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봄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전시 #친절한도슨트

2023.03.02

by 정윤원

    봄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전시 #친절한도슨트

    지난 2 9일 국제갤러리에서 문을 연 현대미술가 홍승혜 작가의 개인전 <복선伏線을 넘어서 II(Over the Layers II)>의 풍경은 지난 몇 년 동안 미술계가 그리워한 그것이었습니다. 역대급으로 많은 기자들이 간담회에 참석했고, 국내외 미술 관계자들이 부지런히 오프닝 현장을 찾았습니다. 이번 성황은 국제에서 9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홍승혜가중견 미술가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중견이란 지위나 규모와 상관없이 중심이 되는 사람을 의미하죠. 물론 홍승혜가 현대미술 시장에서 대단히 뜨겁거나, 엄청난 명성을 떨치는 작가는 아닙니다. (세상엔 그런 작가들만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녀가 오래 후학을 양성했고, 후배들과 협업자들을 살뜰히 챙긴 동시에 독자적인 작업으로 한국 미술사에 의미 있는 챕터를 써왔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합니다. 

    홍승혜(b. 1959), ‘봄이 오면’, 2023, Archival Pigment Print, UV Print on Glass, Maple Wood Frame 50.7×40.7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홍승혜(b. 1959), ‘꽃이 피면’, 2023, Birch Plywood, Acrylic Latex Paint, 60×80×81.5cm, 160×5×1.5cm(1 Bar).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홍승혜(b. 1959), ‘콘솔/테이블’, 2023, Birch Plywood, Acrylic Latex Paint, 60×80×81.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홍승혜 작가의 작업 영역 한가운데는 바로유기적 기하학이 자리합니다. 전통 회화를 전공했지만, 캔버스만 들여다보기가 힘들었던젊은 작가홍승혜는 1987년 어느 날 컴퓨터에 내장된 기본 프로그램(그림판, 포토샵 등)을 활용해 픽셀로, 도형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 언젠가부터는 이렇게 탄생한 이미지를 모니터 밖 현실의 공간으로 꺼내어 평면, 입체, 영상, 가구, 건축 등으로 꾸준히 조형 언어를 확장해왔습니다. 자신만의 시각적인 원리와 규칙을 구축하는 이 핵심 개념을 홍승혜는유기적 기하학이라 명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27년 동안 유기적 기하학은 작가의 삶과 작업을 관통하며 일종의 고유명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홍승혜(b. 1959), ‘웨이브’, 2023, Archival Pigment Print, Maple Wood Frame 60.7×40.7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홍승혜(b. 1959), ‘꽃병’, 2023, Birch Plywood, Acrylic Latex Paint, 23×50×63.5cm(Vase), 160×5×1.5cm(3 Bars).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홍승혜(b. 1959), ‘모던 타임스’, 2023, Birch Plywood, Acrylic Latex Paint, 90.3×40×6.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복선伏線을 넘어서 II>는 유기적 기하학의 일종의 진화된 버전입니다. 자신이 만든그리드의 감옥에서 행복하게 작업했지만 한편 다른 세상을 꿈꿀 수밖에 없던 작가는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을 작업에 도입했습니다. 그다지 새롭지도 않은 이 프로그램이 작가에게는 그간 고수해온 사각형의 픽셀 세계를 전복할 수 있게 한 도구였습니다. 아마 전시장에 들어서면 알록달록 생동감 넘치는 도형들이 여러분을 맞이할 겁니다. 이 도형들은 평면 작업으로 펼쳐지기도 하고(1관 바깥쪽 공간), 가구나 조각 등의 입체로 구현되기도 하며(1관 안쪽 공간), 일종의 무대 자체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점진적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공간에서 유기적 기하학은 형태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나, 한결 자유롭고 솔직하게 펼쳐집니다. 

    국제갤러리 1관(K1) 홍승혜 개인전 ‘복선伏線을 넘어서 II(Over the Layers II)’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1관(K1) 홍승혜 개인전 ‘복선伏線을 넘어서 II(Over the Layers II)’ 설치 전경

    전시 제목인복선伏線을 넘어서 II’, ‘Over the Layers II’ 역시 유기적으로 탄생한 겁니다. 2가 있다는 건 1이 있었다는 이야기겠죠. 기본적으로 고전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주제곡 ‘Over the Rainbow’에서 차용했지만, 동시에 이 제목은 작가의 과거에서 길어 올린 것입니다. 홍승혜 작가는 19년 전인 2004년에 국제갤러리에서 <복선을 넘어서>라는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제목에 시즌 2의 연속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사실 갤러리와 오래 인연 혹은 우정을 맺어온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시도겠죠. 그리고 이 모든 건 작가가 과거를 돌아보고 이전 작업을 끊임없이 복기하는, 즉 회상을 매우 중요한 방법론으로 삼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홍승혜의 작업 세계는 지난 20여 년 동안, 아니 그 전부터 수많은 복선 혹은 레이어를 켜켜이 쌓아가며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의 복선과 지금의 복선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 그 너머의 무엇을 변함없이 꿈꾸고 있을까요. 관객인 제가 이런 질문을 품은 순간, 예술가의 작업과 삶은 다시금 만납니다. ‘유기적이라는 유연한 단어와 부동의기하학은 애초부터 이율배반적인 관계지만, 홍승혜는 평생 이 모순을 대면하고 인정하면서, 아마추어 정신을 발휘하면서 답을 찾아왔습니다. 유기적 기하학이 특유의 서정적인 느낌을 띠는 건 아마도 본질적으로 작가의 겸허한 태도 때문이 아닐까요.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이 도형의 세계에서, 작가는 나의 선택이, 내가 걸어온 길이 곧 나를 말해준다는 의외의 작은 교훈을 안깁니다. 

    국제갤러리 3관(K3) 홍승혜 개인전 ‘복선伏線을 넘어서 II(Over the Layers II)’ 설치 전경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다섯 쌍의 무용수가 춤추는 형상의 3관 작업은 낮과 밤, 언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느낌이 달라집니다. 작업의 주요 요소 중 하나로 각 작품을 천천히 비추며 돌아다니는 서치라이트 때문이죠. 그래서 갤러리는 3 19일 전시가 끝날 때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 8시까지 관람 시간을 연장했습니다. 시간에 따라 이 무대의 주연이 어떻게 바뀌는지,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느껴보시죠. 이른 봄, 그 봄밤에 썩 어울리는 전시가 될 겁니다.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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