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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이별 #그 옷과 헤어질 결심

2022.12.26

by 이소미

    정해진 이별 #그 옷과 헤어질 결심

    (헤어져야 마땅한) 옷과 헤어질 결심을 한 지도 벌써 약 5주가 지났다. 겨우 네 벌 버렸다. 문득 이딴 식으로 갔다간 10년도 더 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련 가득 담아 한 바닥을 느릿느릿 채워 쓴 옷과의 추억은 이미 지나간 모든 것이 그렇듯 이제 모두 한 줄로 설명이 가능해졌다.

    한파에 오토바이 타고 쇼핑 갔다가 울면서 오줌 참을 때 입었던 점프수트

    행어가 무너졌다 #그 옷과 헤어질 결심

    싸느냐, 마느냐 #그 옷과 헤어질 결심

    남자 꼬여보겠다고 한겨울에도 줄기차게 입은 구멍 숭숭 난 드레스

    벗기 위해 입는 옷 #그 옷과 헤어질 결심

    소소한 저주가 걸린 저스틴 비버 얼굴이 새겨진 프린트 티셔츠(저스틴 비버가 저주에 걸렸다는 게 아니라 프린트 티셔츠가 저주에 걸렸다는 소리)

    저스틴 비버 돌려 입기 #그 옷과 헤어질 결심

    겨울 재택근무 시절 제대로 빨지도 않고 즐겨 입던 걸레에 가까운 맨투맨

    오래 입을수록 외로운 옷 #그 옷과 헤어질 결심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버릴 일이었다면 이참에 재고 처리하듯 한 번에 여러 벌을 버려야겠다 싶었다. 대신 평소보다 미련해지는 연말, 옷 버리는 데 이 마음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옷으로만 골라봤다. 빠르게 추억하고 빠르게 보낼 수 있는 옷. 한 줄로 다시 요약할 필요도 없는 옷. 골라놓고 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살 때부터 버릴 운명임을 무의식적으로 직감한 옷이다.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이별은 정해져 있던 옷. 그리고 세 벌 모두 공교롭게도 각각 다른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패스트 패션 브랜드 매장에서 쇼핑하다 보면 내 취향을 오롯이 따져볼 수 있는 여유가 확연히 줄어든다. 일단 정신이 없다. 묘하게 마음 급하게 만드는 BGM, 같은 행어에 같은 옷을 줄지어 걸어놓은 풍경과 벽과 기둥을 차지하고 들어선, 소란스러운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화보… 이런 매장에만 가면 남들보다 특별해 보이고 싶은 욕망과 남들과 비슷해 보이고 싶은 욕망이 지저분하게 뒤엉킨다. 취향과 욕망을 구분할 수 없었던 시절엔 이곳에서 참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네이비 컬러의 슬리브리스 톱 

    입고 싶은 옷은 있지만 어울리는 아이템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날이 있다. 이런 날을 조심해야 한다. 룩의 조화고 뭐고 어떻게든 그 옷을 입어야겠다는 아집 하나로 고장 난 상태, 결국 입고 싶었던 옷이 돋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스타일도 아닌 참 별로인 차림이 완성된다. 집 나간 정신은 집 밖을 나와 가게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제자리로 돌아온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엔 늦은 이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새 옷을 사서 갈아입는 것(이제 이런 열정은 없다). 가장 쉽고, 빠르게, 부담 없이 이 미션을 수행할 수 있었던 만만한 장소가 바로 SPA 브랜드 매장이었다.

    곧 죽어도 새로 산 플리츠 스커트를 입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날도 그랬다. 왜 대체 여기에 형광 연둣빛 반팔 티셔츠를 입었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렇게 친구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 급하게 SPA 브랜드 매장에 들어가 네이비 컬러의 슬리브리스 톱을 샀다. 한 번 빨면 걸레가 될 것 같은 비주얼이었지만 야심한 밤 100m 밖에서도 보일 것 같은 형광 연두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 옷은 오늘 치 대행만 잘 수행해내면 그만이었다. 최악은 피하자는 절박한 마음. 형광 연두 티셔츠는 이 톱을 사며 받은 봉투에 집어넣고 신나게 놀았다. 네이비 컬러의 톱은 빨고 나니 정말 걸레가 되었고 여름에 집에서만 입는 옷으로 강등됐다. 나의 형광 연두 반팔 티셔츠는 버스에서 졸다가 옷 봉투를 두고 내려 영영 만날 수 없었다.

    호피 무늬 스키니 진

    이 바지는 졸업 전, 학교 앞에서 매장에서 시간을 때우던 중에 만났다. 평소 같으면 보지도 않고 지나쳤겠지만 유독 그날 내 눈에 들어왔다. 옷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덧대어보고 있는데 접신을 한 것처럼 한 장면이 내 머릿속에 펼쳐졌다. 이 스키니 진에 낡은 가죽 재킷을 입고, 가로등 밑 오토바이에 기대어 있는… 멋진 내 모습… (쇼핑 중 이런 생경한 장면이 떠오른다면 높은 확률로 매장 곳곳에 걸린 화보와 크게 틀어진 BGM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니 잘 생각하자). 그래서 홀린 듯 샀다.

    집에 가는 길, 머리에 전구가 켜진 듯 ‘반짝!’ 하고 떠올랐다, ‘아, 맞다! 나 오늘 제적 위기 통보 받았지!’. 내 손에 들어온 그 바지는 매장 내 정교한 연출과 대학생 주머니 사정에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 나의 스트레스가 합심해 만들어낸 ‘시발 비용’의 결과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예의상 한 번은 입어주었으나 그리 좋은 날은 아니었다. 친구들의 놀림도 놀림이지만 외출 내내 허리와 다리가 고문 수준으로 꽉 끼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기 위해 (힘겹게) 바지를 내린 순간만이 유일한 행복이던 외출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거의 곡예에 가까운 자세로 벗어야 했다. 그제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던 내 다리에는 팬츠의 재봉선 라인대로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나름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다. 화보에 현혹되지 말자, 스키니 진은 꼭 입어보고 사자, ‘시발 비용’을 조심하자, 학점을 잘 관리하자 등.

    블루 스트라이프 패턴의 드레스

    한때 모 연예인이 입고 나와 유행한 드레스가 있다. 블루 톤의 스트라이프 패턴이 새겨진, 보디라인이 훤히 드러나는 타이트한 핏의 미니 드레스였다. 인터넷으로만 보던 그 원피스를 친구와 쇼핑몰에서 놀다가 한 SPA 브랜드 매장에서 발견했다. 소매길이만 조금 다를 뿐 디자인은 그녀가 입었던 럭셔리 브랜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 한번 입어보고 싶었다. 내가 그 연예인을 딱히 좋아한 것도 아니었고, 그 연예인과 닮은 건 더더욱 아니었고, 평소 그런 스타일을 즐겨 입었던 것은 더 더더욱 아니었는데. 인터넷에서 좀 봤다고 낯을 덜 가린 걸까, 그런데도 사고 싶었다. 친구와 매장 피팅 룸 앞에 서서 ‘000, 물오른 성숙미 청순미 물씬~’ 같은 기사 제목과 함께 이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한 사진을 들여다봤다. 예뻤다. 사고 싶었다기보다는 사야 할 것 같았다. 그리 비싼 가격도 아니라서 고민하는 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이 옷을 입고 외출하면 늘 듣는 소리가 있었다. 첫마디는 “어? 이거 000 원피스 아니야?”, 그다음은 “잘 어울린다!”. 그 소리에 신나서 더 줄기차게 입고 다닐 때쯤 이 드레스를 산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점차 깨닫게 되었다. 한 계절에, 같은 동네에서 세 번 봤으면 말 다 했다. 처음엔 반가웠지만 두 번째에는 안 반가웠고 세 번째는 과장 조금 보태서 영화 <토이 스토리 2>에서 버즈 라이트이어가 마트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수백 개의 장난감을 마주한 장면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정도면 이 드레스는 이미 허니버터칩 수준으로 퍼져 있다는 이야기였다. 저 사람들은 000 연예인이 입었던 원피스라는 걸 알까? 몰랐는데 그냥 예뻐서 산 건가? 원래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나? 의문을 해결하진 못했지만 그 후로 더 이상 그 옷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더 반복하고 나서부터는 헤어짐을 점친 옷은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강렬한 유혹이어도 잘 사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함께 갈 옷만 사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게 됐다. 이제 내가 살 때부터 버릴 운명임에도 주저 없이 사는 유일한 옷은 팬티뿐이다. 한 장 한 장의 수명은 짧아도 영원히 함께할 운명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옷!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한 팬티는 미련 없이 보내고, 새 팬티는 욕망의 개입 없이 오로지 내 취향에 맞춰 골라 입는다. 그러니까 미련 없이 버리는 옷과 함께 2022년을 흘려보내고, 새로 산 팬티 같은 2023년을 맞이할 거다.

    에디터
    이소미
    포토
    IMDb,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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