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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이라는 어중간한 삶 속에서 반짝이는 ‘지금’을 발견하는 일

2022.11.26

by 정지혜

    ‘도중’이라는 어중간한 삶 속에서 반짝이는 ‘지금’을 발견하는 일

    약간의 우회로 이 글을 시작한다. 올여름 출간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책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_영화 <해피 아워> 연출 노트와 각본집>의 한국어판에 비평을 써서 참여했다.

    영화 <해피 아워> 스틸 이미지

    일본 영화의 현재라 불리며 세계 영화계가 앞다퉈 호명하는 재능 있는 감독의 책에 글로써 함께할 수 있어 더없이 기뻤다. 무엇보다 하마구치 류스케를 처음으로 알게 해준 영화, 보는 내내 크게 마음이 흔들린 영화 <해피 아워>에 관한 책이라 원고를 쓰는 내내 순도 높은 애정으로 집중했고 쓰는 시간이 고스란히 몸으로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게다가 이 책의 출간을 준비한 장건재 감독과 제작사 모쿠슈라의 멤버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영화 만들기의 방향을 응원해왔기에 그들의 기획에 작으나마 가담할 수 있어 기쁜 마음이 더 컸다. 그때도 그랬지만, 돌이켜봐도 참 귀한 시간이었다.

    하마구치 류스케, 노하라 다다시, 다카하시 도모유키의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_영화 <해피 아워> 연출 노트와 각본집>(2022, 모쿠슈라)

    그 글에서 나는 <해피 아워>를 두고 “중심을 찾아가는 ‘도중’에 있는 영화, ‘도중’이 곧 영화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영화”라고 썼다. 이어서 덧붙였다. “‘도중’에 벌어지는 일이니, 애초부터 완성형일 수 없고 완성형일 필요도 없다. 중심은 고정돼 있지 않다. 나의 상태에 따라, 내 앞의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세계와 대상에 따라 중심은 매번 달라질 것이다. 그저 움직여 찾을 뿐이다.” 영화 <해피 아워>를 두고 ‘도중’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영화 <해피 아워> 그 자체가 불러일으킨 내적 힘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려 한다.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이번 원고를 준비하기 위해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우연처럼 지난해 봄에 읽은 책 한 권을 다시 펼쳤다. 강인하고 용기 있는 목소리, 삶을 향한 아름다운 탐색과 사려 깊은 대화의 순간이 아로새겨진 더없이 애틋하고 소중한 책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이다. 새삼스럽게, 환기된다. ‘그래, 맞아. 이 책 역시 도중에 관한 책이었지!’ 그리고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라고 생각된다. ‘그래, 맞아. 이 책과 <해피 아워>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구나!’ 의식했든 그렇지 않든, 내 생각의 저변과 마음의 풍향계는 ‘도중’의 세계를 용기 있게 유랑하고 탐문하는 이들이 그린 지도와 얼마간 겹쳤고 비슷한 방향을 향해 눈길을 돌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걸 두고 우연한 마주침이라고 하는 걸까. 타인의 세계가 희미하지만 이렇게나 가까이 이어져 있다.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오랫동안 앓은 유방암이 다발성 전이로 이어지며 언제 병세가 악화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한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가 나눈 편지를 묶은 글이다. 병을 앓는 당사자와 아픈 사람을 주변에 둔 사람이 병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병을 앓는 삶의 불확실성과 위험성이란 무엇인가,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우연과 필연을 둘러싼 대화가 이어진다. 이 편지는 병 앞에서 슬픔과 고통으로 점철된 비탄도 아니며 병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과도 관계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에게 사려 깊고 솔직하며 자신에게는 치열한 이들의 대화의 핵심에는 삶에 깃든 우연 혹은 우연이라고 말해야 할 삶이 있다.

    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의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_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나눈 말들>(2021,다다서재) @dada_libro

    ‘우연’은 미야노가 오랫동안 몰두해온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그가 연구한 사상가 구키 슈조의 말을 빌리자면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지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우연이다. 우연은 ‘현실의 생산점’”이다. 우연의 핵심에는 ‘지금’과 ‘현재’가 있다. 행운이나 공교로운 일도 우연이지만, 때때로 우연은 재앙과 불운의 형태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자신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이게 뭘까, 하고요… 안이한 스토리 속으로 휘말리지 않을 근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에 화내고 질문할 힘을, 자신의 인생을 되찾을 강인함을, 철학이 저에게 주었습니다.” 불운이 불행이 되지 않게끔 하기 위해 미야노는 질문하기로 자처한다. 두 사람의 편지는 삶의 우연, 우연한 삶 앞에서 삶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찾은 그들만의 해법, 삶으로 향하는 길인 것이다.

    우연에 관해 생각하던 이소노는 나아가 운명에 관해서도 말한다. “인생에서 닥치는 영문 모를 일을 받아들이고 단순한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가 바로 운명”이지 않겠느냐고. 미야노도 생각을 잇는다.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우연에 휘말리면서(무력) 그 우연에 대응하는 와중에 자신이란 무엇인지 발견해내고 우연 속을 살아가는 것(초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력’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지는 마세요. 단순히 두 손 들고 항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연 속을 살아가는 강한 힘(초력)을 강조했고 초력은 ‘정열적 자각’이라고 할 만큼 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정열, 강한 힘은, 이소노 씨가 적은 ‘연결점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면서 사람들과 진실하게 마주하고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가겠노라 각오하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우연을 필연으로 또 운명으로 변하게끔 하는 중요한 요소로 타이밍(timing)을 강조한다. ‘time’에 ‘ing’가 붙은 것처럼 시간이 태어나는 바로 그 발생의 순간을 주목하되,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그 타이밍을 잡아채 끌어내는 것이 곧 ‘정열적 자각’이라고.

    다시, ‘도중’이었던 것이다. 완성될 수 없고, 흘러가는 시간의 도중에 중단될 수밖에 없는 게 삶이라면, 결국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지금’이라는 우연이 아니겠는가. ‘지금’을 가까스로 잡아채기 위한 시도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이것은 헛된 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직 그것만이 가능한 시도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미래를 두고 약속하는 게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당신을 향해 약속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미야노와 이소노는 말하는 것 같다. ‘도중’이라는 이 어중간한 상태 속에서 반짝이는 지금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 미야노는 이 책의 ‘들어가며’에 해당하는 글을 썼고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여러분이 보게 될 풍경이 그 인연 너머에 있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로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생의 끝에서 여전히 새로운 시작으로 가득 찬 세계를 향해 던진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이제 그 시선이 또 다른 당신에게 가닿기를 바란다.

    프리랜스 에디터
    정지혜(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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