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리도에 가고 싶다

2022.12.03

by 정지혜

    리도에 가고 싶다

    리도(Lido)에 가고 싶다. 영국의 공영 야외 수영장을 일컫는 말인데 ‘리도’라고 발음할 때면 괜스레 이국의 고요하고 인적 없는 섬이나, 그런 게 정말 있기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낙원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치열하고 소란스러운 도심 한복판에 있는 리도, 그것도 오랜 역사가 있는 리도라면, 레저의 공간이 아니라 수영하겠다고 작정하고 온 사람들이 찾는 리도, 그들의 고요하고 정직한 스트로크가 이어지는 리도라면, 그곳은 얼마간 지상의 작은 낙원, 아늑한 섬이 돼줄 것 같다.

    Getty Images

    한파를 뚫고 오늘도 수영장으로 향한다. 비록 리도는 아니지만, 실내 수영장에 첨벙.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 있다면, 몇 해 전 우발적으로 수영을 배운 일이다. 마음이 괴롭고 하루하루가 갑갑하고 사는 게 옴짝달싹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였다. 당장 내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나라도 변신하고 싶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걸 해보자, 이왕이면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주저하던 것부터 하자.’ 수영이었다. 주변의 영화 친구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던 수영. 하지만 수영복을 사러 가고 갈아입고 제모에 신경 써야 하는 귀찮음부터 많은 사람의 시선을 느끼며 수영장으로 입장하는 민망함까지 넘어설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이 모든 거추장스러운 게 다 뭐라고!’ 그렇게 시작해 지금껏 수영인을 자처하며 매일의 수영을 이어간다. 언제 어디서든 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알 수 없는 힘이 생긴다. 여행이나 출장을 갈 때면 수영복을 챙기고 그 지역, 동네의 수영장을 검색하게 될 줄이야. 수영장마다 다른 수질, 수온, 깊이, 레인 길이, 물살의 정도, 공간과 수영하는 사람들 간의 묘한 분위기 같은 걸 겪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능하다면 아주 오래, 할머니가 돼서도 여사여사한 수영복을 골라 입고 수영하겠다. 그래서 더더욱 리도로 가보고 싶다. 도심의 공원이나 동네 한가운데 있는 리도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수영하는 기분은 어떨까. 그날의 기온, 바람, 햇살에 따라,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물의 감각, 몸의 상태를 느끼는 건 어떤 일일까.

    매들린 월러의 <수영하는 사람들_이스트런던 동네 수영장의 내면>(2019, 에이치비 프레스)

    @hbpress_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1월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에 있는 야무진 책방 소리소문에서 발견한 <수영하는 사람들>이다. (그때도 제주의 공공 수영장을 찾아 수영을 했다.) 영국의 사진가 매들린 월러는 런던의 자치구인 해크니에 있는 런던필즈 리도를 찾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수영과 리도에 관한 그들의 추억과 생각을 담아 책으로 펴냈다. 그곳은 1932년 문을 열어 1988년 운영을 잠정 중단했다가 2006년 재개장한 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다행히 운영 중단 시기에도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수영장 부활을 위한 적극적인 지역 활동가의 노력으로 되살아 돌아왔다. 검색해보니, 런던필즈 리도는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6시 30분부터 밤 9시까지 문을 열어둔다. 물 온도는 늘 그렇듯 섭씨 25도를 유지하면서.

    매들린 월러는 같은 사람의 사진을 두 번 찍었다. 한 번은 평상복 차림으로, 다른 한 번은 수영복 차림으로. 두 사진에서 인물은 동일인이지만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에 들어선다는 건 사회적 외피를 두른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다는 의미이고 의식이다. “몸을 감싸는 물의 느낌,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온도 차이, 특히 겨울에 차가운 데에 있다가 따뜻한 물로 들어갈 때의 느낌, 그 모든 것을 전부 사랑한다. 도시의 삶을 견디게 해준다.”(25세 여행사 직원 카리나) “임신 중에도 내내 수영을 했다. 그 시간은 온전히 나와 아기만의 시간이었다… 물속에서 다양한 몸동작을 할 수 있다.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순간이다.”(32세 영화 제작자 루시) “물에는 정화하는 힘이 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다. 지금 내 인생에서 최우선 순위는 바로 나다.”(44세 사업가 데인) “오랜 야간 근무를 마친 후에 수영하러 가는 걸 좋아한다. 기진맥진할 정도로 피곤하지만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느낌… 생각을 비우고 긴장을 풀기에는 제격이다.”(34세 TV 뉴스 프로듀서 벤) “수영은 매우 조직적이다. 대체로 비슷한 조합의 스트로크를 매번 똑같이 하니까. 바로 그 점에 삶의 다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다.”(37세 작가 에드워드) 벌거벗은 부끄러움에서 평화로운 자유를 느끼고, 취약한 무방비 상태에서 더 큰 힘을 얻기까지. 이들이 전해온 리도 이야기가 곧 나의 수영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영 예찬을 한 바닥 썼지만, 각도를 조금만 틀어 생각해보면, 이것은 다양한 세대와 이력의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마을의 공공 건축과 공공시설을 오랫동안 사용하고 사랑하는 법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공공 도서관, 미술관, 체육관, 마을 회관, 미디어 센터 그리고 리도. 소설 <수영하는 여자들>도 이런 맥락에 함께 둘 만하다. 작가이자 <가디언>의 저널리스트 리비 페이지는 유년기를 보낸 브록웰 지역과 그곳의 공동체 정신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실제로 1937년 사우스 런던에 문을 연 브록웰 리도가 이 소설의 주요한 배경이자 주인공이다. 런던필즈 리도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1990년대에 폐쇄된 적이 있었지만,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캠페인 덕분에 재개할 수 있었다. 소설은 부동산 개발의 명목으로 리도를 폐쇄하고 팔아버리려는 시 의회에 맞서 리도를 지키고 살리겠다고 뭉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가운데 이곳에서 수영하는 일로 평생을 보낸 86세의 로즈메리와 그녀를 취재하며 함께 수영을 시작하게 된 26세 저널리스트 케이트의 우정이 빛난다. “우리는 모두 그곳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며 그곳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위해 있어줄 거라 믿죠. 리도에는 너무나 많은 우리의 추억이 담겨 있어요. 바다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곳은 여름이며 자유예요. 그리고 나에게, 나에게 그곳은 바로 삶이고요.” 로즈메리의 말 앞에서 ‘내게도 그런 곳이 있나’를 생각해본다. 동네의 아끼던 오랜 카페, 작은 식당, 빈티지 상점이 젠트리피케이션과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참 많이 사라졌다. 금세 새로운 것으로 채워지고 있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다. 언제 찾아도 그곳에 있을 리도, 그곳에 가고 싶다.

    프리랜스 에디터
    정지혜(영화 평론가)
    포토
    Getty Images, 에이치비 프레스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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