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톰보이’ 순진하지만 또렷한 목소리
오래된 동화가 전하는, 오늘을 일깨우는 메시지.
말레이시아에서 자란 소년이 호주로 돌아온 건 12세 무렵이었다. 삼촌은 조카가 호주 생활에 적응하길 바라며 종종 극장에 데려갔다. 소년이 호주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스톰보이>였다. 1976년에 개봉한 호주 영화 <스톰보이>는 호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접한다는, 콜린 티엘이 쓴 동명의 유명 동화를 원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호주 사람들에게는 꼭 봐야만 하는 영화였다. 삼촌이 12세 소년을 극장에 데려간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소년은 자라서 영화감독이 됐고, 12세의 나이로 본 1976년의 고전 영화를 새롭게 만들 자격을 얻었다. 두 번째 <스톰보이>를 연출한 숀 시트 감독에 관한 이야기다.
“1976년 고전 영화 포스터를 아직도 갖고 있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됐을 때 운명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오늘날 젊은이와 소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동시에 우리 세대 관객 또한 어린 시절의 눈으로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2019년에 호주에서 개봉한 두 번째 <스톰보이>를 연출한 숀 시트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를 아우르는 고전 동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 시제를 오가는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자연을 보존하고자 하는 이들과 개발하려는 이들의 대립과 각기 그 입장을 대변하는 자식 세대와 부모 세대의 갈등을 그린다.
지긋이 나이가 든 중년 노인 마이클(제프리 러시)은 자신이 세운 회사를 운영하는 사위(에릭 톰슨)가 추진하는 지역 개발 사업과 관련한 표결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회사로 가는 길에 이를 반대하는 시위대를 목도한다. 자연 파괴를 방조한다는 비판에 직면한 개발 사업에 반대하는 건 그들만이 아니다. 손녀 매디(모건 데이비스)는 아버지의 계획을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며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막아주길 바란다. 그런 손녀에게 마이클은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게 된 아버지(제이 코트니)는 어린 아들 마이클(핀 리틀)을 데리고 펠리컨 서식지와 인접한 호주 남부 지역 쿠롱의 나인티마일 해변 인근에 자리한 작은 오두막집에서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은둔하듯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보다 펠리컨 무리가 익숙한 그곳까지 총을 메고 사냥을 온 이들로 인해 어미를 잃고 버려진 펠리컨 새끼 세 마리를 발견한 마이클은 우연히 마주친 호주 원주민 핑거본(트레버 제이미슨)의 도움으로 펠리컨 새끼들을 구조하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키우기로 결심한다. 어린 펠리컨들이 곧 죽을 것이란 아버지의 예상과 달리 마이클의 헌신 덕분에 건강하게 자라난다.
<스톰보이>는 억압받는 호주 원주민과 인간의 사냥감으로 전락하곤 하는 펠리컨과 친구가 된 한 소년에 관한 사연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명한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처음 소설이 발간된 1963년이나 첫 영화가 나온 1976년보다 작금의 시대에 보다 어울리는 작품처럼 보인다.
인간과 거리를 둔 아버지로 인해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던 소년이 성장해 어른이 된 후에도 그 시절의 경험을 반추하며 동시대에 필요한 가치를 신중하게 고민한다는 건 기후 변화와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지는 오늘날 세계에서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스톰보이>에 등장하는 수많은 펠리컨이 VFX나 CG에 의존하는 대신 동물 감독관과 조류 조련사들이 훈련시킨 펠리컨을 실제로 촬영한 결과라는 사실인데 CG를 이용한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진짜 펠리컨과 소통하며 연출한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펠리컨과 호흡하며 영화를 촬영해야 했다.
그래서 간혹 마음대로 날아가는 펠리컨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빨간 양동이와 먹이를 활용해 펠리컨을 조종했다. 어린 마이클이 구조해 키우는 세 마리의 펠리컨 ‘미스터 프라우드’, ‘미스터 폰더’, ‘미스터 퍼시발’은 다섯 마리의 펠리컨이 돌아가며 연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에 출연한 펠리컨도 ‘스카이’, ‘솔티’, ‘서니’ 등으로 호명했다고 한다.
동시에 영화 자체도 천혜의 자연에서 촬영했다. <스톰보이>의 원작자 콜린 티엘이 중편소설을 쓴 지역에서 촬영했다는데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30여 분 거리를 보트로만 이동해 도착할 수 있었고,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오두막집과 부두를 새로 짓고, 발전기를 가져와 전력을 공급하고 빗물을 표현하기 위해 물을 운반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화처럼 맑은 날씨가 1분 사이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으로 급변하기도 해서 날씨 변화에 맞춰 필요한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영화를 찍는 과정 자체가 자연에 순응하는 의식과도 같았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스톰보이>를 더 흥미롭게 수식한다.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이야기하고, 자연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면모를 보여주는 영화를 찍는 과정 자체가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부합했다는 사실은 발음하는 순간 다소 낡고 진부하게 여겨질지 몰라도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새삼 떠올리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는 1976년에 완성한 영화가 선택하던 촬영 방식을 고스란히 계승한 결과이자 그것을 계승하고자 했다는 의지처럼 읽힌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부합하는 경험이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것이 영화의 원전이 되는 과거의 영화가 취하던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아 전통의 계승이라는 의미를 덧댄다.
결국 이 모든 건 젊은 세대를 위한 격려처럼 보인다. <스톰보이>는 어린 펠리컨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소년의 의지가 어른의 냉소를 이긴다는 것을 주장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된 뒤 무분별한 환경 파괴를 막고자 하는 어린 소녀의 의지를 지지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스톰보이>는 일찍이 옳은 길을 선택할 것이라 믿는 젊은 혈기를 향한 신뢰와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야만 하는 기성세대의 의무를 역설하는 동화인 셈이다. 단순하지만 명료하고, 순진하지만 명백하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도록 망가지는 세상을 물려주고 물려받을 이 시대의 모든 세대에게 어울리는 교훈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주목할 만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저항이 이 영화의 맥락을 더 명확하게 만든다. 내 아이들과 그들을 볼 때 느끼는 바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물려줄 세상에 대한 걱정이고, 다른 하나는 낙관이다. 낙관하는 이유는 젊음이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저항을 볼 때 이런 낙관론이 충분히 근거 있는 믿음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는 젊은이들에게 변화를 줄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는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로 만들었다.” 숀 시트 감독의 말처럼 <스톰보이>는 결국 젊은 세대에게 거듭 물려줄 수 있는 오래된 유산에 관한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가장 고유하고 유효한 유산은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온전한 원형임이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스톰보이>는 반세기 전에 만든 아름다운 동화가 이 시대를 위한 진실한 혜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어떤 경험은 인생을 뒤흔들고, 미래는 종종 과거를 통해 보다 선명하게 예언된다. 결국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가진 동화가 전하는 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또렷한 목소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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