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그리고 최후의 옷, 헤어
“머리카락은 인간 최초의 옷이자 최후의 옷이다.” ─ 발터 벤야민
“저는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때, 머릿결과 구두를 보거든요.” 수지 주연의 쿠팡플레이 시리즈 <안나>에서 주인공이 가짜 부모에게 상류층에 걸맞은 스타일링을 요구하며 건네는 대사는 우리 시대에 ‘모발’이 상징하는 지표를 보여준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의 일상에서 모발만큼 꾸준한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유지되는 것도 없으니까. 부와 여유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처럼 이토록 머리카락은 누군가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더없이 좋은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며, 그 사회가 가진 문화와 끈끈하게 결합하는 면도 있다. 값비싼 트리트먼트로도 결코 돌이켜지지 않는, 숱한 염색과 펌 시술로 푸석푸석해진 나의 머리끝을 멋쩍게 만지작거리며 우리 여자들에게 모발이 주는 의미를 이야기해본다. 헤어 시술이 존재하지 않던 과거엔 탐스러운 머릿결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쉬웠는가를 상상하며.
영국 보그닷컴의 필자 로렌 발렌티(Lauren Valenti)는 아프리카 차드 공화국 북부의 한 유목민 부족 여성들을 연구하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다른 유목민과 달리, 특정 부족 여성들의 배꼽 아래까지 닿는 기다란 모발이 유독 굵고 윤기가 흐르기 때문이었다. 핵심 비결은 무엇일까? 해답은 바로 ‘셰베(Chébé)’, 그들이 1000년간 지켜온 유서 깊은 헤어 케어 풍습이다.
“셰베는 신이 산에 남기고 간 선물이에요. 우리의 모발이 길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주죠.” 이곳의 ‘바사라 아랍(Bassara Arab)’ 부족 출신 네네 이주(Néné Izou)는 말한다. 셰베의 정체는 바로 이 지역의 험준한 산맥에 사는 적갈색 꽃망울을 가진 야생식물. 2월부터 4월 사이에 이 식물의 씨앗을 수확해 자연 건조시킨 다음 곱게 빻는다. 그 후의 과정은 하나의 요리 레시피와 같다. 세 개의 그릇을 준비하고, 각각 물과 셰베를 빻은 파우더, 시어버터와 참기름을 담는다. 매콤하고 독특한 향을 풍기는 각각의 혼합물을 번갈아가며 서로의 모발에 뿌리부터 머리끝까지 발라준 다음 등 뒤로 늘어지도록 길게 땋는다. “전통적인 셰베 파우더 헤어 케어는 극단적일 만큼 긴 시간이 소요되며, 노동 집약적 과정입니다. 제대로 하고 싶으면 적어도 하루를 통째로 비워야 할 만큼이요.” 부족 출신 여성 살와 페테센(Salwa Petersen)이 덧붙인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 헤어 케어 풍습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아름답고 긴 머리카락을 곧 여성성과 활력의 궁극적인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수확부터 모발에 더하기까지, 미용의 목적을 이루면서 자연과 상호작용하고 내면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서로의 모발에 발라주는 의식을 치르며 대화를 나누고, 전통음악을 듣는 등 세대 간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점 또한 이 풍습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요인이다.
주목할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사회마다 이런 헤어 케어 문화는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곧 모발이 우리 여자들에게 가지는 의미가 어느 정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는 뜻과도 같다. 전통적인 아유르베다 관습을 지닌 인도 여성들은 ‘헤어 오일링’이라는 의식을 오랜 시간 유지해왔다. 허브가 함유된 천연 오일을 모발에 마사지하는데, 어머니들은 이 전통을 딸에게 물려준다. 오일링은 머리카락의 수분과 윤기를 회복하는 동시에 편안한 명상의 순간을 선사한다. 화려하게 부푼 헤어스타일이 떠오르는 브라질에서는 놀랍게도 갈라진 모발 끝을 촛불로 태우는 관리법이 있다. 불꽃의 온기를 통해 모낭이 열리고, 트리트먼트의 영양분이 효과적으로 공급되는 데서 비롯된다. 베트남의 붉은 야오족 여성들은 건강하고 긴 머리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 비결은 지역의 쌀을 씻은 물로 머리를 감아온 덕분이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찬미하던 유럽도 재미있는 습성이 다양하다. 도덕적이고 미적인 면에서 금발이 순수성과 천진함을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여겨지던 르네상스 시기, 당시 유럽의 온 멋쟁이들이 염색을 통해 금발을 관리했다. 1562년 출간된 <질 오르나멘티 델레 돈네(Gli Ornamenti Delle Donne)>라는 책에는 포도나무를 태워 그 재와 보릿짚, 참빗살나무의 겉껍질을 벗기고 레몬과 함께 찧은 감초 가지를 넣고 끓인 뜨거운 물에 모발을 담그면 염색된다는 당시의 염색 과정을 실었다. 머리를 헹구고 말려 다시 그 물에 머리카락을 담그는 과정을 마친 뒤 층층이 부채꽃을 따 뜨거운 물에 넣고 2시간 담근 물이 모발에 파고들게 빗질을 한다. 마지막으로 백포도주의 침전물로 만든 가루와 고래기름을 바르고, 햇볕에서 빗질하면 마침내 신화 속 여신처럼 완벽한 금빛의, 윤기 흐르는 모발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의 전통 모발 의식도 궁금할 것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모발을 부모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몸의 일부분으로 여긴 만큼 남다른 헤어 케어법이 존재하리라. ‘모발 관리 풍속’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조선 시대의 명절 단오. “한반도에 농경이 정착된 시점부터 생겨난 풍습이죠. 단오에 창포를 우린 물에 머리를 감고, 창포 뿌리를 잘라 수복(壽福) 글자를 새겨 비녀를 만들기도 했고요.” 서경대학교 미용예술학과 진용미 교수는 말한다. 연못이나 도랑가에서 자라는 창포는 현재는 약관심종으로 분류되지만, 조선 시대에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물이었다. 창포 뿌리에는 해충이나 곤충을 쫓는 냄새를 지닌 사포닌계 성분이 있는데, 그것이 귀신을 쫓는다는 속설로 이어져 단옷날 창포물로 머리를 감아 액운을 쫓는 의식으로 이어진 것. 잎사귀는 떼어내고 줄기만 가마솥에 넣어, 때로는 쑥을 넣고 끓인 창포물에는 타닌 성분이 함유돼 머릿결을 부드럽게 만드는 효과까지 있었다. 참빗으로 머리를 빗고 동백이나 산수유, 살구씨 등에서 추출한 기름을 발라가며 엉킴이나 잔머리를 정돈하는 모습은 사극에서 한 번쯤 목격한 적 있을 것이다. 푸른 깻잎과 호두의 푸른 껍질을 함께 달여 그 물에 머리를 감아 검게 물들이기도 했다.
이토록 다양한 전 세계의 모발 관리 풍습은 현대 출시되는 수많은 헤어 케어 제품의 토대가 된다. 앞서 언급한 ‘셰베’ 의식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차드 부족의 여성, 살와 페테센은 도시화로 인해 사라지는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최근 거대 뷰티 기업 로레알 파리(L’Oréal Paris)의 제품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셰베 트리트먼트’를 토대로 한 헤어 크림을 출시해 사람들이 이 전통 풍습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모든 재료는 공정 무역 관행을 통해 조달하며, 운송 과정에서도 그린 에너지를 사용해 자연을 보존하고자 애쓴다. 화학 성분으로 점철된 잦은 헤어 시술과 유해한 외부 환경으로 영혼 없이 매일 샴푸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머리카락이 주는 의미를 되짚어볼 시간. 과거 헤어 케어에 사용한 자연의 산물보다 모발을 건강하게 만든 건 그 모든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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