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녜삐 데이, 호모 인터네티쿠스가 발리를 찾는 이유

2023.03.22

by 이숙명

    녜삐 데이, 호모 인터네티쿠스가 발리를 찾는 이유

    발리에는 녜삐(Nyepi)라는 명절이 있다. 자바 힌두력으로 새해 첫날이고 대개 양력 3월에 돌아온다. 녜삐에는 불, 소음, 외출, 취사가 금지된다. 공항은 문을 닫고 일부 지역에서는 인터넷과 전기도 끊긴다. 발리처럼 융성한 국제 휴양도시가 매년 1박 2일 동안 자발적으로 셧다운을 하는 게 가능한가 싶은데 그게 글쎄, 가능하다. 심지어 한번 겪어보면 이거야말로 발리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생각이 든다. 메신저 알림음에 노이로제가 있거나 하루 종일 SNS를 스크롤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운 사람들은 녜삐를 꼭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녜삐는 ‘침묵의 날’이라고도 불린다. 1박 2일 동안 완전한 어둠과 고요 속에 머물며 금식 명상을 하는 게 원칙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녜삐에는 전기, 수도, 인터넷, 데이터 통신이 아예 끊기곤 했다. 요즘도 누사페니다 같은 부속 섬에서는 그렇다. 수압식 물탱크 시스템을 갖춘 곳이 아니면 변기 물도 못 내린다는 의미다. 예외는 병원과 응급 환자뿐이다. 길에는 전통 경찰이 돌아다니며 외출 단속을 한다. 발리 본섬에서는 전기와 수도는 허용해주는 추세다. 인터넷은 차단이 원칙이지만 공급자에 따라 허용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불빛과 소음이 담을 넘어가면 안 된다. 당신이 호텔에 묵는다면 그 전날 직원이 초와 랜턴을 갖다주면서 암막 커튼을 절대 걷지 말라고 당부할 것이다.

    한국 직장인처럼 짧은 휴가를 빠듯하게 쪼개서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녜삐는 피해야 하는 날이다. 하지만 여유 있는 여행자에게 녜삐는 또 다른 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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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녜삐는 악령을 쫓는 날이다. 발리의 우기는 11월부터 3월까지인데 시원한 스콜 속에 모히토를 마시는 낭만적인 풍경은 여행자의 상상일 뿐이고 주민이 겪는 우기는 의외로 난폭하다. 비바람에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가 뽑히고 산이 무너지기 다반사다. 상수도가 갖춰지지 않은 지역에서는 수질오염으로 전염병이 발생하기도 쉽다. 그래서인지 옛 발리인들은 우기를 악령이 활동하는 시기라고 믿었다. 우기 말미이자 한 해의 마지막 날, 즉 녜삐 전날에는 악령을 쫓는 대대적인 의식이 펼쳐진다.

    녜삐 전날의 악령 퇴치 의식은 두 가지 장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나는 낮에 열리는 ‘멜라스티(Melasti)’다. 주민 대부분이 전통 복식을 갖춰 입고 거리를 행진해 해변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에는 전통 악대가 동원된다. 여러 종류의 타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얼핏 난해하게 들리지만 엄연한 규칙과 질서를 따라 자연스럽게 고조되면서 청중을 무아지경으로 몰고 간다. 또 다른 이벤트는 밤에 열리는 오고오고(Ogo Ogo) 퍼레이드다. 발리에는 과거 전염병을 일으키는 악귀가 나타났을 때 더 큰 악귀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쫓아냈다는 전설이 있다. 오고오고는 그 전설을 재현하는 행사다. 젊은이들은 자발적으로 대형 악귀 형상을 만들어 퍼레이드에 참가한다. 종이, 스티로폼, 페인트, 패브릭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재치 있는 조형물이 끝없이 등장한다. 발리의 행정, 상업 중심지 덴파사르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이 사누르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열리는 오고오고 퍼레이드가 가장 크지만 사실상 발리 전역에서 행렬을 감상할 수 있다.

    한 해 마지막 날의 떠들썩한 제례가 끝난 후 자정부터 녜삐가 시작된다. 광적인 열기와 소란에서 완전한 침묵으로, 섬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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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들은 여러 방식으로 녜삐를 보낸다. 발리에는 1박 2일쯤 답답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개방감 있는 풀 빌라가 많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단체로 이런 공간을 예약해서 음식을 잔뜩 사재기해놓고 프라이빗 파티를 즐기곤 한다. 이동이 제한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기묘한 심리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이날만은 애써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안정한 인터넷은 잠시 일을 미뤄둘 수 있는 완벽한 변명거리다.

    발리 고유의 방식으로 녜삐를 보내는 건 프라이빗 파티와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네트워크와 전자파에 바싹 튀겨진 호모 인터네티쿠스의 팝콘 뇌에 이만한 단기 치료가 또 있겠는가. 당신은 인공조명의 방해 없이 별을 볼 수 있다. 거리의 고요는 바람과 잎새와 풀벌레가 내는 소리에, 나아가 당신 내면의 소리에 더 집중하게 해준다. 디지털 디톡스의 필요성은 점점 강조되지만 도시에서 일하면서 무턱대고 휴대폰 사용 시간을 줄인다는 건 헤비 스모커가 하루아침에 담배를 끊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음식을 사재기하는 대신 금식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솔직히 현대인은 너무 많이 먹는다. 녜삐가 많은 것이 금지되는 불편하고 지루한 날이 아니라 개인의 자제력으로 불가능하던 디톡스를 가능하게 해주는 날이라 생각하면 1년에 한 번씩 발리를 방문해 그 불편 속에 자신을 던져 넣을 이유는 충분하다. 녜삐 기간 발리를 여행하게 된다면 당신은 회사에 휴가계를 제출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어떤 호출도 먹히지 않을 테니 각오하라는, 오래 상상만 하던 속 시원한 선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호환, 마마가 두렵지 않은 시대를 산다. 이 시대의 악귀는 끝없이 당신을 호출하는 스마트폰에, 낯모를 사람들의 무책임한 악의와 멍청한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에, 모두의 삶이 부대낄 만큼 밀착하는 SNS에, 세상의 원리를 납작하게 일반화하고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TV 속에 있다. 힌두가 아니라 자본과 물질문명을 종교처럼 숭상하는 우리에게도 악령을 퇴치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새로운 미래를 다짐하는 녜삐가 필요할지 모른다. 1박 2일의 짧은 의식을 치르고 대문을 나서면 당신이 아는 발리, 즉 모던과 전통과 자연이 어우러지고 온갖 액티비티와 쇼핑이 가능한 열대 휴양도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보다 완벽한 휴가가 또 있으랴.

    올해 녜삐는 양력 3월 22일이었고, 2024년 녜삐는 3월 1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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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 Images,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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