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명 ‘기후 불안증’, 미래가 사라지고 있다?
SOLASTALGIA
코드명 기후 불안증. 사라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상실.
“우리는 매일 잃어가고 있다. 이건 농담도, 거짓말도, 과장하는 것도 아니며 정말 심각한 상황이다.” 나사(NASA)의 기후 과학자 피터 칼머스(Peter Kalmus)는 동료 과학자들과 함께 JP모건 체이스 은행 앞에서 외치다 감정이 복받쳐 울먹였다. 지난 4월 그들은 해당 은행이 수많은 화석연료 프로젝트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입구에 자신들의 손을 쇠사슬로 채우는 집회를 벌이다 결국 LA 경찰에 체포됐다. “20~30년 전부터 기후 변화의 피해를 경고해온 과학자들이 우울증을 많이 앓고 있습니다. 답답하니까요.” 김지석 그린피스 기후 에너지 전문위원은 말한다. 이름하여 ‘기후 우울증’ 또는 ‘기후 불안증’. 기후 위기로 인한 스트레스, 불안이 정서적 고통을 일으켜 신체적, 사회적 건강까지 위협하는 증세를 나타낸다. 그리고 주로 기후와 밀접한 직업군이나 자연재해의 피해를 온몸으로 맞닥뜨린 농민이나 사회 취약 계층에 나타나던 이 심리적 질환이 최근 MZ세대 사이에 발병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피부로 가깝게 와닿은 적이 있었을까? 지난해 <가디언>이 ‘기후 변화’에서 심각성이 격상된 ‘기후 위기’라는 용어를 제시한 뒤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놀랍게도 상황은 눈에 띄게, 또 빠르게 악화됐다. 국내만 해도 대형 산불을 몇 차례 치렀고, 얼마 뒤에 예측하지 못한 폭우가 수도권을 덮쳤다.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집중적으로 시청하다 보면 알고리즘은 다음, 또 그다음의 비관적인 기후 관련 뉴스를 추천한다. 스스로 ‘강철 멘탈’이라 자신하는 편이었는데, 다가올 위기는 감히 개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스케일이 아님을 절실히 깨달은 탓일까? ‘기후 종말’이라는 자극적인 키워드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실로 무력해지는 느낌이었다. “‘기후 불안’ 단계의 초기 증세군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윤석 원장이 내게 진단을 내리며 실제로 우울, 불안, 염려로 인해 내원한 환자들이 기후 관련 걱정을 호소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주요 원인은? 나의 경우처럼 최근의 자연재해와 더불어 노골적인 콘텐츠가 트리거가 될 수도 있지만 기후 우울증의 원인은 아주 포괄적이고 다양하다. 하지만 기후 우울증을 점검하는 명확한 기준과 지표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자면 학계의 연구와 사례에 비해 기후 상황이 무서운 속도로 나빠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난 6월 WHO는 기후 변화에 대응할 정신 건강 지원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는 성명을 선포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올해 보고서에서 기후 위기가 정신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초로 언급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의학 저널로 꼽히는 <란셋(The Lancet)> 역시 전 세계 16~25세 청년 1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50% 이상이 기후로 인한 슬픔, 불안, 분노, 무력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코로나 블루’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새롭게 등장했다는 점에서 같은 연장선에 있는 듯하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기후 우울증 쪽이 조금 더 위중해 보인다. 기후 변화를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우울감은 신체 질환으로 드러나거나 사회 활동을 통한 유대 관계를 맺길 거부하는 현상을 일으킨다. 게다가 환경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기성세대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세대 갈등의 시한폭탄이 될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김윤석 원장 역시 이 의견에 동조한다. “고속 성장을 경험해온 기성세대에 비해, 오늘날 젊은 세대는 인생이 달라질 거란 기대가 적습니다.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달라질 확률이 적다고 여기며 10년, 20년 뒤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합니다. 그래서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부 요인보다는 외부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데, 기후 변화는 단기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부정적인 감정과 직접 연결될 수밖에 없죠.” 젊은 여성들 사이에선 탄소 배출량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움직임도 적지 않다. 여기에 조금 더 절망적인 현상을 하나 더 보태자면 이런 불안감이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게까지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떠넘기지 말아주세요.” 지난 6월 헌법재판소 앞에선 62명의 어린아이들이 정부의 미흡한 온실가스 대책을 비판하며 앞서 언급한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씁쓸한 풍경이 펼쳐졌다. 생명권과 행복추구권,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벌인 소송엔 아직 엄마 배 속에 살고 있는 5개월 태아까지 이름을 올렸다. “미래가 없는데 배워서 뭐 해요?” 등교 거부 운동을 벌이며 환경 운동계의 아이콘이 된 10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을 두 눈으로 목격하자 비로소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어른들에게 책임과 대응을 촉구하는 이 아이들이 막다른 현실에 부딪힌다면 기후 우울증이 가진 잠재적 전파력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막대할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온갖 염세적인 감정이 들 것이라 예상한다. 비관적이지만, 또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기후 우울증은 곧 기후 위기 속도를 늦출 제어장치로 활용될 수 있다. 기후 변화로 발현된 우울감은 일반적인 치료법 말고도, 스스로 환경을 바꾸기 위한 작은 노력이 동반되어야만 마침내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과학자 레베카 헌틀리(Rebecca Huntley)는 기후 변화에 대한 감정도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변화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차분하게 공유할 줄 아는 ‘대화’에서 시작된다. 또래 집단 특유의 정서적 유대감과 설득력 있는 대화가 가능하기에 10대 소녀들이 강력한 기후 변화 메시지 전달자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자극적인 뉴스를 적당히 거르는 내면의 필터 역시 무력감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끔찍한 소식을 자주 접할수록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일종의 방어막이 생기기 마련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생태계가 무너지는 문제는 더 이상 과학적, 이성적인 것보다는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당장 내일의 나에게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 클리셰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개개인의 행동이 집단적 변화를 불러온다는 진리는 여전히 통한다. 육류 섭취 횟수를 지금보다 줄이고, 일회용품은 사용하지 않으며, 냉난방 가동 시간을 줄이는 등 뻔하지만 스위치 누르듯 쉽게 실천 가능한 일련의 작은 행동은 분명 스스로의 죄책감과 불안감을 일부 해소할 것이다. 온난화 시대에 대응하는 비전을 담은 책 <미래의 지구> 저자 에릭 홀트하우스는 밖으로 나가서 오늘의 지구를 만끽하라고 조언한다. 숲을 산책하고, 관심사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스노클링을 하고, 섬을 하이킹하고,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과수원에서 잘 익은 과일을 따고, 별을 보러 가라는 것이다. 야외 활동의 순간을 즐기며 느낀 감정이 기후 관련 행동에 가져오는 영감과 변화는 존재한다. 그중 한 가지를 실천해보고자 창문을 열고 가을 공기를 맘껏 누리는 이 순간 문득 지구에 닥친 재앙을 블랙코미디로 승화시킨 영화 <Don’t Look Up>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우린 정말 부족한 게 없었어.”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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