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경의 황홀한 멀티버스
오랫동안 회자될 새로운 시네마의 탄생을 지켜보는 건 흥분되는 경험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그런 영화다. 이 영화는 멀티버스 SF이자 무협에 기반한 액션 영화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말 그대로 대혼돈이었다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양자경의 현실과 성공적인 극 중 캐릭터들이 한 번에 조우하면서 영화 팬들을 감격의 절정으로 몰고 가는 대축제의 멀티버스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최근 부상한 미국 이민자 콘텐츠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억압받는 자녀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감동의 서정시이고, 엄마, 며느리, 아내, 자신이라는 복합 정체성을 가진 인물의 사적 분투를 그린 여성 영화이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부터 <매트릭스>와 <와호장룡>까지 수많은 레퍼런스가 폭포처럼 터져 나오는 시네필 영화이고, 미셸 공드리가 중국 가정에서 태어나 무협 영화를 보고 자란 멀티버스가 있다면 이런 작품이 나올까 싶은 몽환적 플롯의 아방가르드이자, 홍콩 영화 황금기의 아우라를 간직한 채 유일하게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은 위대한 아이콘 양자경에게 제값을 쳐준 예의 바른 영화다.
제작비 2,500만 달러를 들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흥행 수익은 북미 개봉 첫 주 50만 달러로 조촐했지만 평단과 관객의 호평 속에 개봉 규모를 확대해 현재는 2억 달러를 넘보고 있다. 연출 듀오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는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되었고, 원래도 너무 바빠서 <스타 트렉> TV 시리즈에 매진하지 못할까 봐 걱정을 사던 양자경은 더 바쁜 몸이 되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배우 개인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일 정도로 양자경의 역사와 중첩되는 부분이 많다. 새로운 전성기를 맞은 양자경을 알기 위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봐둘 필요도 있겠다. 양자경의 무엇이 이 영화를, 이 영화의 무엇이 양자경을 할리우드의 사건으로 만들었는지 세 가지 키워드로 살펴보자.
#1. 이민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하는 중국 가족 이야기다. 양자경이 맡은 주인공 에블린은 치매기가 있는 부모, 이혼하자는 남편, 납득 못할 애인을 가족에게 소개하려는 딸, 사업과 세금 신고로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다. 그러다 멀티버스가 열리면서 가족이 이상하게 변하고,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과정에서 에블린은 자신이 놓친 가능성, 남아 있는 것들, 어떤 삶을 살더라도 놓아버릴 수 없는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한다. 극 중 에블린은 아버지에게는 광둥어(홍콩을 포함한 중국 남서부 언어)를 하고 남편에게는 만다린(중국 표준어)을 쓰고 딸에게는 중국 악센트가 담긴 영어와 만다린을 섞어 말한다. 딸인 조이는 유창한 영어와 어설픈 만다린을 섞어 답한다. 가족 내에서도 다양한 정체성과 근원적 소통의 한계가 존재함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양자경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다. 1962년생인 그는 어린 시절 변호사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가 유창한데, 그냥 유창한 정도가 아니라 원어민 배우들처럼 각 영어권 국가의 악센트를 연기할 수 있다. 양자경이 홍콩이나 중국 스타 중 유일하게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은 것도 그 덕분이다. <스타 트렉> TV 시리즈에서 중화권 억양의 영어를 한 것은 본인의 선택이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중국 표준어가 어려워서 <와호장룡>을 찍을 때 고생했다고도 하고, 중국 작품에서는 성우가 목소리를 입히기도 한다. 그는 할리우드로 건너간 후 제작자나 동료들이 자신의 연기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며 이민자로서 고충을 토로한 바 있다. 산드라 오를 비롯해 동아시계 할리우드 배우들과 자주 유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중국계지만 엄연히 말레이시아인인 만큼 중국 정부의 홍콩, 대만 관련 정책을 지지하지 않아 중국인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평생 다양한 언어로 소통하며 기회와 한계를 모두 겪어본 사람, 그 자신이 이민자이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양자경의 에블린이 더 실감 나게 다가온다.
#2. 액션
다니엘스 감독은 성룡을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각본을 썼다. 하지만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부부 관계를 풀어가는 편이 더 설득력 있겠다고 판단해 설정을 바꿨다. 주인공이 결혼으로 인해 많은 가능성을 포기했으며 가족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이야기에는 확실히 여성이 어울린다. 극 중 에블린은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악당과 싸우면서 자기도 몰랐던 액션 본능을 마주하는데 왕년의 액션 스타 양자경을 아는 팬들은 여기에 통쾌함을 느낄 것이다.
양자경은 <예스 마담>(1985)으로 국제적 스타덤에 올랐다. 이 영화는 여성 경찰 액션 붐을 일으키며 시리즈로 이어졌다. 그 후 다양한 액션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에 양자경이 무술을 하다가 연기로 넘어왔을 거라 오해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의 몸 연기의 기반은 무용이었다. 그는 네 살 때부터 발레를 배웠고 영국에서는 왕립 무용 학교에 다녔다. 무용은 부상 때문에 그만두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몸을 단련한 덕에 그는 고난도 아크로바틱 액션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고, 그것이 배우로서 차별점이 되었다. 무술을 배운 것은 스타가 된 후다. 부상으로 무용을 그만두고 그것을 활용해 액션 스타가 되었다는 점에서 후배 장쯔이가 종종 양자경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들의 우아한 몸 연기는 현대적인 액션물뿐 아니라 <와호장룡> 같은 무협극에서도 빛을 발했다.
#3. 40년째 톱스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어느 멀티버스에서 에블린은 톱스타가 되어 화려한 인생을 살고 있다. 감독들은 이 장면에서 실제 양자경이 참석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레드 카펫 영상을 활용했다. 양자경은 1983년 미스 말레이시아로 선발되어 연예계에 들어섰고, 당대 홍콩 스타들이 흔히 그랬듯 배우 겸 가수로 활동했으며, 재벌과 결혼했다. 양자경은 간절히 아이를 원했지만 임신이 안 되자 스스로 이혼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기 꿈을 버리고 가족이 만류하는 남자와 결혼해 평범하게 살고 있는 세탁소 주인 에블린에게는 톱스타 에블린이 ‘내가 살 수도 있었던 다른 삶’이지만 실제 배우 양자경에게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세탁소 주인 에블린이 멀티버스의 자신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에블린이 수많은 포기와 실패 속에 한 가지를 얻은 사람이라면 양자경은 수많은 성공 속에 한 가지를 얻지 못한 사람이고, 그 대비를 아는 팬들만이 이 영화의 쓸쓸함과 희망을 모두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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