달달이 토마토는 애교 수준이었다). 얼마 전 방송한 TV 프로그램 <생로병사의 비밀> ‘달콤한 유혹, 과일의 배신’ 편에서는 과일을 잔뜩 모아놓고 찍은 영상에 조용히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토마토가 목격되기도 했다. 그것은 토마토의 배신이었다.

내가 토마토를 먹는 관점도 어디까지나 채소다. 후식이나 접대용으로 토마토를 내는 경우는 없다. 설사 나폴레옹과자점에서 토마토를 토핑한 생크림케이크를 판다고 해도 디저트로 인정할 수 없다는 쪽이다. 대신 토마토를 맛있게 먹기 위해 모차렐라와 부라타 치즈를 매번 장바구니에 담고 해마다 5월이면 바질 모종을 9주씩 사서 가을까지 키운다. 일주일에 세 번은 토마토소스 베이스의 파스타를 만들고 토마토에 더 잘 어울리는 오일을 찾아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의 세계도 기웃거린다. 그럼에도 냉장고에 토마토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우리 집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토마토 된장국 때문이다. 처음 끓인 것은 여러 해 전, 여름이 막 가시고 밤바람이 한 번씩 차다 싶을 무렵의 초가을이었다. 여러 날 길게 이어진 마감으로 한밤이 돼서야 퇴근한 아내는 저녁을 거른 채였다. 밥 생각은 없다고 해서 급하게 냉장고에 있던 토마토를 넣고 가볍게 마시듯 먹을 만한 된장국을 끓였다. 배경음 없이 식탁 앞에 앉은 아내가 천천히 그리고 끝까지 단출한 국을 다 뜰 때까지 서로 말이 없었다. 토마토된장국이 내가 전할 수 있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토마토는 내게 살림의 세계가 됐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재래식 된장이 아닌 시판용 된장이나 미소된장을 싱겁겠다 싶을 정도로 물에 풀고 한입 크기로 뭉텅뭉텅 썬 토마토와 얇게 채 썬 양파를 넣은 다음 끓이면 끝이다. 멸치나 다시마 육수를 낼 필요도 없고 마늘은 넣어도 되지만 넣지 않아도 괜찮다. 간은 소금과 간장으로 한다. 방울토마토를 넣었다면 한소끔 끓인 다음 토마토의 얇은 껍질이 벗겨질 무렵 불에서 내리고, 찰토마토의 경우는 반대로 뭉근하게 익을 때까지 끓인다. 황톳빛 국물에 붉은 토마토와 하얀 양파가 동동 떠 있는 모습은 꽤 단정해서 먹어본 적 없는 사찰의 공양을 떠올린다. 달큼하고 시큼해서 입에 거칠게 남지 않는 맛. 토마토는 이제 사계절 구입할 수 있지만 5월부터 9월 사이에 가장 맛이 좋다. 그러니까 앞으로 제철인 토마토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이 한 달 정도 남은 것이다. 그래서 토마토를 좀 더 부지런히 먹을 생각으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하나 만들어 내가 먹은 토마토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당신도 토마토를 먹기 전 사진을 찍어 #traceoftomato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업로드해주면 반갑겠다. / 이은석 ‘학과 꽃’ 에디터

가지와 성장 체험
가지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흔히 쓰인다. 토마토, 감자, 양파 못지않게 전 지구적으로 매력적인 식재료다. 얼마 전 파스타 HMR 브랜드를 시작한 요리사 김호윤도 두 가지 론칭 메뉴 중 하나에 가지를 내세웠다. 가지 라구 라자냐다. “이탤리언 셰프에게도 가지는 빼놓지 않고 쓰는 대표 재료죠. 다른 채소로 대체할 수 없는 가지만의 매력이 있어요. 예를 들어 완성된 라자냐 요리 안에서 가지는 껍질이 가진 적당히 씹히는 탄력과 허물어지는 속살의 부드러움이라는 두 가지 질감을 내요. 튀지 않고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단맛에, 토마토나 치즈 등 다른 재료와 상승작용을 잘 내는 짙은 향긋함도 갖고 있죠.”

볕이 많고 물도 많은 7~8월 여름 가지는 부피의 95% 이상이 수분이다. 성긴 조직 안에 수증기가 뽀얗게 맺힌 형태다. 9월 접어들면서 나는 가을 가지는 좀 다르다. 가지 그 자체의 맛과 향이 한결 탄탄하고 진해진다. 아린 맛이 거의 없고, 맛도 더 달콤하다. 수분기가 덜하고 천천히 영글었기에 손에 쥔 느낌부터가 묵직하고 오롯하다. 계절 불문 가지 특유의 질감은 발군이다. 맛의 비결이다. 가지를 쪄놓고 보면 알게 되는데, 집게나 젓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조직이 붕괴되며 가지에 붙잡혀 있던 수분이 허망할 만큼 순식간에 증발해버린다. 대신 그 빈자리엔 볶음이나 튀김 요리일 땐 기름을, 소스나 국물 위주의 요리일 땐 양념 맛을 가득 채워 넣을 수 있다. 텅 빈 가지는 스펀지처럼 고소한 기름기나 양념을 쪽쪽 빨아들인다. 엄청나게 맛있어지는 것이다. 엄마 밥상의 가지나물이, 회사 앞 백반집의 가지볶음이, 와인 바의 토마토소스 곁들인 가지구이가, 연남동 중식당의 가지튀김이 몹시도 맛있는 것처럼.

세계 곳곳에서 재배되는 가지 품종 얘기를 하자면 지면이 부족하다. 하얀 것, 노란 것, 주황색이 선명한 것 등 색깔도 여럿이고 모양도 이름값 해서 달걀 모양(아시다시피 가지의 영어 이름이 Eggplant)인 것부터 한국이나 일본에서 흔히 재배하는 가지처럼 호리호리 쭉 뻗은 것까지 체형도 제각각이다. 이를테면 서울 근교에서 다품종 텃밭 농사를 짓는 이윤임 씨에게 받은 이탤리언 가지 중 한 종류는 닭 다리 모양으로 짧고 통통한데 색은 짙은 보라색에 질감이 남달랐다. 속살까지 무척 단단하고 맛도 진해 뜨거운 요리에서도 고기처럼 활약했지만 차게 절여 피클을 담기에도 최적이었다. 그만큼 가지도 품종 나름, 쓰기 나름이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가지를 안 먹는 어린이였다. 많은 사람이 가지를 혐오하는 시절을 거쳤다. 덜 익은 조갯살처럼 물컹거리는 질감도, 의뭉스러운 달콤함도, 나무껍질 우린 듯 기묘한 향도 뭐가 맛있다는 건지 도통 불가해의 대상이었다. 어느 순간 새삼스럽게 가지의 매력을 받아들인 경험은 가지를 맛있게 느끼는 뇌의 어떤 부분에 전구가 탁 켜지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이전엔 없던 감각기관이 몸에 새로 돋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전과 달리 가지의 매력이 훅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나는 가지의 맛을 알게 되는 것이 어떤 종류의 성장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여름인가에 그렇게 가지 맛을 알게 된 우리는 그만 다 자라버렸다. /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양배추의 집밥 만족감
남이 예쁘게 요리해주는 채소를 먹을 땐 손뼉을 치고 좋아하면서, 정작 우리 집 냉장고에는 채소가 풍성한 적이 거의 없었다. 여차하면 집을 비우고 멀리 출장을 가거나, 내키지 않을 땐 일주일 내내 인덕션에 불 한 번 붙이지 않는 탓에 채소를 구비하는 일은 다 시든 꽃을 한 아름 사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여름 가지를 정말 좋아하지만 놀랍게도 짧은 수명 때문에 집에 사둔 적이 거의 없고, 바질과 같은 여리디여린 허브는 당일 쓸 일이 있더라도 단명 트라우마에 그저 피하게 된다. 그렇게 채소와 담을 자주 쌓는 내가 집밥용으로 사두기 시작한 채소가 바로 양배추다. 한 통을 사두면 3주는 족히 견딜 수 있는데, 조금 색이 변했다 싶어도 잎을 한 꺼풀 벗겨내거나 조각하듯 칼로 살살 도려내면 다시 신선한 양배추를 즐길 수 있다. 물론 시골에서 막 뽑은 양배추를 물에 훌훌 씻어 쌈장도 없이 한입 먹어본 뒤론 내가 먹는 양배추 신선도의 처참함을 알게 됐지만, 요리에 쓰는 용도로는 큰 무리가 없다.

나의 양배추 요리법은 간단하다. 일단 마음 가는 방향대로 적당히 척척 썰어서 프라이팬에 와르르 쏟아붓고 약간 두꺼운 심지 부분이 투명해질 때까지 팬을 휘저으며 볶아버리는 것. 그라인더에 넣어둔 핑크 소금과 후추를 갈아서 흩뿌린 뒤, 라면을 두 번 정도 끓인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충분히 들여 볶는 것이 포인트다. 이 상태라면 술안주로도, 샐러드 대용으로도 훌륭하지만 여기에 나는 잡채용 돼지고기를 자주 더한다. 라면 하나 정도 끓였다 싶을 때 밑간한 돼지고기를 넣고 불을 바짝 올려 익힌다. 약간 더 맛을 가미하고 싶을 때 쓰유를 넣거나 굴소스를 넣기도 한다. 탄수화물 없이 이 식사를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양배추를 볶으면서 짜파게티를 하나 동시에 끓인다. 수분감 없이 바짝 끓인 짜파게티 위에 양배추와 돼지고기볶음을 와르르 쏟아내면 어쩐지 균형 잡힌 데다 정성까지 더한 식사를 하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약간 뻑뻑한 느낌이 들면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이나 트러플 오일을 슬쩍 두르면 그만이다.

조리에 시간을 조금 더 투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찜기를 꺼낸다. 오로지 게찜과 양배추찜을 위해 구비한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냄비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크기로 잎을 대충 뜯어 찜기 위에 올리고 양배추가 적당히 말캉해질 때까지 뚜껑을 덮고 기다린다. 그 사이 햇반이나 얼려둔 솥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냉장고 속 남은 밑반찬을 끌어모아 쟁반 위에 올려둔다. 무엇보다 중요한 쌈장도 한 숟가락 크게 푼다. 10분간 찐 뜨거운 양배추를 숟가락과 젓가락을 집게처럼 만들어 건져낸 뒤 접시 위에서 한 김 식힌다. 손바닥 위에 올려도 좋을 정도로 온도가 내려가면 그때부터 나만의 양배추 쌈밥 파티가 시작된다. 폭신하게 씹히는 쌀밥을 보드라운 양배추가 여러 겹 감싼 이 동그란 쌈밥을 한입에 넣어 깨물면, 양배추의 촉촉한 단맛과 밑반찬의 익숙한 감칠맛, 쌈장의 쿰쿰한 짠맛이 어우러지며 최고의 집밥 만족감을 선사한다. 양배추가 아무리 저칼로리 다이어트 식재료라고 해도, 다이어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시사철 나는 양배추지만, 이상하게 가을만 되면 이 양배추찜이 생각난다. 가을 행락 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메뉴가 쌈밥이기 때문일까? 채소마저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왕성한 가을 식욕 때문일까? 양배추에서 알배추로 이어지는 가을-겨울의 최애 채소 루틴 때문일까? 이제 슬슬 새벽배송 장바구니에 양배추를 넣어두어야겠다. 반 통 아니고 한 통. / 손기은 프리랜스 에디터

여주의 농담
퇴사 기념으로 떠난 제주 여행 첫날 밤, 노트북을 열고 이 순간을 위해 아껴놓은 드라마를 찾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된 여자의 여름 한 철 이야기를 그린 <나기의 휴식>. 드라마에도 제철이 있다면 이런 걸까, 뿌듯해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곧 푸들처럼 복슬복슬한 머리에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나기’의 한심한 하루하루가 펼쳐졌다. 지금 내 상태와 싱크로율 99%인 그녀의 일상에 나는 워터 파크 미끄럼틀 타듯 한달음에 빠져들었다. 채소 가꾸기와 절약이 취미인 나기는(취미부터 한심하다) 길쭉한 초록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덩굴이 옆집 베란다를 뒤덮은 것을 눈여겨본다. 그녀가 우연히 마주친 옆집 남자에게 왜 잘 익은 열매를 먹지 않느냐고 묻자 남자는 ‘이게 먹는 거였어?’라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중얼거린다. “웬 고질라 같은 게 자꾸 열리나 했더니…” 순간 미끄럼틀 끝에 다다른 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퉁기며 음 소거 비명을 내질렀다. “그치, 여름엔 역시 고질라… 아니, 여주지!”

첫 만남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 음식이 있다. 홍어, 고수, 낫토 같은 것들. 여주도 내게는 그런 음식이다. 장소는 일본 오키나와. 날짜도 정확히 기억한다. 성인이 된 내가 엄마를 모시고 떠난 첫 효도 관광이었으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 여행은 불효였다. 절약이 취미인 내가(역시 한심하다) 치열한 검색 끝에 최저가로 예약한 알뜰 팩 상품이 화근이었다. 여행사에서 예약한 비행기는 ‘피치 못할 때만 탄다’는 악명 높은 P항공이었고, 유일하게 기대한 호텔 수영장에는 지저분한 나뭇잎이 둥둥 떠다녔다. 가이드가 ‘물소 타기 체험’이라며 소똥 냄새 풍기는 달구지를 끌고 나타났을 땐 점심에 먹은 햄버거를 몽땅 게워낼 뻔했다. 그렇다. 음식도 문제였다. 생애 첫 일본 여행인 만큼 교토의 가이세키 같은 정갈한 음식을 기대한 엄마는 햄버거, 스테이크, 타코로 이어지는 정크 푸드의 향연에 “어우 짜”를 연발하며 못마땅한 티를 팍팍 냈다. “엄마, 여기는 그런 일본 아니라니까. 오키나와는 말하자면 아시아의 하와이인데…” 하고 열 번 스무 번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그 막장 여행의 마지막 식사가 ‘고야참프루’였다. 일본어로 ‘고야’라 불리는 오키나와 대표 채소에 돼지고기, 두부, 달걀 등을 넣고 볶았다는 그 요리는 그냥 우리 집 냉장고의 자투리 채소를 털어 만든 달걀볶음처럼 보였다. 다만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오돌토돌한 반달 모양 채소가 잔뜩 들어 있다는 게 달랐다. 여느 때처럼 미지근한 표정으로 밥을 입에 밀어 넣은 엄마가 “어?”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한 숟갈, 또 한 숟갈, 점차 맹렬한 기세로 숟가락을 놀렸다. “야 야, 묘하다 이거.” 평소답지 않은 엄마의 텐션에 나도 얼른 한입 맛봤다. 간간하고 보들보들한 재료 사이로 이따금 씁쓸한 과육이 씹히는데 그게 꽤 별미였다. 그 ‘쓴짠쓴짠’의 리드미컬한 조화에 더위로 휘진 몸이 산뜻하게 깨어났다. 엄마는 평소 잘 마시지도 않는 맥주까지 주문하더니 “지나면 다 추억” 운운하며 갑자기 아름다운 마무리 멘트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제주 여행을 끝내고 서울에 오자마자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나흘쯤 지나자 후각이 상실되면서 모든 음식이 단물 빠진 껌처럼 무미해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잖아도 마음 복잡한 백수 신세에 날은 덥지, 입맛은 없지, 정말이지 사는 낙이 하나도 없었다. 냉장고 야채 칸을 열자 제주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받은 생여주 한 묶음이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미치광이 오이처럼 생긴 그 야릇한 채소가 집 나간 내 입맛을 돌아오게 해줄 유일한 음식처럼 느껴졌다. 마침 인스타그램에 고야참프루 사진을 올린 에디터 선배가 있어 조리법을 묻자 “핵심은 스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짭조름한 스팸으로 여주의 쓴맛을 살살 달래는 게 포인트라고 했다.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여주를 반으로 가르고 하얀 속을 숟가락으로 파냈다. 소금물에 담갔다 뺀 여주와 스팸을 잘라 팬에 볶은 뒤 굴소스를 살짝 넣고, 마지막으로 달걀물을 둘러 스크램블 하듯 볶아 접시에 올렸다. 하다 보니 그 모든 과정이 여주의 쓴맛을 누그러뜨리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그게 꼭 쓰디쓴 인생을 농담으로 대강 퉁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 한심한 여름도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푸릇푸릇한 여주 하나를 아삭 베어 물었다. 달력을 보니 때마침 입추였다. / 강보라 프리랜스 에디터, 소설가

인류를 구원할 상추
인간은 멍청하다. 심심함과 배고픔을 구별 못해서 시도 때도 없이 먹고, 찬물 한 잔이면 해결될 갈증을 풀기 위해 맥주를 퍼마시다 다음 날 후회하고, 상추를 먹기 위해 고깃집에 간다. 잘못 쓴 게 아니다. 생각해보자. 당신은 특별한 외식이라면 고기나 회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고깃집에서도 횟집에서도 그 특별한 메뉴 옆에 상추를 내준다. 왜겠나? 사람들이 상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족한 영양소 보충과 지방 분해 어쩌고 하는 기능적 설명은 잊어라. 좋아하지 않으면 왜 그 많은 사람이 거기서 상추를 먹고 있겠나. 고기와 회는 동물의 살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맛의 간극은 크다. 그런데 공히 상추를 곁들인다? 상추가 맛이 강하지 않아서 여기저기 잘 어울린다 생각할 수도 있다. 단지 넓적한 형태 때문에 밥, 고기, 마늘, 양념 따위를 한데 싸는 도구로 선택되었다 생각할 수도 있다. 진짜 그게 다일까? 나는 인간이 사실 상추쌈을 먹고 싶은데 그것만으로는 심심하다 싶으니까 토핑으로 고기나 회를 올린다는 가설을 제시하겠다. ‘상추만으로는 심심하다 싶은’ 그 감각이야말로 사회적 학습에서 비롯된 착각이 아닐까. 상추는 흔하고 싸니까 비싼 음식에 곁들이는 엑스트라일 뿐이라는 선입견이 우리의 진정한 욕구 실현을 방해하고 돈과 소화력을 낭비하게 하는 건 아닐까.

나는 플렉시테리언이다. 이해하기 쉽게 채식 우선주의라고 해두자. 요리도 잘 못한다. 또한 체질상 육류가 안 맞는다. 햄버거나 삼겹살을 잘못 먹으면 피로와 변비에 시달린다. 신념과 효율과 건강을 위해, 내 나름으로 먹을 만한 것들을 찾다 보니 채소 쌈의 매력에 빠졌다. 몇 번 입원이 필요한 수술과 회복 과정을 거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평소 먹던 음식이 거북해서 채소 쌈을 찾기도 했다. 생채소의 아삭한 식감과 알싸한 맛, 입안 가득 퍼지는 싱싱한 생명력에 적응하니 이제는 조리된 식품에 별 감동을 못 느낀다. 물론 고수들의 요리를 먹으면 ‘오 맛있네’ 하지만 생채소처럼 오감을 깨우는 짜릿함은 없다. 그저 그런 요리하고는 당연히 비교가 불가하다. 상추 씻을 시간도 없이 바쁘거나 상황이 안 돼 형편없는 외식을 몇 주 한 후에 채소 쌈으로 돌아오면 눈이 번쩍 뜨이고 뇌가 깨어나고 오장육부가 편해지는 느낌이 든다. 한국인이라면 익히 아는, 느끼한 서양 요리를 먹다가 김치 한입 먹었을 때의 환기감을 나는 조리식과 생채소 사이에서 느낀다. 내가 요리를 못하는 것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라 조리식이 불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은 그런 생각마저 든다. 이쯤 되면 생채소 각각의 맛에도 민감해진다. 겨울 배추의 달콤함과 깻잎의 쌉싸래함이 확연히 다르니 모둠 채소에도 호텔 뷔페급의 다채로운 자극을 받는다. 그중에서 상추를 가장 좋아한다고는 말 못하겠으나 가장 접근성이 뛰어나서 달고 사는 건 맞다. 다른 맛이 강한 식물과 달리 상추는 많이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고 계절도 타지 않는다.

물론 채소 쌈에는 쌈장이 필수다. 흰쌀밥에 상추, 쌈장만 있으면 나는 열다섯 끼쯤은 행복하게 먹을 수 있다. 쌈장이 없으면 조금 망설여진다. 호박잎이나 양배추처럼 질긴 채소를 익혀서 먹을 때도 쌈장이 없으면 난처하다. 앞서 고깃집의 메인이 상추일지 모른다고 주장한 방식을 적용하면 나는 쌈장을 먹기 위해 상추를 먹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흰쌀밥, 상추, 쌈장 다음으로 좋아하는 식사가 모둠 채소를 넣은 소면과 비빔장 조합이고, 이 두 메뉴의 공통점이 채소니까 나는 채소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겠다. 소면에도 상추를 듬뿍 넣는다. 단백질 섭취를 위해 렌틸콩 샐러드도 자주 해 먹는데 거기도 상추가 들어가면 맛있다. 밖에서 뭘 잘못 먹어 속이 텁텁할 땐 다짜고짜 상추만 뜯어 먹기도 한다. 그 푸릇푸릇하고 촉촉하고 순하고 생생한 맛이 약이요, 기쁨이다. 건조한 봄날의 보슬비 같은 음식이다. 친절하고 신선하다. 그것은 언제고 폐허가 된 위장을 씻어 내린다.

상추는 기르기도 쉽다. 흙 한 포, 씨앗 한 봉, 작은 실내 화단, 충분한 햇살과 물만 있으면 1년 내내 상추를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상추가 지구 온난화와 식량난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음식이라고 믿는다. 지구가 다 망한 후에 벌 받듯 상추를 뜯어 먹지 말고,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은 아닌지 미리 확인해보자. 갓 젖을 뗀 아이처럼, 수술 후 회복식을 하는 환자처럼, 원점으로 돌아가서 식재료를 끝까지 음미하며 자신의 입맛을 살펴보자. 당신이 고깃집이나 횟집에 간 이유도 상추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만일 당신도 나와 같다면 즐겁게 상추쌈을 먹으며 당신의 시간과 동물 몇 마리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지구 온난화와 식량난에 맞서는 상추 연대를 결성할 날을 기다리겠다. / 이숙명 칼럼니스트 (VK)

Giuseppe Arcimboldo, ‘The Vegetable Gardener’, 1587~1590, Oil on Canvas, 36×24cm. 유머를 선사하는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작품은 사실 자연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연구로 이뤄진 결과물이다. ‘The Vegetable Gardener’는 인물화지만, 뒤집어서 보면 영락없는 채소 정물화다. 채소에 풍성한 맛이 차오르는 가을이 왔다.

에디터
조소현
사진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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