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꾸레주의 공상 과학적 퓨처리즘

2023.02.02

by 신은지

    꾸레주의 공상 과학적 퓨처리즘

    니콜라 디 펠리체가 꾸레주의 공상 과학적 퓨처리즘을 택했다.
    그는 글로벌 룩의 리듬을 잘 타고 있다.

    니콜라 디 펠리체의 두 번째 꾸레주 컬렉션인 2022 S/S 컬렉션.

    지난해 9월 꾸레주(Courrèges)의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디 펠리체(Nicolas Di Felice)는 이 프랑스 패션 하우스의 뉴욕 신규 매장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뉴욕에 오픈하는 두 번째 매장. 첫 번째 매장은 38년 전 폐점했다). 뉴욕 매장은 소호에 있었다. 디 펠리체가 최근 개조한 프랑수아 1가(Rue François 1er)의 오리지널 매장에서 영감을 받아 그곳을 완전히 초현대적인 화이트로 꾸몄다. 1961년 꾸뛰르 메종 론칭 후, 앙드레 꾸레주(André Courrèges)는 그의 반짝이는 비닐 재킷과 고고 부츠로 사실상 1960년대의 미래적인 멋을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하지만 활기 넘치고 수다스러우며 전혀 허세를 떨지 않고 잘 웃는 39세의 디 펠리체는 2020년 그 브랜드에 합류한 이래 꾸레주의 유산을 재해석하면서 자신의 많은 부분을 쏟아낸다. 그 예로 널찍하고 살짝 비스듬한 거울이 설치된 탈의실을 꼽을 수 있다. 디 펠리체가 고향 벨기에에서 자주 다니던 나이트클럽인 팔라디엄(Palladium)이 기반이 되었다. 그때는 발렌시아가, 그다음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 밑에서 수련하면서 보낸 파리에서의 삶이 조짐조차 보이기 전이었다.

    “화이트를 애용하던 것과 마음을 끄는 것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 힘들었죠.” 그가 안토니 바카렐로와 올리비에 테스켄스의 모교이기도 한 브뤼셀의 예술 학교 라 캉브르(La Cambre)에서 함께 공부한 동기이자 오랜 친구 베르나르 뒤부아(Bernard Dubois)와 함께 작업한 매장 인테리어에 대해 말했다. “꾸레주의 매장은 늘 이런 화이트 공간이죠. 그래서 저는 화이트에 정말 집착해요. 하지만 되게 친숙한 느낌을 주는 곳은 아니죠.” 디 펠리체의 해결책은 탈의실뿐 아니라 매장에 오는 사람들 누구나 앉을 수 있는 벤치였다. 따뜻함, 친밀함과 진정성의 추가는 그가 재해석한 꾸레주의 특징이 되었다. 그래서 그 브랜드는 확실히 쿨해졌지만 절대 차갑지는 않았다.

    디 펠리체는 이 패션 하우스의 매우 특별한 미적 유산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저 룩보다는 스타일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꾸레주에서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토탈 룩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이죠. 하지만 저는 그것과 믹스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왔습니다. 예를 들어 이 가죽 셔츠처럼 말이죠.” 새 매장에 걸린 셔츠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가죽만큼 청바지와 그것을 스타일링하는 것도 좋아하죠. 꾸뛰르만큼 워크 웨어에도 집착합니다.”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이것은 완벽성을 추구해야 하는 또 다른 분야죠. 모든 것이 적절한 재료와 적절한 디테일로 이뤄져야 하니까요.”

    빳빳한 일본산 폴리에스테르와 그래픽 리브 니트의 플레어 카펜터 팬츠가 그의 포인트를 잘 입증한다. 그것은 이 브랜드의 클래식한 비닐(현재는 식물에서 추출한 우레탄 70%를 사용하는 좀 더 친환경적 패브릭)로 만든 것을 한눈에 알아볼 만한 리에디션 재킷, 미니스커트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디 펠리체가 집착한 것은 또 있다. 바로 앙드레 꾸레주가 여성을 위해 만든 작품 상당수가 해방을 간절히 추구하고 투쟁하던 시대에 출시됐다는 사실이다. 디 펠리체는 “그것은 아주 중요한 사안이며, 바로 그의 작품에서 진정한 주제”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여성이 더 자유롭게 느끼게 하는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몇 주 후 파리에서 그가 그 사실을 2023년 봄 컬렉션에서 가장 염두에 두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컬렉션은 스쿠버, 서핑, 스트리트를 그 브랜드의 특징과 융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산호(실제로는 부드러운 촉감의 실리콘)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짧은 드레스, 오버사이즈 셔츠로 착용한 내구성 좋은 코튼 드릴 재킷, 크리스털 자수가 놓인 빛바랜 데님, 그리고 디 펠리체가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1974년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한 물결 모양의 톱과 드레스(오리지널 작품의 나선형 지퍼를 단추로 바꿨다)가 탄생했다.

    구조는 매우 기발했다. 입체적이고 몸을 둥글게 감싸는 듯 보였지만, 그가 스튜디오 바닥에 톱 하나를 내려놓자, 기발하게 재단된 평평한 패브릭인 것이 드러났다. “그의 작품이 입기 편했다는 점이 살짝 지워져 있죠.” 디 펠리체는 그 점을 선뜻 받아들여, 오늘날 자신의 소신대로 자신의 신체적인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을 느끼는 많은 젊은 여성으로부터 세대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매력 또한 세대를 초월하는 듯하다. “뉴욕에서도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파리에서는 엄마와 딸이 함께 쇼핑하죠.” 디 펠리체가 말했다.

    이 디자이너는 10년 이상 제스키에르와 만족스럽게 일한 후 꾸레주를 맡았다. 2008년 발렌시아가에서 인턴 생활을 하면서 그 스튜디오의 분위기와 치열한 직업 의식에 빠르게 발맞췄고, 여러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디 펠리체가 매일 입던 빈티지 라이더 재킷이 결국 발렌시아가 컬렉션에 포함되었고, 두 달간의 인턴십을 마친 뒤, 그는 단 며칠 만에 ‘다시 오라’는 부름을 받았다(짐도 미처 풀지 못했다). 템포가 딱 맞았다. “대도시에 비해서는 작은 곳인 브뤼셀에서 파리에 처음 갔습니다. 4년간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어요. 아주 활발한 학생이었고 부업으로 작곡을 했거든요.” 그가 웃으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파리는 여전히 놀라움 그 자체였다. 디 펠리체는 샤를루아(Charleroi)라는 벨기에 남부 도시 출신으로,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그 도시로 이주한 이탈리아인의 손자다. “검은 땅이라 불렸어요.” 그 도시의 중심이 되던 19세기 석탄 산업에 대한 이야기였다. “석탄 광산이 있었죠. 그래서 바람이 불면 석탄가루가 주택을 뒤덮어 온통 까맣게 보였죠. 가장 흉측한 도시라 불렸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정말 아름답고, 정말 강력한 곳이라고 할 수 있죠!”

    지금 그는 프랑스의 수도를 집이라 부르며, 남자 친구와 함께 뷔트 쇼몽(Buttes-Chaumont) 공원 근처의 360도로 도시 조망이 가능한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쉴 때면 집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고 밤에는 클럽에 다닌다. 그는 파티 같은 모임을 자주 열면서 꾸레주가 사교적이고 포용적인 패션 하우스로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레퓌블리크(République) 부근 실내 다층 주차장에서 열린 패션쇼 뒤풀이로 한가롭고 평온하며 재미난 만찬도 준비한 적 있다.

    그가 가족처럼 여기던 제스키에르와 그의 팀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경력과 삶에서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큰 도약이었다. 디 펠리체는 새로운 자리에 지원할 때 스케치를 많이 보내기보다 자신이 어디 출신인지, 누구인지 등 출신 배경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 “3페이지 정도 분량이었죠. 꾸레주에 관한 것은 단 한 단락에 불과했죠.” 그 패션 브랜드에 합류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사안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가 근사한 삶을 살았고, 저에겐 친구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꼭 아티스틱 디렉터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어요. 제 일생일대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끝에 활짝 웃으며 그가 말했다. “제가 진정으로 꿈꿔왔고, 지금도 꿈꾸는 것은 행복해지는 거예요.” (VK)

    에디터
    신은지
    Mark Holgate
    사진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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