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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정 누아르 ‘사랑의 이해’에 빠지다

2023.02.02

by 이숙명

    치정 누아르 ‘사랑의 이해’에 빠지다

    요즘 한국 드라마 중 가장 스릴 넘치는 작품은 <사랑의 이해>(JTBC, 넷플릭스)다. 이 드라마에는 형사사건도 없고 돌연변이 괴물도 없고 행패 부리는 방해꾼도 없다. 불륜은 스쳐가는 에피소드일 뿐 주인공들의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어떻게 사랑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서스펜스로 물들일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압축된 현실성에 기반한다. 12화가 끝난 현재 6각 관계로 발전한 연애 구조의 핵심은 계층 갈등이다. 배경도 아예 돈을 다루는 은행이다. 그 안에 빈농의 아들부터 성공한 사업가의 딸까지 여러 계층을 대변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연쇄 연애 관계를 맺는다. 대놓고 ‘돈이 연애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로 작정한 듯한 설정이다.

    JTBC <사랑의 이해>

    주인공 수영(문가영)은 가난하고 파탄 난 가정 출신으로, 가족과 연을 끊고 홀로 상경해 은행 서비스직으로 일한다. ‘영포점 여신’으로 불릴 만큼 빼어난 외모는 수영에게 오히려 독이다. 진지한 미래를 꿈꾸지 않으면서 한번 건드려보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파리 떼처럼 꼬이고, 그 파리 떼들은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공격을 일삼거나 스캔들을 꾸며내 수영의 평판을 오염시키고, 그러니 수영의 주변에선 소문과 질시가 끊이지 않고, 수영은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에세이스트 김현진은 ‘한국에서 돈 없고, 적당히 반반하고, 아버지가 힘이 없는 여성은 남자들이 막 대하기가 거의 공공재 수준’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수영의 현실이 딱 그렇다. 수영은 업무 능력이 뛰어나지만 대인 관계의 어려움은 정당한 평가와 보상, 그가 꿈꾸는 일반직 전환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물론 그보다 큰 장애물은 “우리가 대학 졸업장에 들인 ‘노오력’과 시간과 비용을 고려할 때 고졸과의 차등 대우야말로 공정한 게 아니냐”는, 즉 자신의 사적이고 자발적인 투자를 사회와 기업이 보상하는 게 마땅하며 학벌 투자는 다른 무엇보다 높은 이자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공정충’들의 생떼 카르텔이다. 수영에게 호감을 보이는 파리 떼도 그 카르텔 속에 있다. 수년간 이런 환경에 시달린 수영이 명문대 나온 일반직 은행원 상수(유연석)의 접근에 망설인 것도, 그에게 확실한 태도를 요구한 것도, 상수의 망설임을 확인한 순간 먼저 돌아서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관계에서 달아나기 위한 도피처로 기득권 카르텔 밖에 있는 청경이자 공시생 종현(정가람)을 선택한 것도 자연스럽다. 작중 수영은 가끔 연애 고수로 보일 만큼 과감하게 상수를 끌어당기고, 가끔 ‘제 팔자 제가 꼬는구나’ 싶을 만큼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수영의 이런 변덕은 “이 돈 먹고 떨어져”라며 뺨을 때리는 화끈한 악당이 없는 이 드라마에서 관계를 꼬는 핵심 요인이다. 하지만 그의 배경에 대한 섬세하고 리얼한 묘사는 수영의 변덕을 타당한 망설임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JTBC <사랑의 이해>

    섬세한 연출이란 이런 것이다. 수영의 집을 보자. 얼핏 현실보다 윤색된 것처럼 보인다. 구옥이나마 널찍하고 톤을 맞춰 구입한 가구와 침구, 식물, 책, 피아노로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서울에서 집을 구할 때 그는 넓은 구옥보다 좁은 신축을 권하는 중개인에 반대한다. 고졸 서비스직 월급으로 저런 집에 살다간 올겨울 같은 때 난방비 폭탄으로 거덜이 날 것이다. 저렇게 집을 꾸미고 사는 것도 무리다. 과연 종현에게 돈을 빌려줄 때 통장 잔고를 보면 수영의 선택 패턴이 보인다. 먹여 살릴 가족과 학자금 대출 없이 영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은행 정규직으로 수년을 일했으니 잔고가 그보단 더 있을 법한데 수영에겐 남은 게 거의 없다. 그는 저축 대신 자기 기준 ‘평범’을 경험하는 데 돈을 써온 것이다. 수영에게는 그 평범을 스스로의 힘으로 달성한다는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자기보다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들 앞에서 자존감을 유지하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실용보다 감성이 중요하고 성취감이 필요한 사람이니 자기가 꿀리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상수보다는 자기가 베풀 수 있는 종현과 연애하는 게 편하다. 이건 수영뿐 아니라 6각 관계에 휘말린 중심인물 대부분의 선택에서 드러나는 패턴이기도 하다.

    JTBC <사랑의 이해>

    JTBC <사랑의 이해>

    이 드라마의 주역들은 모두 ‘평범’을 원한다. 그들이 말하는 평범은 자기보다 조금 나은 형편을 가리키는 상대적 개념이다. 영점이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출발하는 종현에겐 영점의 수영이, 영점의 수영에게는 약간의 플러스 요소를 지닌 상수가, 상수에게는 그의 강남 동창들이 평범이다. 그들 모두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평범을 달성하고자 한다. 이 계층구조의 꼭짓점에 있는 미경(금새록)조차 부자 아버지의 도움 없이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통해 다른 부자 친구들과 스스로를 구분 짓는다. 물론 그들은 자신이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 미경은 부모의 재력 덕에 사내 정치로부터 자유를 얻고, 상수는 강남 동창들을 이용해 실적을 올린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자립이 곧 자존이라 믿는 사람들이다. 나눔이 당연하지 않은 사회, 재력이 정체성인 시대, 부부 간에도 내 것 네 것이 선명한 한국에서 돈 문제가 연인의 위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수영은 상수를, 상수는 미경을 밀어낸다. 부자와 결혼한 지점장, 오래 사귄 애인을 버리고 금감원 부원장 딸과 결혼한 상수의 동창은 세태에 순응한 쪽이다. 돈의 논리에 충실한 미경의 부모도 자신들만 허용하면 미경의 하향 연애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돈이 연애에 미치는 영향’ 탐구는 끝난 것 같다. 거기서부터 반전의 2막이 시작된다.

    문제는 이게 애정 얘기이고, 연인 간에는 여전히 권력 관계를 결정짓는 다른 강력한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상처받는다’는 고전 명제가 있다. 이 드라마의 숨은 연애 고수 경필(문태유)은 ‘남녀 관계에서 가장 무서운 건 도덕성, 안쓰러움, 연민, 절대 외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감정’이라 주장한다. 불륜 때문에 자식을 잃은 수영의 아버지는 그때 자신의 감정이 ‘막을 수 없는 것,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안정보다는 자극에 끌리는 게 청춘의 연애이고, 비련은 중독성이 강하다. 누가 알겠나 사랑이 뭔지. 사랑이란 결국 주인공들이 말하는 ‘평범’처럼 추상일 뿐이다. 주인공들이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려 할수록 그것은 더욱 강력한 힘으로 주인공들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막장으로 패대기친다. 제 딴에는 세태에 순응하는 단순한 선택을 했던 지점장과 금감원 부원장 사위도 치정 때문에 신세를 망칠 위기에 놓인다. 주인공들의 행동은 이제 이성에서 벗어났기에 예측 불가한 서스펜스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JTBC <사랑의 이해>

    결국 이 드라마는 세태를 이야기하는 듯하면서도 그보다 강렬한 인간의 본능을 들여다본다. 게다가 이건 공식대로 전개되는 온순한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다. 수영은 아버지가 바람피우다가 동생을 죽게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연을 끊고 그와 재결합한 어머니마저 등지고 산다. 시청자들은 그게 수영의 오해였다는 게 밝혀지고 가족이 재결합하는 휴머니즘 전개를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12화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불륜을 인정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드라마가 오점 없는 휴머니즘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인생의 패착을 묘사하는 쪽에 더 관심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시청자들은 아직도 수영이 원작 소설보다는 로맨스 드라마의 공식에 충실한 결정을 내려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글쎄, 이 드라마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것 같지가 않다. 사랑은 예측이 불가능해서 재미있는 것. 드라마도 마찬가지 아닐까.

    프리랜스 에디터
    이숙명(칼럼니스트)
    포토
    JTBC '사랑의 이해'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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