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토록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공간

2023.01.19

by 김나랑

    이토록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공간

    OPEN YOUR KOREA

    지난여름부터 〈보그〉가 여행해온,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공간.

    사유원, 경상북도 군위

    사유원은 고요 속에 머물며 마음을 내려놓는 곳이다. 리기다소나무길, 느티나무길 등이 가득한 숲, 자연과 동화된 건물을 거닐다 보면 긴장과 걱정이 사라지는 듯하다. 사유원에서도 유원(瀏園)은 한국 전통 정원으로, 설립자가 평생 모은 소나무를 정원 곳곳에 식재해 매화나무, 회화나무, 대추나무 등과 어우러져 선비의 기상을 표현한다. 유원 내의 사야정(史野亭)은 선조의 전통 방식에 기반해 만든 정자다. 설립자의 호를 따서 이름 지은 사야정은 한실과 마루 구조다. 마루에 앉으면 팔공상 정상인 비로봉이 보이고, 바람 소리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현대식 가죽 소파를 들였다. 전통 국악 공연을 위한 구조를 갖춘 사야정에서는 가야금, 아쟁, 거문고 등 현악 공연도 열린다.

    문경 세계명상마을, 경상북도 문경

    지난봄, 문경 봉암사 근처에 문경 세계명상마을이 들어섰다. 봉암사는 일반인에게 잘 개방하지 않는 천년 고찰이지만, 세계명상마을은 국적과 종교 상관없이 누구나 함께하는 ‘국민 참선방’을 표방한다. 8만4,000여㎡(약 2만5,000평) 부지에는 참선하는 방이라는 의미의 ‘선방’과 숙박하며 명상하는 ‘꾸띠’ 등이 자리한다. 우선 마당에 들어서면 희양산이 한눈에 펼쳐져 가슴이 탁 트인다. 토머스 한라한(Thomas Hanrahan) 미국 프랫대 건축학과 교수가 설계한 건물은 명상의 의미처럼 꾸밈없이 검박하다. 선방의 회랑(지붕이 있는 긴 복도) 마루에 앉아 바람을 쐬면 명상이 그리 어렵지 않다. 이곳의 각산 스님도 “누구나 와서 쉬고만 있어도 절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라 보탠다.

    서로재, 강원도 고성

    새벽 ‘서(曙)’ 이슬 ‘로(露)’ 집 ‘재(齋)’라는 이름에도 걸맞다. 강원도 고성의 한적한 마을 삼포리에 자리하며, 낮에는 가까운 해변을 따라 활기차게 드라이브하고 밤에는 고요한 숲 안에서 쉴 수 있는 숙박 공간이다.
    2022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한 카인드 건축사사무소가 설계했다. 표면에 물을 쏘아 거칠게 만든 콘크리트 건물은 소나무, 느릅나무와 어우러져 바위처럼 보인다. 이곳의 백미는 차실이다. 한국에서는 창을 단순한 창이 아닌, 풍경을 담는 액자로 보았다. 이 차경을 살린 공간이다. 가로로 길게 낸 창으로 소나무 절경이 펼쳐진다. 특히 해 질 녘이나 새벽녘에 왜 한국에 수묵화가 탄생했는지 알 것 같다. 이곳에서 강고운 공예가가 만든 다기에 지유명차를 즐겨보길.

    권진규 아틀리에, 서울 성북구

    2022년은 조각가 권진규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자소상을 만든 예술가로, 석고, 브론즈, 목각, 석조, 테라코타, 건칠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한국적 리얼리즘의 조형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100주년을 기념해 권진규 아틀리에에서는 여러 행사가 열렸다. 이 집은 1959년 권진규 작가가 직접 설계하고 2년에걸쳐 지었다. 집에는 조각가에게 필요한 물, 불, 흙, 가마를 들였다. 마당에는 우물을 파고 가마를 두고, 큰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업실 천장은 높이고 바닥은 흙을 다져 마감했다. 작업실 한편에는 몸을 누이는 작은 방이 딸려 있다. 방 사이즈와 유품을 보면 작가의 작은 체구가 짐작되어 그에게 이런 엄청난 작품이 나왔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마당에는 새와 동물이 노니는 부조가 있다. 작가가 가족에게 만들어준 것을 본떠 설치했다. 정기적으로 선발된 젊은 작가가 이곳에 입주해 작품 활동을 하며, 권진규 작가의 예술 세계를 이어받는다.

    서울여담재,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서울여담재는 여성 역사를 공유하는 공간이다. 근대 여성 역사 자료를 발굴하고 여성의 시각으로 해석, 구술, 기록하는 도서관, 교육 공간, 전시 공간 등이 자리한다. 특히 조명되지 않은 여성 개인의 삶을 재조명한다. 이곳은 원래 원각사라는 버려진 절이었다. 처음엔 이곳을 철거하고 새로 지으려 했지만, 과거 역사와 현대성이 어우러지는 방향을 택했다. 원각사의 건축 요소 중 지붕과 목재 기둥, 하부구조의 골조는 살리고, 그 사이로 유리 형태의 공간을 끼워 넣었다. 그리하여 한옥 지붕을 쓴 유리 박스 같은 독특한 형태가 완성됐다. 서울여담재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전시에 이어 1980~2000년대까지 여성 문화 운동을 조명하는 전시 <여성문화운동전: 우리는 함께 어디서, 어디로>를 2023년 2월까지 연다.

    북촌빈관, 서울 종로구

    북촌빈관은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을 조성한 정세권의 가옥을 개조한 한옥 숙박 체험 시설이다. 사라질 것 같은 한옥을 매입해온 서울시가 락고재에 위탁 운영 중이다. 북촌한옥마을의 언덕 끝, 높은 곳에 자리하다 보니 전망이 장점이다. 잔디 마당의 테이블에 앉으면 기와지붕이 물결처럼 켜켜이 이어진다. 1930년대에 지어져 회랑이 특징인데, 이를 따라 걸으면 남산, 광화문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미닫이문과 창문이 액자 구실을 한다.
    실내는 락고재 문화재단이 소유한 고가구에 현대 가구, 음향 시스템, 편백 욕조를 어우러지게 배치했다. 지하 1층은 지역 커뮤니티 센터 겸 카페로 운영한다. 커피를 팔지 않으니 이곳에서만큼은 자연스럽게 전통차를 가까이하게 된다.

    카페 온양, 충청남도 아산

    1978년 개관한 온양민속박물관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를 더하는 건축물과 정원만으로도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 김석철 건축가가 설계한 본관, 이타미 준 건축가의 한국 첫 프로젝트인 구정아트센터가 있다. 창고와 식당으로 쓰던 50m의 일직선 건물이 이제 카페와 전시 공간, 작업실이 어우러진 카페 온양이 되었다. 임태희디자인스튜디오의 임태희 소장은 평소 온양민속박물관의 ‘순수한’ 미에 끌렸기에, 카페 온양도 그러하길 바라며 설계했다. “최소한의 행위가 주는 충만함”이라 정의하며 조선 시대 막사발 같은 공간을 완성했다. 불필요한 것을 거둬내고 과장하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길게 뻗은 공간 한편에는 창을 내어 이곳의 진짜 주인공인 자연을 감상할 수 있고, 가운데는 온양의 상징인 온천 목욕탕이 연상되는 전시 공간이 자리하며, 카페를 지나 다른 한편에는 한지로 만든 작은 방을 두어 ‘정자’라 부른다. 한지라는 약하고 부드러운 소재를 써서 안락함을 줬다. 새롭게 만든 지붕의 물받이는 공예가 이윤정의 사슬 작품을 달아 박물관에서 가져온 바위로 연결했다. 공간, 공예, 자연을 하나로 묶은 시도가 아름답다.

    하동 한옥문화관, 경상남도 하동

    최참판댁에 올라서니 섬진강과 평사리 평야가 펼쳐진다. 뒤편에 하동 한옥문화관이 있다. 2021년 대한민국 한옥공모전에서 준공 부문 올해의 한옥대상을 받았다. 문화관를 위해 지은 기존 한옥 두 채는 맨 위에, 그 아래 구가도시건축이 설계한 숙박동과 관리동이 있다. 구가도시건축은 이곳을 “하이브리드 한옥의 조용한 실험”이라 일컫는다. 전통 한옥을 고집하지 않고 사용자의 편리에 맞췄다. 관리동은 “살뜰히 가족을 돌보는 엄마와 같은 공간, 포근한 환대의 공간”을 구상했다. 관리동에 들어서니 통창 너머로 대나무 숲이 펼쳐져, 마루에 있는 듯 안팎 구분 없이 시원하다. 홀은 중목 구조로 하고 대들보가 없는 대신 건물 전체를 기와지붕으로 덮어 한옥의 미를 살렸다. 숙박동 또한 사용자의 편리함과 전통 한옥을 중첩했다. 한옥문화관은 한옥과 담장, 오솔길이 어우러져 작은 마을 같다. 주변도 조용해 길을 따라 호젓이 걸으니 근심과 멀어지며 홀가분해진다.

    라드라비 아트 앤 리조트, 경기도 이천

    프랑스어 라드라비(L’art de la Vie)는 ‘인생의 예술’이란 뜻이다. 헤어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 이상일과 김인숙 부부가 꿈꾼 인생의 예술을 이곳이 실현했다. 마국산을 끼고 자리 잡은 33만㎡(약 1만 평)의 대지에는 아트 갤러리, 리조트, 레스토랑 등을 마련했다. 산, 바위, 나무, 계곡 어느 하나 들어내지 않고 그 사이에 건물을 지었다. 켜켜이 쌓인 바위는 손으로 다듬어 계단이 됐고, 야생화를 그대로 두어 인위적이지 않은 정원이 펼쳐진다.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한 한옥 서경루, 목단채, 산수채에서 분합문을 들어 올리면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처마는 앞산 능선에 끝 선을 맞춰 설계해 풍경이 온전히 들어온다. 이곳에서 바위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석조 건물의 갤러리가 나온다. 자연과 어우러져 또 하나의 거대한 바위 같은 이곳에선 상시 작품을 전시한다.

    설화수 북촌 플래그십 스토어, 서울 종로구

    전통과 현대가 공존할 때 더 가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믿음으로 설화수가 도산 플래그십 스토어에 이어 문을 연 공간이다. 건축사사무소 원오원 아키텍스의 최욱 소장이 참여해 1930년대 지어진 한옥과 1960년대 지어진 양옥을 하나로 연결했으며, 사이사이 아름다운 조경을 들였다. 약 300m의 동선을 따라 걸으며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발견하는 재미가 깊다. 기둥과 서까래, 지붕 원형을 그대로 살린 공간에 벽은 유리로 마감했다.
    공간의 초입에는 한지 바른 고즈넉한 방에 설화수 제품을 전시한다. 특히 좋아하는 공간은 양옥 위층의 커뮤니티 공간과 작은 정원이다. 빈티지 인테리어, 편안한 의자와 세련된 음악이 흘러 어느 신여성의 응접실을 방문한 기분이다.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최용준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