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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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2023-01-09T10:21:51+00:00 2023.01.06|

HBO 시리즈 ‘나의 눈부신 친구(My Brilliant Friend)’ 스틸 컷

HBO 시리즈 ‘나의 눈부신 친구(My Brilliant Friend)’ 스틸 컷

2016년 여름, 나는 엘레나 페란테 열병에 시달렸다. <나의 눈부신 친구>(한길사)가 시작이었다. 책장을 펼치기가 무섭게,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단숨에 소설로 빨려 들어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무자비한 속도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페란테, 페란테로부터 최초의 생명을 얻었으나 어느새 페란테의 손길을 뒤로하고 소설에서 실제 자기 삶을 사는 나폴리의 여인들 릴라와 레누까지. 어느 쪽도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하고 치열해 무력한 독자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우정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두 친구 릴라와 레누의 60년에 걸친 관계의 역학과 감정의 동학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2016, 한길사)

나폴리 거리와 나폴리 사람들은 생생하다 못해 징그러울 정도로 살아 꿈틀댄다. 그뿐인가.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폴리를 나는 페란테 소설로 배우고 그려보기까지 한다. 세상의 온갖 어지럽고 야릇하며 복잡한 것들의 이면과 양면과 다면을 거침없이 빨아들여 신나게 휘젓고는 거친 숨으로 몰아쉬는 나폴리라는 무시무시한 생명체를. ‘나폴리 4부작’으로 불리는 페란테 연작의 한국어판 완역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며 이듬해를 넘긴 것 역시 즐거운 일화로 남았다. 애타게 다음 편을 기다리는 순순한 독자로 돌아가본 게 얼마 만이던가.

‘나의 눈부신 친구’, 페란테를 다시 만난다. 에세이집 <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2022, 한길사)으로 시작하는 새해다. 글쓰기, 특히 여성 작가로서 정체성을 ‘글과 작품으로’ 꾸준히 말해온 페란테가 전하는 글쓰기라는 충동, 글쓰기에 관한 철학과 역사다. ‘글과 작품으로’에 강조의 작은따옴표를 쓴 건 실제로 페란테가 그런 작가이기 때문이다. 나폴리 태생으로 해외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는 것 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엘레나 페란테는 이 이름조차 필명이다. 1992년 데뷔 이후 ‘오직 작품으로만 말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단 한 번도 대중 앞에 얼굴을 보인 적이 없다. 말한 그대로 살며 그저 쓸 뿐. 그러니 이 에세이집이야말로 ‘쓰는 사람’ 페란테의 본령에 가까울 게 분명하다.

엘레나 페란테 ‘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2022, 한길사)

네 편의 글이 실렸다. ‘고통과 펜’에서 페란테는 글씨 쓰기에 관한 최초의 기억으로 초등학교 때 사용한 가로세로 선이 그어진 공책을 떠올린다. 선을 넘지 않고 글씨를 써 내려가는 순응, 그것을 완수했을 때의 만족감, 주어진 선을 넘어서고 싶다는 강한 충동, 끝내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했을 때의 허무. 이 최초의 기억으로부터 페란테 글쓰기는 출발한다. 영감이 떠오른 첫 순간부터 손에 펜을 쥐고 글을 써 내려가기, “제어할 수 없는 흐름에 휩쓸려 글자를 자양분 삼아 또 다른 글자를 생산하는 순수한 감성”(p.40)에 이르기까지. 고통과 인내, 형식 너머의 형식을 만들려는 강렬하고 부단한 몸부림에 관하여. “어쩌면 저를 구원해준 것은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구원이라는 것이 실은 파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질서를 확립하려는 욕망의 이면에 살아남아 저를 휘청이게 만들고, 어지럽게 만들고, 실망하게 하고, 실수하게 만들고, 실패하게 만들고 주변을 오염시키는, 때때로 저를 이리저리 밀쳐대는 그런 힘이었을 겁니다./세월이 흐르면서, 제게 글쓰기는 반복되는 내면의 균형과 불균형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파편을 틀에 맞춰 정돈했다가 그것들을 다시 뒤섞는 과정의 연속이었죠.”(p.51~52)

@hangilsa

‘아쿠아마린’에서 페란테는 여성주의적 관점의 사회 이론가 아드리아나 카바레로의 <바라보는 타자와 서술하는 타자>(2000)를 우연히 다시 읽으며 크게 깨달은 것, 즉 ‘꼭 필요한 타자’라는 개념에 관해 서술한다. 이 시기 페란테는 <나쁜 사랑> 3부작을 마치고 연작에서 여성들이 작가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종의 유아론에 도취됐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물론, 덧붙여둔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저에게 진실을 전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였습니다. 그들이 유아론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제 이야기는 가식적인 이야기로 전락했을 겁니다.”(p.81) 전작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작가 세계를 유지하고 또 확장하기 위해 페란테는 ‘꼭 필요한 타자’의 의미에 몰두한다. ‘서로에게 꼭 필요한 타자에 관한 이야기, 심하게 뒤섞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못하는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p.91~92)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그 이야기는 <나의 눈부신 친구>가 되고 소설에서 릴라와 레누의 관계, 릴라와 레누가 쓴 글의 관계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타자’로 살아 움직인다.

‘역사와 나’에서 페란테는 세상 모든 작가의 모든 글이란 실은 과거 다른 이들이 쓴 글과 기나긴 역사에 빚진 것임을 피력한다. 특히 자신을 포함해 글을 쓰려는 여성에게 과거 유산의 상당 부분은 남성의 것이었다는 점을 말하며 여성 작가로서의 자아가 그간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었는지를 짚는다. “여성의 진실을 무시하는 나쁜 언어에 맞서, 우리의 재능을 융합하고 뒤섞어야 합니다”(p.137)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마지막 ‘단테의 갈비뼈’에 이르러 페란테는 단테를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언급하며 그가 창조한 베아트리체의 위대함을 말한다. 단테야말로 베아트리체를 통해 당대 사회가 침묵의 영역에 머물게 한 여성 존재에게 언어라는 은사와 지성을 향한 사랑을 부여함으로써 누구도 하지 않았고 또 못하던 일을 작품으로 해냈음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나는 엘레나 페란테에게 빚졌다. 올가, 델리아, 레다, 레누, 릴라에게도. 그녀들의 이름 뒤에 있는 수많은 이름 없는 이름들에게도. 등 뒤에 그들을 두고 다시 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