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침입자, 마우리치오 카텔란

2023.02.28

by 김나랑

    침입자,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티스트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현대미술계의 침입자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잃어버린 저항을 상기시킨다.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하면 아마도 ‘바나나’ 작품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벽에 바나나를 덕트 테이프로 붙인 이 작품 제목은 ‘코미디언’(2019)이다. 2019년 12월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 바젤에 출품해 논란이 일었다. 금세 썩어 없어지는 바나나가 미술 시장에서 무슨 의미인가? 그러나 프랑스 수집가가 12만 달러(약 1억5,000만원)에 구입했다. 마트의 바나나는 1,500원이고, 카텔렌의 바나나는 왜 1억5,000만원인가? 그의 바나나는 현대미술의 집약체이기 때문이다. 카텔란의 별명은 ‘(소변기 하면 떠오르는) 마르셀 뒤샹의 적자’ ‘앤디 워홀의 나쁜 친구’ ‘요셉 보이스의 아우라가 떠오르는 사람’ 등이다. 당시 바나나는 데이비드 다투나라는 아티스트가 현장에서 먹어치웠고, 15분 뒤 다른 바나나를 붙였다. 이번 리움미술관 전시에서도 이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 도중 바나나가 상하면 다른 것으로 교체된다. “바나나 재설치가 쉬워 보여도 덕트 테이프를 붙이는 엄격한 매뉴얼이 있답니다. 각도가 어긋나선 안 돼요.” 리움미술관의 김성원 부관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홉 개의 조각 작품 ‘모두’(2007)가 설치된 리움미술관.

    지난가을 LA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만났다. 그곳은 베벌리힐스 호텔 루프톱에서 열린 샴페인 브랜드의 파티였다. 브랜드 관계자는 “세상에, 저기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와 있어요!”라며 나를 잡아끌었다. 007 제임스 본드처럼 딱 떨어지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카텔란이 샴페인 잔을 들고 이탤리언 직원(그는 이탈리아 태생이다)과 미디어에 둘러싸여 있었다. 파티가 그렇듯 웃고 농담하는 ‘스몰 토크’의 향연이었고, 나 역시 시차에 적응하며 분위기에 동참하려 애쓰고 있었다. 30분쯤 지나자 카텔란이 내게 “당신은 계속 지나치게 웃는군요”라고 말했다. 비꼬는가 싶었지만 그건 카텔란식 인사였다. 그의 작품 세계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본다면 그가 ‘안녕하세요?’ ‘반가웠습니다’라는 평범한 인사를 건네지 않을 것을 안다. 당시 그는 ‘코리아 리움’에서 전시를 연다고 말했다. 예기치 못한 소식이었다. 카텔란은 2011년 100여 점을 선보인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이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 후 개인전을 연다 해도 1~3점을 선보인 것이 다였다. 카텔란은 2016년 센강 변에 자리한 모네 드 파리(Monnaie de Paris), 2018년 상하이 유즈 미술관 전시 등 몇 미술관에만 큐레이팅 권한을 주고 있다. 38점을 선보이는 리움미술관 개인전 <WE>는 흔치 않은 기회다.

    왼쪽 작품 ‘무제’(1999)와 오른쪽 작품 ‘프랭크와 제이미’(2002).

    바나나만 붙이지 않았다. 덩치 좋은 남성을 벽에 덕트 테이프로 붙여 촬영한 사진 ‘무제’(1999)도 전시된다. 그는 밀라노에서 카텔란의 작품 거래를 담당하는 갤러리스트다. “카텔란이 그와 함께하기로 한 조건 중 하나가, 그를 벽에 붙이는 것이 있었어요.” 세상에, 카텔란!

    리움미술관의 로비 역시 작품 공간이 되었다. 카텔란은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로비부터 바꾸고 싶어 했다. 지하철이나 뒷골목처럼 기둥에 포스터를 붙이고 광고판을 설치했다. 현재는 엔씨소프트와 코오롱스포츠의 광고가 걸려 있으며, 추후 다른 브랜드로 교체된다. 1993년 카텔란은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을 광고 에이전트에게 팔아 향수 광고를 건 적 있다. 그의 생각, 시도, 파격이 곧 작품인 것이다.

    카텔란은 1960년생으로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미술계에 도발적인 시도를 해왔으며 스스로 ‘미술계 침입자’라 불렀다. 그에게 작품 세계를 묻는 것도 금기시된다. 이번 전시도 작가 본인이 작품 해설을 하는 ‘아티스트 토크’는 없다. 카텔란은 관람객이 어떻게 느끼느냐, 자신이 던진 작품에 어떤 토론이 벌어지느냐가 더 중요하다. 의외로 그의 작품 주제는 선명히 다가오는 편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는 카텔란의 대표작을 보자.

    ‘그’(2001)는 양복 입은 소년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면 히틀러의 얼굴이다. 스웨덴 미술관의 전시 제안을 받은 뒤 만든 작품이다. 스웨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이었으나 뒤로는 나치를 도왔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아홉 번째 시간’(1999)은 붉은 카펫 바닥에 운석을 맞고 쓰러진 요한 바오로 2세(당시 교황)의 모습이다. 당시 쿤스트할레 바젤에서 처음 선보일 때 종교계의 큰 비난을 받았다. 이젠 미술관이 가장 전시하고 싶은 작품 중 하나다. 이처럼 카텔란은 사회적 관행, 권위, 신념에 이의를 제기해왔다. 그의 작품은 당시 특정 사건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경찰 두 명이 거꾸로 매달린 ‘프랭크와 제이미’(2002)는 9·11 테러가 발생한 후 제작했다. 시신에 천을 덮은 것처럼 보이는 아홉 개의 조각 ‘모두’(2007)도 압도적이다. 이 작품을 보는 이마다 각자의 비극을 상기할 것 같다. 나 역시 최근 일어난 국가적 재난이 떠올랐다. 이번 전시명은 ‘WE’다. 그의 작품 방향은 언제나 우리 삶, 죽음에 관련된 것이었다.

    ‘아홉 번째 시간’(1999).

    ‘코미디언’(2019).

    ‘그’(2001).

     

    갤러리스트 마시모 데 카를로(Massimo De Carlo)를 덕트 테이프로 벽에 붙인 사진 작품을 보고 웃었다. 당신이 함께 일하기로 한 조건이 그가 벽에 매달리는 것이었다고. 미술계의 갑인 그가 주도권을 잃은 모습이 통쾌하기도 했다. 리움미술관 전시에서 당신이 까다롭게 요구한 것은? 갤러리 대표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존재다. 내가 마시모와 일하기 시작했을 때 사랑의 증거로 쉽지 않은 통과의례의 필요성을 느꼈다. 다른 갤러리 관계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믿으려면 예술이란 이름 아래 기꺼이 얼마만큼 행할 수 있는지 봐야 했다. 그리고 그게 먹혔다. 나는 여전히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뮤지엄 전시는 조금 다른데, 큐레이터와 만나 교류하지만 일생의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리움미술관에서 멋진 시간을 보냈다. 김성원 부관장이 내게 전권을 위임했고, 멋진 대화를 나눴다.

    방한하는 사흘 동안 노량진 수산시장 등 한국의 여러 곳을 다녔다. 한국에서 마주친 이미지나 사건 가운데 당신에게 영감을 준 것은? 혹은 기이하거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확실한 일반화지만, 한국 사람들이 포장과 짐 꾸리기에 쏟는 관심과 애정에 매료됐다. 나 역시 온라인에서 선물 포장 튜토리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SNS에 이번 전시 게시물이 넘쳐난다. 무엇이 당신을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나는 한 번도 내 작업을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인스타그램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내 작업을 이미지라고 생각해왔다. 아마 때때로 몇몇 이미지가 바이럴되는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 잘 기능하기 위해 이미지는 종합적이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충격적이어야 한다. 동시에 매우 훌륭한 작업(반드시 내 작업만 포함하진 않는다)은 우리 눈이 만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해야 한다. 표면과 깊이 사이에 형성되는 불편한 공간에 명작의 비밀이 있다. 꼭 공유량에 있지는 않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영감을 일으킬 수 있는 영속의 가능성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이야말로 작품을 소유하는 것이다.

    ‘모두’(2007)는 시신 아홉 구가 천에 덮인 듯 보였다. 16년 전 다른 장소에서 만들었지만, 나는 몇 달 전 한국 젊은이들이 희생된 참사가 떠올라 괴로웠다. 이것이 당신 작품의 힘인가 싶었다. 혹시 이것이 당신이 바라는 바인가? 불행히도 누군가 정확히 말한 적 있다. 죽음은 결코 유행과 멀어지지 않는다고. 죽음은 모두가 영향을 받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경험이다. 전시를 위해 ‘모두’를 택한 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러시아의 침략 전쟁으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다. 작품을 만들 당시 이태원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관객이 작품을 보는 동안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경의를 품을 수 있다면 뜻깊을 것이다.

    당신 작품은 특정 사회 이슈를 바탕으로 하거나 권력, 고정관념, 신념에 대항한다. 또한 토론을 야기한다.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그것이 예술을 하는 목적인가? 작품을 구상하는 동안 부분적으로는 개인적이거나 상징적일 수 있지만, 사회가 논의하길 바라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모든 예술 작품 또는 문학에서 예술가의 시야는 무척 한정적이다. 작업이 끝나고 관객에게 전달될 때 마법이 일어난다. 그때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고, 사회를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에 가닿기 시작한다. 예술은 이런 과정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수단이지만, 특정 의도에선 벗어나 있다.

    당신의 행보와 작품을 보면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당신이 두려운 것도 있나? 극복하는 방법은? 첫째 사랑. 둘째 엄청 많은 심리 치료사들. 알다시피 두려움은 우아한 무기다. 누군가 다른 이에게 두려움을 느끼면 손은 절대 피로 얼룩지지 않으니까. 또 효과적이다. 우리가 가진 동물적인 면에서 나오는 본능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한다. 동시에 두려운 채로 있는 것도 중요하다. 욕망과 더불어 두려움은 우리가 여기에 빚진 채 존재한다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언젠가 반환되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남자가 옷걸이에 매달린 ‘무제’(2000), 두 남성이 가지런히 침대에 누운 ‘우리’(2010), 전시장 바닥을 뚫고 나온 인물 ‘무제’(2001). 로비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소년 ‘찰리’(2003) 등의 작품 속 인물은 당신을 닮았다. 자신이 작품 배역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내가 작업에서 종종 자화상을 시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를 들어 경찰, 교황, 케네디는 모두 각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내게도 너무 많아서 궁극적으로는 도용 단계일 수도 있다.

    손가락에 펜이 꽂힌 아이가 등장하는 작품 ‘찰리는 서핑을 안 하잖나’(1997)를 보고 마음 아팠다. 당신의 유년이 중첩됐기 때문이다. 당신은 엄마에게 매를 맞고 10대에 돈을 벌러 다녀야 했다고 얘기한 적 있다. 유년에 트라우마가 생긴 이들이 많다. 그것을 극복하는 데 예술이 도움이 됐나?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나는 복수가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 문제와 연관된 트라우마를 받아들이기란 어렵지만 당신이 이룬 것, 그리고 당신을 둘러싼 사람들에 대처할 수 있게 돕는다. 나 역시 여전히 관계에 문제가 있지만, 나이 먹어가며 점차 나아지기를 바란다. 당연히 예술도 도움이 된다. 내게 예술은 몇 년간 치료제였다. 그렇지만 예술가가 되기 위해 트라우마를 가질 필요는 없다. 또 트라우마를 지녔다고 해서 예술가가 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아티스트 피에르파올로 페라리와 <토일렛 페이퍼>를 창간하고, 갤러리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작품 외에 준비 중인 프로젝트는?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 분야에 도전할 생각은 없나? 고아원을 만들고 싶다. 언젠가는 그러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다. (VK)

    포토그래퍼
    Pierpaolo Ferr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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