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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입을수록 외로운 옷 #그 옷과 헤어질 결심

2022.12.16

오래 입을수록 외로운 옷 #그 옷과 헤어질 결심

“XX 고독하구먼.”
2년 전 겨울, 재택근무를 하며 (속으로) 읊조렸던 말이다.

태어나서 처음 해본 재택근무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냥 오늘 출근 못한다고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비척비척 샤워하러 가는 것까지야 일반적인 출퇴근과 다를 바 없지만 그 후의 과정은 조금 다르다. 옷장 앞에 서서 뭘 입어야 하나 고민하는 대신 새 속옷과 새 긴팔 티셔츠를 서랍에서 꺼내 입은 뒤 입었던 맨투맨을 입고, 입었던 조거 팬츠에 다리를 끼운다.

더럽다 생각하기 전에 돌이켜보자. 겨울은 남에게 보이는 옷보다 나만 보는 옷, 그러니까 셔츠보다 내복을 더 자주 빠는 계절이다. 재택근무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피부에 직접적으로 닿는 옷만 매일 갈아입을 뿐 제일 마지막에 입는 후디나 맨투맨은 입고 밖에 나간 적이 없는 이상 웬만하면 며칠은 그냥 빨지 않고 입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거나 막 주워 입진 않는다. 집에 혼자 있으면 꽤나 과격하고 지나치게 편안한 행동을 자주 하게 되므로 그에 걸맞은 TPO를 갖춘 옷을 선택한다. 소재는 부드러워야 하고, 사이즈는 커야 한다. 외출용으로 입고 싶은 옷은 절대 안 된다. 그렇다고 셀카를 찍었을 때 민망할 정도로 루스해서도 안 된다. 매일 봐도 지겹지 않은 그래픽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옷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당시 이 모든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한 옷은 짙은 군청색에 은하수를 배경으로 인디언이 고독하게 혼자 시가를 태우는 프린트가 새겨진 맨투맨이었다. 그해 겨울 이 맨투맨은 어떤 옷보다 나와 가장 자주, 오랜 시간 함께했다.

내 인디언 맨투맨은 재택근무를 할 때 완벽한 유니폼이자 동료 역할을 해냈다. 남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재택근무의 장점은 모두 이 옷과 함께 겪었다. 혼자 크게 욕을 하거나 담배를 거의 물고 있는 수준으로 뻑뻑 피워대거나 다리 한쪽을 올리고 작업하거나 음악 볼륨을 최대치로 틀어두고 딴짓하거나 침대에 거의 드러누운 채로 일을 해봤다(늘어놓고 보니 이게 장점인지 잘 모르겠다…). 퇴근 후에는 아늑한 라운지 웨어이자 잠옷의 역할도 기꺼이 해주었다. 이 옷을 입고 뜨개질도 하고, 레고도 조립하고, 술도 마시고, 토도 하고, 청소도 하고, VPN도 켜고, 책도 읽었다.

문제는 이렇게 살면 도무지 할 말이 없어진다는 거다. 분명 나는 직장인인데 대화할 일이, 대화할 사람이 없다. 오늘은 그래도 햇빛이 있네요, 식사는 하셨나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도전해볼까요, 주말에 뭐 하세요, 아직도 수요일인가요, 같은 말을 할 기회가 일절 없다는 뜻이다. 다른 계절에야 산책이라도 나가거나 약속이라도 꾸역꾸역 잡았겠지만 상대는 겨울이다. ‘춥다’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생각이 없으니 하고픈 말은 더더욱 없어지고, 당연한 수순으로 사람 만나는 게 귀찮아진다. 시국을 핑계로 약속도 안 만든다. 아무도 이 집에 오지 않고 이 집을 나가지도 않는다. 집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

물론 지독한 내향형 인간으로서 한동안 참으로 행복했다.

하지만 겨울은 너무 길다. 이 짓도 하루 이틀이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옷을 입고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면 사람이 미친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다녔던 회사의 업무량도 꽤 큰 영향을 끼쳤다. 세상에는 이 옷을 입은 나와 노트북 속 업무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날이 그날이었다. 해도 짧아서 낮과 밤을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회의를 하는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나는 집의 적막함에 아주 조금씩, 천천히 상처를 입었다. 집이 지겨워졌다. 하지만 나갈 수 없었다. 밖은 추웠고 그럴 힘도 없었다. 지겹도록 익숙하지만 헤어지진 못하는 권태기 커플처럼 집과 지지부진한 관계를 유지했다.

내가 내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것에 둔해지면서 겨우 남아 있던 옷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사라졌다. 아이스크림이 손에 흐르면 보지도 않고 소매에 쓰윽 닦아냈다. 틈만 나면 소파에 등을 기대고 세운 무릎을 맨투맨으로 덮어 목 부분은 늘어졌고 배 쪽의 면은 나슬나슬하다. 요리하다 묻었는지 오른쪽 옆구리와 겨드랑이 부분에는 빨래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름얼룩이 선명했다. 틈만 나면 프린트를 만지작대서 시가를 든 인디언의 손가락은 눈에 띄게 옅어졌다. 옷뿐 아니라 집과 나에게도 이런 식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집은 마구간과 다를 게 없었고, 나는 춥다는 핑계로 산책 한 번 나가지 않았다. 하루 걸음 수를 100걸음도 못 채웠을 것이다. 그래도 별 신경도 안 썼다. 아무도 날 보지 않았고 나도 나를 안 봤다.

‘더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든 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지금 널 만나긴 귀찮지만 외로워서 죽을 것 같다고 말 좀 걸어달라고 했다. 친구는 이럴 땐 수다 대신 눈물 한번 시원하게 쫙 빼줘야 하는 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 유튜브 링크를 하나 보내주었다(얘도 당시 하고픈 말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제목은 ‘울고 싶을 때 보는 영상’. 열받았지만 보면서 울었다(는 것도 열받는다). 옷소매로 연신 눈물과 콧물을 닦아가면서.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한번 터진 눈물은 영상이 끝나도 멈출 줄을 몰랐다. 나중에는 담배를 그대로 든 채로 책상에 아예 엎어져 이때다 싶은 마음으로 편하게, 열심히 울었다. 다 울고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번 소매로 눈물을 닦으려고 팔을 들었다가 웬 구멍을 발견했다. 엎드려 울다가 들고 있던 담배가 내 인디언 맨투맨의 왼쪽 소매에 닿으면서 옷이 탄 것이다. 수선 대신 빨래를 했다. 담배빵은 그대로였지만 콧물 자국은 없어졌다. 마음이 개운했다.

그렇게 몇 번 더 이 옷을 빨았을까, 정신 차려보니 봄이 왔다. 그 후에는 반팔을 입고 재택근무를 했다. 매일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날씨였기에 이 인디언 맨투맨만큼 정을 붙인 옷은 없다. (그때 당시 다녔던 회사에도 정을 못 붙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대신 그때부터 집에서 입는 옷도 신중하게 골라내는 취미가 생겼다.

그래서일까, 그 뒤로 맞이한 겨울에는 이 옷을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입는 순간 그때 그 눅눅한 울적함이 습관처럼 스멀스멀 올라올 것 같아서, 는 아니고 입기엔 너무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생활감이면 셀카도 못 찍는다. 미안하진 않다. 나 역시 난생처음 해보는 재택근무와 매서운 겨울,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코로나19가 절묘하게 합쳐진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의 피해자일 뿐인걸. 하지만 그 옷이 내 눈물과 콧물과 토와 침과 말 한마디 붙일 사람 없던 그 시절 내 외로움을 받아주다가 담배빵까지 당한, 고마운 옷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신고식을 거하게 치렀으니 다음 (재택근무와 함께할) 옷엔 정말 잘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옷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 있다. 깨끗이 입고, 빨래도 자주 하고, 일도 제때 끝내고, 함께 좋은 곳도 가고, 사람들에게도 많이 보여줘야지. 찾아오는 고독도 유연하게 즐기면서. 아아, 다시 겨울이다. 얼른 그다음 옷을 만나고 싶다, 최대한 빨리, 빠른 시일 내에, 부디.

에디터
이소미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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