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규’란 세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친절한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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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란 세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친절한 도슨트

2022-09-30T14:50:41+00:00 2022.09.24|

미술가들의 작업 세계를 하나의 영토라고 가정해봅시다. 그중 양혜규 작가의 영토는 우주부터 세포까지, 가시적, 비가시적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압도적으로 방대한 영역입니다. 여기에 발을 들이려는 분들께는 망원경과 현미경, 돋보기와 확대경이 필수라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군요. 어쨌든 이 모든 걸 배낭에 넣고 작가가 구축해온 영토를 천천히 걷다 보면, 현대와 고대, 산업과 민속, 동양과 서양, 어제와 오늘 등 다양한 지점에서 참조할 만한 부분을 찾아내는 작가의 예술적 흔적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는 10 2일까지 국제갤러리 서울점과 부산점에서 동시에 선보이는 프레젠테이션의 작업들은 현재 양혜규라는 작가를 가리키고 서술하는 의미 있는 이정표입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양혜규 프레젠테이션 ‘의사擬似-합법’ 설치 현장.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부산점 양혜규 프레젠테이션 ‘의사擬似-합법’ 설치 현장.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부산점 양혜규 프레젠테이션 ‘의사擬似-합법’ 설치 현장.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웬만한 전시 못지않은 부산점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양혜규의평창길 열두 불기운‘, ‘래커 회화연작, ‘소리 나는 조각연작, 그리고 잘 알려진솔 르윗 뒤집기연작 등을 두루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중심에 있는솔 르윗 뒤집기연작은 작가가 수년 전부터 진행해온 작업이죠. 미니멀리즘의 대표 작가 솔 르윗의 입방체 원작을 블라인드로 해석하되, 크기를 확장 혹은 축소하고 거꾸로 뒤집어 천장에서부터 내려 건 겁니다. 2015년 리움미술관 개인전을 필두로 다양한 곳에서 선보여온솔 르윗 뒤집기는 이번에 특히 청색으로 칠한 벽체를 배경으로 설치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백색이라는 작업의 주효한 속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이 문제의 청색은 서구 미술사에서 입지전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브 클랭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작가는 일명이브 클랭 블루를 시중 페인트의 색 중 하나로 구현함으로써, 서구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업과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확고한 정당성을 확보한 서구 규범의 틀을 답습하는 대신 의도적인 가짜와 비합법적인 방식을 선택합니다. 프레젠테이션의 제목 ‘의사擬似합법’에도 이런 작가의 의지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국제갤러리 서울점 한옥 뷰잉룸 양혜규 프레젠테이션 ‘황홀망恍惚網’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서울점 한옥 뷰잉룸 양혜규 프레젠테이션 ‘황홀망恍惚網’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서울점의 한옥 뷰잉룸에는 또 하나의 주요 연작황홀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오랜 고찰에 바탕을 둔, 지난 2020년부터 선보여온 문제작입니다. 최근 유럽의 이교도적 전통과 아시아의 샤머니즘에 이르는 신비주의에 대한 예술적 연구를 심화해온 작가는 특히 무속 의례를 위해 제작 및 사용하는 종이 무구에서 큰 영감을 받고, 숱한 연구와 리서치를 통해 종이 콜라주 연작을 고안해냈습니다. ‘황홀망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방식인 설위설경은 종이를 접어 오린 후 다시 펼쳐 만드는 여러 종이 무구 혹은 이런 무구를 만드는 전통을 지칭한다는군요. 이전에도 작가는 블라인드를 비롯해 짚풀, 방울 등의 소재로 무한한 추상의 세계를 직조해왔지만, 종이는 더욱 특별합니다. 단순히 재현의 재료가 아니라 삶을 서사하고 탈물질적 영역에 도달하기 위한 인간의 욕망을 품은 일종의 영적, 정신적 물질인 거죠. 양혜규와 무속의 상관관계가 좀 낯선 분들을 위해, 미술 평론가 커스티 벨과의 대담 중 작가가 한 말을 인용해봅니다. 

이교도의 관습이나 신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paganism’을 처음 기쁘게 접하던 순간을 여태 기억할 정도입니다. … 제게 유럽 문화의 범주 내에서 이교도적이란 것은 다른 부분에 비해 비교적 공평하다 느껴졌습니다. … 제가 어찌어찌 이교도적 문화를 우회하여 무속으로 회귀한 것 같다는 것이 현재로서의 소회입니다. … 어떤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추적의 여정으로 환원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종류의 작업을 하고 현대미술에서 이러저러한 위치를 점유하는 저라는 작가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측면도 내면에 있다는 걸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긴밀히 연결돼 있죠.”(이교도 문화와 무속을 넘어: ‘황홀망 대한 양혜규와 커스티 벨의 대담 ) 

국제갤러리 서울점 한옥 뷰잉룸 양혜규 프레젠테이션 ‘황홀망恍惚網’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서울점 한옥 뷰잉룸 양혜규 프레젠테이션 ‘황홀망恍惚網’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유럽이라는 오래된 대륙에서 외국인으로서 자기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고투하던 미술가는 과거로, 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 이교도적 문화를 거쳐 무속, 원시종교의 지점까지 가닿습니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곳곳에서 살아남아 생명력 혹은 활력을 발휘하는 무명의 대상들이 작가를 매료시키고, 무언가를 만들고 발언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거죠. 이렇게 양혜규의 예술 세계는 다시금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다음 도약의 행보는 어디로 향할까요? 분명한 건솔 르윗 뒤집기부터황홀망까지, 진리가 되어버린 서구 미술사에서 여전히 배척당하는 무속에 이르기까지, 양혜규는 편견 없이 모두에게 영감을 받는다는 사실이겠죠. 이쯤 되면 실제 작가가 자주 언급하는 솔 르윗의 말이 떠오릅니다. 

개념주의자는 합리주의자라기보다는 신비주의자다. 논리로는 닿을 수 없는 결론들로 도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