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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 이런 거 안 입었어요 #그 옷과 헤어질 결심

2023.03.03

by 이소미

    발리에서 이런 거 안 입었어요 #그 옷과 헤어질 결심

    전에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이곳에 입사하기 전 한 달 정도 여유가 생겼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중 열흘은 부모님과의 발리 여행에 쓰기로 했다. 셋이서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는 건 처음이었기에 일명 ‘바캉스 룩’이라고 부르는 과감한 옷도 샀다.

    다들 부모님과의 여행에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친구들의 후기만 들어도 그렇다. 지루했다면 다행이었다. 대체로 한 줄 평은 이랬다. 내 바닥을 봤어, 역시 엄마랑은 못 살아, 환장하는 줄 알았어 등등. 그나마 훈훈한 이야기라면 부모님이 많이 늙으셨다는 걸 알게 됐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도. 그마저도 씁쓸한 표정이 디폴트라 ‘훈훈하다’는 표현이 적확한지도 잘 모르겠다. 좋든 싫든 서로의 다름을, 세월의 흐름을 적나라하게 확인하게 되는 시간이란 것만은 확실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자 걱정부터 앞섰다. 그 전에도 함께 여행을 가봤지만 아빠와 오랜 시간 함께한 것은 30년 만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20년은 함께 살았지만 대체로 침묵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생사도 알리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틀어진 적도 있었다. 기이한 우연으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 우리는 각자 맡은 역할을 답답해하다가도 서로에겐 왜 맡은 역할에 충실하지 않느냐고 몰아세웠다. 생전 부모 자식 간에 발생하는 갈등의 총량이 존재한다면 그걸 다 써버렸다고 느꼈을 때쯤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가족 외식을 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전쟁이 그렇게 시시하게 끝났다.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게 뭔지는 몰라도,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그 부분만 건드리지 않은 채로.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발리는 발리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맞은 보송한 바람에 걱정은 싸그리 날아갔다. 도착한 숙소에서는 흥분 상태에 휩싸이다시피 했다. 예상보다 너무 좋아서 숙박비를 다시 한번 확인할 정도였다. 잘 가꾼 정원을 지나면 아담한 수영장과 정자가 있고, 전면 유리로 된 단독주택에서 그 풍경을 감상하며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에어비앤비 주인의 추천으로 간 유적지에서 아빠가 계단에서 굴러 갈비뼈가 부러지지만 않았다면 아마 열흘 내내 그 여유를 만끽했을 것이다. 상황은 상세하게 묘사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 이대로 아빠가 깊은 골짜기에 있는 아무도 없는 사원에서 죽는구나’ 했다. 아빠가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에게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발리에 다녀왔지만 발리가 어떤 곳인지 모른다. 발리의 병원만 안다. 그 뒤로는 쭉 숙소에만 있어야 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긴 휴가를 떠나온 아빠는 그곳에서 일어나지도, 눕지도 못했다. 한순간도 편안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의자에 쿠션을 기대고 앉은 어정쩡한 자세로 열흘을 보내야 했다. 자꾸 가래가 고여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엄마와 나는 아빠가 언제든 침을 뱉을 수 있게 종이컵을 옆에 두고 같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밥은 배달로 해결했다. 샤워도 하지 못해서 엄마가 밤마다 물수건을 적셔 아빠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괴로웠냐고 묻는다면 그 반대였다. 3일 정도 지나자 간호 루틴에 리듬이 생겼고, 나름의 놀 거리를 찾아냈다. 아픈 아빠는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아빠였고, 우리는 이제 막 친해진 사람들처럼 굴었다. 숙소 스피커에 블루투스를 연결해 서로가 평소 즐겨 듣는 음악을 참고 들어주었다. 그리고 가져온 책을 바꿔 읽었다. 아빠가 가져온 책은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 건다>였고 내가 들고 간 책은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빠가 몰래 담배를 피울 동안 엄마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망을 봐주기도 했고, 서로 라이터를 빌리는 신호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 시간들이 대단하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전처럼 서로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외면하거나 교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그래도 발리까지 왔는데 바다는 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바다가 있었지만 가보지 못한 터였다. 기어이 택시를 불러 아빠와 그곳에 갔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트 파티를 즐기는 식당에서 우리는 땀에 전 옷을 입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저녁을 먹었다. 아빠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세를 고쳐 앉기를 반복하며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제 그만 일어나자는 말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노을이 지는 걸 바라보며 우리는 담배를 피웠다. 노을은 주황색이었다가 빨간색이었다가 보라색이었다가 남색이 되었다. 발리의 노을을 보며 피우는 담배가 얼마나 맛있는지, 엄마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건 아빠와 나만 알 수 있는 기분이었다.

    아빠와의 관계를 고민했던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가끔 내 아빠가 아빠가 아니라 내 동생이었다면, 친구였다면, 자식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우리가 발리에서 잘 지낼 수 있었던 건 거기선 아빠가 아빠려고, 내가 딸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린 아마 앞으로 남은 시간에 아빠는 아빠여야 하고, 나는 딸이어야 해서 다시 결론이 나지 않는 전쟁을 여러 번 치를 것이다. 어느 순간엔 다시 기진맥진한 채 꾸역꾸역 함께 밥을 먹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또 함께 담배를 태울 차례가 돌아오겠지.

    당연히 모두가 작정하고 산 옷은 한번도 입지 못했다. 뻔해서 웃긴 아빠의 하와이안 셔츠, 지극히 엄마 같았던 에스닉 패턴의 원피스, 부모님과의 여행에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싶은 나의 보라색 튜브 톱 드레스! 버리지 말고 다음에 다시 왔을 때, 마음껏 밖을 돌아다닐 수 있을 때 꼭 입자고 했다. 한국에 돌아와 이곳에 입사하고 기사를 훑어보다가 이런 제목의 기사를 발견했다. ‘발리에 이런 거 입고 오지 마요’. 발리도 일상 공간 중 하나일 뿐이고 휴가 분위기에 들떠서 평소 입지도 않을 바캉스 옷을 골랐다간 서로 낭패라는 내용이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언젠가는 다시 발리에 가겠지만 그때는 아마 다른 옷을 입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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