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쓰는 인간, 세라 망구소가 인도하는 사유의 여행

2022.12.20

by 이정미

    쓰는 인간, 세라 망구소가 인도하는 사유의 여행

    세라 망구소의 에세이 2부작 <300개의 단상>과 <망각 일기>가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시와 소설,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산문을 쓰며 안티오크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세라 망구소는 집요할 정도로 성실한 ‘쓰기’를 통해 삶을 기록해온 작가입니다. 마비성 질환으로 인한 투병 경험을 담은 회고록 <쇠락의 두 가지 유형(The Two Kinds of Decay)>과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를 향한 슬픔을 담은 <수호자들(The Guardians)> 등의 작품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죠. 소설가 줌파 라히리가 “오늘날 영미 문단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작가”라고 극찬할 정도로 미국에서 주목받는 작가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그녀의 작품을 만나볼 기회가 없었는데요. 지난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으로 제니 오델을 국내에 소개한 필로우 출판사에서 이달에 출간한 세라 망구소의 에세이 2부작 <300개의 단상>과 <망각 일기>를 통해 그녀의 문학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읽기와 쓰기, 자아와 타인, 욕망과 좌절,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을 써 내려간 <300개의 단상>은 짧은 글로 이뤄졌으며 장마다 여백이 자리한 얇은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습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300권의 책을 읽는 것과 다름없을 수 있는데요. 세라 망구소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 한 문장만으로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한”, 수없이 곱씹게 되는 문장으로 채워졌기 때문이죠. 책 속에서 “나는 요약이 불가능한 글을 좋아한다. 핵심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압축할 수 없는, 쓰인 그대로 옮길 수밖에 없는 글을”이라는 문장을 봤을 땐, 그녀가 자신의 글에 대한 찬사를 긴밀히 의도해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우스운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글을 이 책을 통해 써 내려간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300개의 단상>을 읽다 보면 작가가 그 어떤 불필요한 요소 없이 정교하게 정리해 선보인 문장이 날카롭게 연마된 칼처럼 무의식의 폐부를 찌릅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던 혹은 알아차리려 노력하지 않았던 내면을 관통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더군요. 아래의 문장을 예로 보여드리죠.

    “꽃병처럼, 마음도 깨지는 건 처음 한 번이다. 그다음에는 이미 가 있는 금들을 이겨낼 수 없을 뿐이고.” <300개의 단상> 9쪽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사실 내가 지금껏 별로 변하지 않았으며 변화 같은 건 전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300개의 단상> 21쪽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내가 가진 두려움들은 더 이상 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들을 짐이 되게 만든 건 희망이었다.” <300개의 단상> 25쪽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렇게 행복해지기 위해 그 모든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었느냐고.” <300개의 단상> 37쪽

    “적응을 잘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자기 삶 한구석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여기저기로 골고루 분배한다.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같다.” <300개의 단상> 41쪽

    “행복은 일단 행복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질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300개의 단상> 85쪽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는 죽음과도 같은 ‘망각’의 뒤편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한 세라 망구소는 무려 25년 동안 꾸준히 일기를 써왔습니다. 특히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는 일기장으로 내 존재를 빈틈없이 떠받치고 싶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서, 그녀의 삶에서 일기가 어떤 의미인지 엿볼 수 있죠. 세라 망구소가 써온 일기에 대한 일기인 <망각 일기>에는 그녀가 그동안 쓴 80만여 단어의 일기가 전혀 인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삶, 일기에 대해 변화해온 그녀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죠. 무엇보다 출산과 육아는 세라 망구소가 일기와 맺어온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 기념비적 사건인데요. 엄마가 되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일상을 살아가게 된 작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을 잊어버리기도 하는 한편 생애 초기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기도 합니다. 세라 망구소는 이 책을 통해 “이제 나는 망각이 내가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한 대가임을, 시간에 무심한 어떤 힘의 영향임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일기는 이제 ‘기억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망각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는 중대한 삶의 변화를 밝히고 있습니다.

    프리랜스 에디터
    이정미
    포토
    필로우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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