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겟돈 타임’ 어제의 삶에서 찾아낸 오늘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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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타임’ 어제의 삶에서 찾아낸 오늘의 질문

2022-11-29T15:09:15+00:00 2022.11.29|

자신의 과거로 비춘 오늘의 세계이자 날카롭고 비범한 시선과 사고의 시네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두 편의 영화를 연출한 후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생각했다. 그는 실화를 바탕에 둔 탐험 영화 <잃어버린 도시 Z>를 촬영하기 위해 한동안 아마존 정글로 들어가 열악한 환경과 싸워야 했고, CG  후반 작업을 위해 그린 박스 안에서 와이어에 매달린 배우와 함께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며 우주 SF 영화 <애드 아스트라>를 촬영했다. 두 편 모두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경험이었다.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했다. “영화 작업과 나의 거리를 좁혀서 장식 같은 이야기를 지어내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했다.”  

<아마겟돈 타임>은 제임스 그레이 스스로가 던진 질문을 바탕으로 들여다본 내면에서 찾아낸 답이었다. 뉴욕 퀸스의 유대인 집안에서 공립학교에 다니며 자란 유년 시절의 기억에 영화가 있었다. 그리고 유년 시절의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된 자전적 영화라는 사실은 지난 몇 년 사이 등장한 몇 편의 영화를 함께 떠올리게 만든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리코리쉬 피자>처럼 어린 시절의 자전적 경험을 프리즘 삼아 당대의 시대상을 스펙트럼처럼 펼쳐 조망한 몇 편의 사례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자기 고백적인 수기처럼 사유화된 세계를 발현한 결과이면서도 한 시대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간접적인 관찰의 체험이라는 특징이 나란히 자리한다.  

<아마겟돈 타임>은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난 소년 폴 그라프(뱅크스 레페타)와 함께 돌아보는 1980년 미국에 관한 영화다. 뉴욕 퀸스의 공립학교에서 6학년 새 학기를 맞이한 폴은 선생님을 희화화한 캐리커처를 그렸다가 발각돼 찍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두둔하다 함께 벌을 받게 된 유급생 죠(제일린 웹)와 돈독한 사이로 발전한다.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은 죠니와 화가가 되길 꿈꾸는 폴은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급속도로 친해진다. 하지만 두 소년의 우정은 종종 선을 넘는 일탈로 발전하는 탓에 학교에서 점차 문제아 취급을 받게 되고, 폴의 장래를 염려한 부모는 교육 환경이 좀 더 엄격한 사립학교로 전학을 보내려고 한다. 덕분에 폴과 죠니 우정도 삽시간에 위태로워진다. 

온화하고 지혜로운 외할아버지 애런(안소니 홉킨스)은 누구보다도 폴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돌보는 대상이다. 폴도 그런 할아버지를 잘 따른다. 사립학교 전학을 강행하는 부모의 뜻에 강경하게 반대하던 폴이 그런 현실을 끝내 받아들인 것도 외할아버지의 설득 덕분이었다. 그런 어느 날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미국에 정착하게 됐는지 지난 사연을 설명한다.

본래 우크라이나에서 살던 외할아버지의 어머니가 15세 소녀였던 시절 눈앞에서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군인들을 보고 폴란드와 덴마크 국경을 넘어 영국 리버풀까지 다다라 끝내 미국으로 넘어오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핍박받던 유대인의 역사를 손자에게 전하는 할아버지의 음성에는 좀처럼 흩어지지 않는 두려움과 함께 막연한 기대감이 느껴지고, 외할아버지의 말은 손자의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된다. 그런 손자에게 잠을 청하며 방을 나가는 할아버지는 말한다. “네 과거를 잊지 말고, 잘 자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0년은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해다. 영화에서 TV 화면을 통해 거듭 등장하는 레이건은 미국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했고, ‘아마겟돈(Armageddon)’에 가까운 위기 상태라고 주장한다. “우리 세대가 지구 종말을 맞이할 겁니다”라며 핵전쟁의 위기감을 부추긴다. ‘아마겟돈 타임’이라는 제목은 레이건의 그런 발언과 유관해 보인다.

동시에 영화에 삽입된 영국 펑크 밴드 더 클래시의 넘버 ‘Armagideon Time’의 제목을 직접적으로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즐겨 듣던 곡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 ‘Armagideon Time’을 삽입곡으로 활용하고 제목으로도 인용한 만큼 이 영화가 지칭하는 ‘아마겟돈 타임’이란 비단 1980년대 가리키는 과거형의 언어로 머무는 것 같진 않다. 돌아보는 영화가 아니라 내다보길 원하며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제목이다. 

흑인과 백인이, 가난한 집안의 아이와 중산층 집안의 아이가 공존하는 공립학교에 다니던 폴은 백인 아이 일색의 사립학교 포레스트 매너에 처음 등교하는 날 의외의 인물을 만난다. 그 유명한 성으로 익숙할 도널드 트럼프의 아버지인 백만장자 부동산 사업가 프레드 트럼프(존 딜)는 백인 엘리트의 청사진을 강변하고 지지하는 사립학교 출신 후원자로 등장한다.

그럼으로써 신자유주의를 강변하는 로널드 레이건의 시대가 지닌 영향력을 실감하게 만든다. 동시에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후보 시절 그의 대학 부정 입학 혐의를 폭로하는 책을 발간하는 등 친동생의 대통령 당선을 저지하려 했던 미 연방 검사 메리앤 트럼프(제시카 차스테인)가 등장해 여성으로서 사회적 자립을 웅변하는 장면은 다른 방식으로 상징적이다. 신자유주의와 페미니즘의 의지가 공존하는, 보수와 진보가 함께 엉켜 전진하는 기이한 시대상이 트럼프라는 고유명사와 맞붙어 아이러니한 상념을 품게 만든다. 

“레이건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남부의 백인 지지자들을 자신의 정치적 무기로 삼고 있었다. 그의 선거운동을 보면 그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편협함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는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나 다름없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말처럼 핵전쟁 위기를 주장하며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고, 외부의 적을 상정하며 내부의 결속을 요구한 레이건이 대선 당시 내세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Let’s 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슬로건을 도널드 트럼프가 계승한 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흑인과 소수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외면하고 노골적인 혐오를 자유로 둔갑시키는 정치공학적 기술을 바탕에 둔 정치인의 시대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패턴이 된 것이다.  

사회적 분열과 이기적 혐오를 활용한 정치가의 등장은 사실상 개개인의 모순을 먹고 자라난 결과이기도 하다. 폴의 아버지 어빙(제레미 스트롱)은 전기 수리공이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의 시대를 반기지 않지만 집안에서 가부장의 권위를 폭력적으로 드러내며 자식들을 곧잘 떨게 만든다. 폴의 어머니 에스터(앤 해서웨이)는 학부모회 일원으로서 아들의 학업에 관여하지만 아들의 재능보다는 성적에 대한 관심이, 그로 인한 자신의 품위가 실추되지 않길 바란다.

차별을 혐오하지만 내재된 모순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한다.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자식들의 꿈을 응원하는 대신 자신이 생각하는 청사진을 바라보길 강요한다. 레이건을 지지하는 이들로 점철된 ‘아마겟돈 타임’을 지나는 시대상에 반발하지만 ‘인생은 불공평한 것’이라는 의식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결국 불공평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의식의 세계에서 차별과 혐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폴과 죠니의 일탈은 공동의 인과이지만 그 후의 응보는 저마다 다른 양상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두 소년의 꿈은 애초에 시작점이 다른 형편의 세계에서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확률로 엇갈린 운명처럼 흐른다. 각기 다른 꿈을 꾸는 두 소년은 꿈을 꾼다는 공감대에서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함께 모색한다. 하지만 섣부른 희망은 망상이 되어 현실을 위험천만하게 끌어내린다.

하지만 폴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죠니는 그 바닥에 남아야 한다. 애초에 꿈꿀 수 없는 삶은 구원받을 기회조차 희박하다. 꿈꿀 수 있는 자유가 개인의 의지에 달린 삶과 지속될 수 없는 형편으로 가로막힌 삶의 희비란 처음부터 정해진 것처럼 두 소년의 인과에 따른 응보는 피부색을 통해서 애초에 결정된 것처럼 결코 균등하지 않다.  

유년 시절 친구와 함께 도둑질을 한 뒤 경찰에 붙잡혔지만 아버지의 도움으로 풀려난 자신과 달리 경찰서에 잡혀 있었던 친구와는 그 뒤로 만날 기회가 없었고, 몇 년 뒤 그 친구가 마약 거래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다. 제임스 그레이가 실제로 겪은 사건은 그 사소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특해프닝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극화한 <아마겟돈 타임>은 뿌리 깊은 구조적 차별의 그림자가 한 소년의 사적인 일상과 관계에도 드리우는 현상이었다는 것을 목격하고 성찰하게 만듦으로써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분법적인 혐오를 조장하고 폭력적인 권력의 지지를 요구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첨예한 갈등으로 세계 곳곳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그런 목소리를 내는 입안의 검은 속을 들여다보길 권한다. 

백인 아이들로 점철된 사립학교의 무도회 행사가 열리는 강당에서 마이크를 잡은 프레드 트럼프는 그들이 장차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역이 될 것이라 말한다. 미국 사회를 주도할 백인 인재들의 미래 권력을 당부한다. 그리고 영화는 선택한다. 미래 권력이 될 백인 아이들의 파티장에서 뒤돌아 빠져나온 폴과 함께 모든 것이 줌 아웃된다. 알게 모르게 구조적 차별이 자행되고 실행되는 교실과 학교를 비롯한 곳곳으로부터 빠져나오듯 멀어진다.

소년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아낀 외할아버지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는 대신 “세상과 싸우는 게 참 어렵?”라는 격려와 “절대 그놈들한테 져서는 안 된다”는 당부로서 소년이 갈 길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어제의 삶에서 찾아낸 오늘의 질문은 내일로 갈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각성과 성찰을 도모하는 어제의 경험이 끝내 내일에 어울리는 청사진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의 선언. <아마겟돈 타임>은 그렇게 종말이 찾아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오늘에 압도되지 않는 젊은 희망을 향해 내미는 온기의 영화가 된다. 날카롭고 비범하며 사려 깊고 끝내 비장하다. 다부진 각오와 따뜻한 격려로 내딛는 발걸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