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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비버 돌려 입기 #그 옷과 헤어질 결심

2022.12.09

by 이소미

    저스틴 비버 돌려 입기 #그 옷과 헤어질 결심

    그래픽 티셔츠의 위력을 실감한 건 고등학교 때다. 당시 내게는 커트 코베인이 무대 위에서 무아지경으로 기타를 치는 장면이 새겨진 티셔츠가 있었다. 너바나를 특별히 좋아해서는 아니었고 록 마니아인 아빠가 선물해준 옷이었다(사춘기 딸에게 뜬금없이 그걸 왜 준 건지 아직도 의문이다…). 박시 핏이라 편해서 자주 입었다. 어느 날, 수학 학원에서 관심 있게 지켜보던 남자애가 “티셔츠 멋있다, 나도 커트 코베인 좋아해”라며 말을 걸어온 순간 깨달았다. 나는 커트 코베인을 좋아해야 한다.

    그래픽 티셔츠는 일종의 움직이는 자기소개서다. 그 어떤 옷보다 가장 쉽고 직접적이다. 옷깃을 스치는 모든 이에게 굳이 성가신 설명 없이 ‘나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에요!’를 드러낼 수 있으니까. 낯선 이와 대화의 물꼬를 트기에도 유용하다. 물론 나처럼 취향을 속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2017년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당시 복남이(‘#그 옷과 헤어질 결심’ 1편 참고)를 포함해 네 명의 친구들과 한집에 살고 있었다. 그 집엔 세탁기가 없었기 때문에 주말이면 함께 모여 빨래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각자 방에서 빨래 바구니를 들고 나와 모인 뒤 집 앞 세탁방으로 가서 다섯 명분의 빨랫감을 섞어 넣는다. 그리고 알람을 맞춰두고 근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거나 긴 산책을 한다. 건조까지 마치고 나면 집으로 돌아와 세탁물을 거실 바닥에 쏟아붓는다. 그 후에 그려지는 풍경은 매번 다르다. 자기 옷만 대충 골라 들어가는 이도 있고, 그 자리에서 곱게 개키는 이도 있다. 내일로 미뤄두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다. 거실 바닥에 남겨진 옷은 주인이 알아서 찾아가도록 마지막에 남은 이가 소파에 올려두는 게 규칙이었다.

    이쯤 되어서 복남이를 제외한 인물 소개를 간략히 하고 넘어가자. 한 친구는 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애였는데 너무 긴 나머지 저조차도 매번 제대로 된 결론을 짓지 못해서 ‘아무튼’이라는 말을 수시로 달고 사는, ‘암튼’이라는 아이였다. 또 한 친구는 라이언 고슬링을 닮았기 때문에 슬링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정확히 해두자면 <라라랜드>의 (멋있는) 라이언 고슬링 말고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불쌍한) 라이언 고슬링… 지금 이 시대보다 <마지막 승부> 시대가 왠지 더 어울리는, 알뜰한 살림 솜씨와 괜찮은 기타 실력, 뜨거운 마음씨를 지녔던 친구는 청춘이라고 부르겠다.

    사건의 시작은 늦봄, 내가 3박 4일간의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내 방에서 짐 정리를 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어느 옷을 들어 보이며 혹시 이 옷이 네 옷이냐고 물었다. 빨래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계속 소파 위에 있었다며 말이다. 그 옷은 검은색 바탕의 후디를 뒤집어쓴 데뷔 초의 저스틴 비버가 잔뜩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정면을 노려보는 사진이 프린트된 티셔츠였다.

    사실 내 진짜 취향은 커트 코베인이 아니라 저스틴 비버였다.

    이마를 덮은 더벅머리, 애처로운 눈빛, 앳되고 감미로운 목소리… 고등학교 때 내 인생에 처음 등장한 그는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모두가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다. 그때쯤 발표한 곡 ‘Baby’는 유튜브에서 전례 없는 ‘싫어요’ 수를 기록했고, 인터넷에서 그를 조롱하는 건 하나의 놀이였다. 연이어 방황기를 맞은 그의 불미스러운 행보는 이 흐름에 더 힘을 실었다. 대학교에 입학하자 어느새 저스틴 비버는 ‘구린’ 취향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취향보다 체면이 중요했던 나는 ‘이 남자가 내 가수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대세에 휩쓸려 “즐겨 듣는 음악은 킹 크룰이에요”라고 (눈물을 머금으며) 말하는 비겁하고 지질한 소시민이 되어 있었다…

    2017년에도 여전히 비겁했던 나는 복남인지, 암튼인지, 슬링인지, 청춘인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티셔츠를 보며 내뱉는 “대체 이런 X 같은 티셔츠는 어디서 구하는 거냐”는 중얼거림에 더욱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를 제외한 이 집 식구들은 내가 만난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저스틴 비버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티셔츠는 내 거였다. 여행 짐을 챙기려 옷을 죄다 꺼냈다가 빨래 바구니에 어쩌다 밀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그간 집에 놀러 왔던 이들 중 한 명이 두고 간 옷일 거라 치부한 (나를 제외한) 우리는 샤워하고 나와서 마땅히 입을 옷이 없을 때, 집 앞 편의점에 갈 때 등 아무 때나 막 걸치는 공용템으로 저스틴 비버 티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나는 어쩐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마음이 되어 일부러 그 옷을 입지 않았다.

    몇 주 뒤였다. 함께 저녁을 먹다가 복남이가 저스틴 비버의 티셔츠를 입으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론을 내놓았다. 얼마 전 그 옷을 입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구청에 갔다가 교통경찰을 마주쳐 불법 주차 딱지를 끊겼다고 했다. 그게 대체 저스틴 비버와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지만, 그의 주장은 완고했다. 티셔츠 속 비버의 호전적인 눈빛이 교통경찰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거다. 코웃음을 치려던 찰나 슬링이가 거들었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자신은 지난주 면접에서 그 티셔츠를 입고 갔다가 그 자리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대체 어떤 미친 사람이 저스틴 비버 티셔츠를 입고 면접에 가냐고 모두가 면박했지만, 슬링이는 누굴 바보로 아느냐는 표정으로 당연히 화이트 셔츠를 위에 입었다고 했다(속이 비치는 화이트 셔츠에 검은색 티셔츠라니, 그는 바보다…). 면접에서 떨어진 이유는 그게 아닌 것 같았지만 슬링이는 복남이의 말을 듣고 보니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깃들어 있긴 한 것 같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사실 그리 설득력 있는 불행은 아니라서 대충 듣고 넘겼다. 그 뒤로도 저스틴 비버 티셔츠는 여전히 여러 몸을 옮겨 다니며 마구잡이로 다뤄졌다. 잠잠해지던 루머가 기정사실이 되기 시작한 건 암튼이 때문이었다. 암튼이가 저스틴 비버 티셔츠를 입고 산책하러 나갔다가 발등에 똥을 맞은 것이다. 심지어 그 개똥의 주인은 우리가 함께 키우던 복남이의 개(늘 사람보다 큰 똥을 쌌기에 변변이라 하겠다)였다. 변변이는 밖에서만 대변을 보는 습관이 있어 하루에 최소 두 번은 산책을 해야 했다. 그날의 당번이었던 암튼이는 가로등 밑에서 휴대폰을 보며 변변이가 똥을 싸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발등이 따뜻해진 기분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런 참사가 벌어져 있었다고 했다. 유감이지만 그날 암튼이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 뒤로는 미신 따위 믿지 않는 청춘이만 저스틴 비버 티셔츠를 즐겨 입었다. 하지만 어느 늦은 밤 그 티셔츠를 입은 채 방에 드러누워 기타를 치던 청춘이가 집 앞이라는 여자 친구의 연락에 신나서 나갔다가 5분 만에 이별을 당하고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우리 집에서 저스틴 비버 티셔츠는 공식적으로 저주받은 옷이 되었다. 이제 와서 숨겨왔던 내 사랑을 밝히기엔 골든 타임도 지났을뿐더러 집 안 여론은 이미 최악이었다. 저스틴 비버 티셔츠를 사수하는 것보다 그에 대한 내 마음을 숨기는 데 더 급급했던 나는 그저 그 참혹한 상황을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어서 왜 고작 티셔츠 한 장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지 의문을 품는 이도 있을 텐데, 당시 우리는 아르바이트 말고는 딱히 할 짓이 없는 백수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저스틴 비버 티셔츠는 변변이가 깔고 자는 담요 신세로 처참히 몰락했다. 시간이 흘러 따로 자취방을 구하게 된 나는 이사 전날, 야반도주하는 이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티셔츠 위에서 자고 있는 변변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식탁보 빼기 게임을 하듯 옷을 쓱 빼내어 이사 박스 맨 밑에 욱여넣은 뒤 그 집을 떠났다. 그렇게 내 취향을 속인 대가로 온갖 미움을 받았던 무고한 저스틴 비버 티셔츠는 겨우 다시 내 옷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더 이상 그를 그런 방식으로 미워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저스틴 비버 티셔츠를 당당히 입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최근 다시 그 옷을 꺼내 거울 앞에 서서 괜히 이리저리 덧대어 보았다. 티셔츠에 프린트된 사진이 그리 잘 나온 사진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 옷을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다는 걸. 멋쩍은 마음과 함께 급하게 입어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입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보다 핏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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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소미
    포토
    Splash News, IMDb,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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