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계에서 더 완벽한 조각?
조각은 디지털 세계에서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아티스트 배리 엑스 볼의 도전은 적어도 조각의 영역을 넓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형상화해 선보인 NFT 작품도 그중 하나다.
조각이란 무엇일까? 지난 2월 16일부터 19일까지 열린 ‘프리즈 로스앤젤레스 2023’에서 만난 아티스트 배리 엑스 볼(Barry X Ball)의 작품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세계적인 조각가인 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조각을 NFT(대체 불가 토큰, Non-Fungible Token) 미디어 아트로 구현해 ‘프리즈 로스앤젤레스’의 LG OLED관에서 선보였다. 교황의 얼굴은 시리즈마다 금부터 사파이어까지 다양한 원석의 수많은 곡선으로 이뤄졌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에서 ‘메탈(Metal)’ 시리즈를 공개했고, 올해는 여기에 사운드를 입힌 새로운 ‘메탈’ 시리즈와 ‘스톤(Stoen)’ 시리즈를 선보인 것이다. ‘스톤’ 시리즈는 방해석(Golden Honeycomb Calcite), 옥, 루비, 사파이어로 표현된다. 이들 소재는 강도나 가격 때문에 현실에서는 섬세한 감각으로 구현하기 어렵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을 디지털 세계에서 이뤘달까. LG OLED TV 안에서 돌아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얼굴을 보면서 이 작품도 조각으로 분류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손으로 직접 돌을 깎고 만지는 전통적인 조각법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배리 엑스 볼은 스스로를 ‘전통적인 조각가’라 수식한다. 디지털 기술을 사용한다고 해서 작품이 작가의 손과 영감을 거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영역을 병합함으로써 새로운 조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디지털 기술을 쓴다고 작업 시간이 덜 걸리는 것은 아니다. 한 작품당 보통 수천에서 1만 시간이 소요된다.
배리 엑스 볼은 NFT 작품을 선보이기 훨씬 전인 1980년대부터 디지털 스캐닝, 버추얼 모델링, CNC 밀링 등의 방법으로 조각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수많은 명작에 둘러싸여 지내다가 이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재창조해보리라 결심한다. 기존 작가의 작품을 디지털 스캐닝과 같은 현대 기술력으로 새롭게 구현해내는 것이다. ‘프리즈 로스앤젤레스’에서 NFT 작품과 함께 전시된 ‘Perfect Forms’도 그중 하나다. 미래주의 작가로 불리는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의 ‘Unique Forms of Continuity in Space’(1913)는 수많은 작가들이 오마주해왔다. 배리 엑스 볼은 이전에 없던 디지털 방식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는 “움베리토 보치오니가 미래지향적 조각을 추구했기에 제 작품 역시 그와 뜻을 함께하고 있죠”라고 말했다.
35년간 조각을 해오면서 보유한 데이터 때문에 그는 NFT 작업을 여러 번 제안받았다. 하지만 용납할 만한 기술력을 가진 업체가 없어 수년간 거절한 끝에 LG와 손잡고 NFT 작품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작품을 만들 당시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한 뒤였기에 실물을 스캔하진 못하고 그의 이미지 수십만 장을 모았다.) 그의 작품은 ‘LG 아트랩(Art Lab)’에서 구입할 수 있다. LG 아트랩은 LG TV의 NFT 예술 작품 거래 플랫폼이다.
이 아티스트가 프리즈에서 만났으니 조만간 브루클린에 있는 작업실에도 오라며 <보그>를 초청했다. 20여 명의 직원, 80여 개 조각 작품이 쉴 새 없이 만들어지며, 작업 공간과 갤러리, 디지털 연구소 등이 자리한 2,000에이커의 현대 조각 공간이다. 그에게 미래 계획을 묻자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80여 개 조작품을 동시다발로 제작하며, 올해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아제르바이잔에 설계한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에서 개인전을, 내년에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역사적인 명소에서 전시를 연다.
스스로를 전통적인(Traditional) 조각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방법은 전통에서 한 단계 나아갔다. 3D 스캐닝, CNC 밀링 등의 기술을 사용했고, NFT 조각품도 선보였다. 기존 조각에서 어떤 한계를 보았기에 이런 시도를 한 것인가?
조각이란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를 비롯해 브루클린에 있는 스튜디오의 팀원들 모두 조각을 전공했으며, 손으로 조각하고 석고로 모델링한다. 이런 전통적인 구현 방법에서 디지털을 병합해 좀 더 정교하게 만들고, 조각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고자 한다. 전통성과 최신 디지털을 병합할 때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디지털의 가치를 발견한달까.
현대 ‘조각’을 정의한다면?
디지털을 사용한다고 전통성이 지워지거나 대체되지 않는다. 그 둘이 병합해 배가되기도 하고, 서로 섞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디지털이 전통적인 방법보다 빠를 거라고 여기는데, 굉장히 오래 걸리고 품이 많이 든다. 보통 한 작품을 만드는 데 수천에서 1만 시간이 든다. 이전까지는 혼자 하느라 꽤 애를 먹었는데 이제 20여 명의 팀원이 나를 돕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스튜디오는 정말이지 쉴 틈 없이 돌아간다.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프로그램이 나오기에 나보다 이를 잘 아는 인재도 계속 필요하다. 물론 나도 과정 하나하나를 꿰고 있어야 한다.
베네치아의 명작 사이를 걷다가 ‘이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작품화하면 어떨까?’란 생각이 디지털 조각의 출발이라고 들었다.
1982년부터 르네상스 시대 작품을 바탕으로 나만의 조각을 해왔다. 1992년 베니스에서 수많은 명작을 관람하면서, 그것으로 완전히 다른 명작을 만들어내는 것이 작가로서 새로운 시작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현시대 기술을 동원해 구현하고 싶었다. 그렇게 1995년 즈음 3D 스캐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3D 스캐닝이 가능한 곳은 미군 부대와 할리우드밖에 없었으니 새로운 시도이긴 했다.
자신의 머리부터 스캐닝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 요소를 빌린다면 선과 각도를 더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완전한 곡선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조각가인 내게 곡선은 영원한 바람이다. 디지털이 어느 정도 구현할지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 실험 대상이 내 머리였다. 20초 동안 비명을 지르면서 스캔을 했다. 입을 크게 벌리면 두상이 더 동그랗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20여 년 전 ‘비명을 지르는 자신’을 보여주었다.) 잘 찾아보면 이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NFT 작품에도 소리치는 내 얼굴이 들어 있다.
곡선에 집중하는 이유는?
내가 “이 커브 굉장하지 않니? 커브가 움직이는 모습이 멋지지 않니?” 같은 말을 자주 내뱉는다고 한다(웃음). 캘리포니아에서 22년, 뉴욕에서 45년을 살았다. 1960년대 팜스프링스로 가족 여행을 가서 노란색 페라리 디노를 보았다. 조종사셨던 할아버지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차를 좋아했지만, 그중에도 디노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당시 각이 진 미국 차와 달리 섹시한 곡선으로 이뤄진 이탈리아 차였다. 커브에 대한 내 이상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훗날 페라리 측에서 ‘Perfect Forms’를 보고 나를 초대했는데 우연히 디노와 재회해 무척 기뻤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에서 ‘메탈’ 시리즈를 선보였고, 이번 프리즈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그것과 ‘스톤’ 시리즈를 새롭게 선보였다. 실제 조각 작품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형상을 NFT 작품으로 만들면서 어려웠던 점은?
수년 전부터 요한 바오로 2세를 조각해오면서 관련 디지털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미 수많은 시간을 투자한 상태여서 NFT화는 어느 정도 수월했다. 게다가 메탈은 내가 평소에도 즐겨 사용하는 소재다. 2012~2015년 모나코 알베르 2세를 형상화한 조각도 메탈이다. 당시 이탈리아 주얼리 브랜드 다미아니가 골드와 실버를 코팅하는 기술을 제안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만들던 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조각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고, 바로 작업했다.
신작 ‘스톤’ 시리즈는 루비, 사파이어, 옥, 방해석으로 선보인다. 현실에서는 조각하기 어려운 소재여서 NFT 작품으로서 가치를 더한다.
골드, 실버는 쓰면서 왜 루비, 사파이어 같은 원석은 사용하지 않는지 사람들이 묻곤 했다. 보석과 광물의 굳기를 나타내는 모스 경도에 따르면, 가장 부드러운 것이 1이라면 다이아몬드는 10이다. 단단하면 기계로는 잘 깎이지만, 부드러운 원석은 가공하면 으스러지기 쉽다. 루비나 사파이어도 현실적으로 섬세하게 조각하기 어렵다. 값도 비싸고. 나는 늘 이 원석의 오렌지, 블루, 레드 색상을 조각에 담고 싶었다. 아름답고 원초적인 색상이니까. 이번 NFT 작품에서는 그것의 투명성과 반투명성을 기술력으로 구현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LG, 에이전시 NIA와 팀원들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두 시리즈 모두 음악이 새롭게 들어갔다. 종교음악처럼 성스럽게 시작하다가 록 무드로 변환된다. 그렇게 설정한 이유는?
성가대에서 어머니가 피아노를 치셔서 나도 자연스럽게 배웠고, 후에 록에 빠져 기타를 꽤 쳤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록이라는 좋아하는 두 장르를 합쳐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NFT 작품 감상에서 그 색과 정교함을 온전히 담아내는 매체도 중요하다. ‘프리즈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최신 OLED TV로 송출됐다. 작품을 구입한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감상할 수도 있는데 아쉽지 않나?
어느 정도 안타깝지만, 그래도 요즘 사람들이 쓰는 웬만한 전자 제품은 고사양이라 괜찮다. 무엇보다 관객이 즐겨준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
‘프리즈 로스앤젤레스’ 첫날, 이 작품을 구입하는 관객을 봤다. 스마트폰을 켜고 가상 세계에서 결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나의 실제 조각품은 10만 달러대다. 하지만 NFT 시리즈는 1,000달러대에 구입할 수 있다. 장벽을 낮춰 더 많은 이가 작품을 즐겼으면 싶었는데, NFT가 하나의 해결책이 돼주었다. 좀 더 여유가 있다면 작품을 더 선명하게 감상할 수 있는 매체를 사용하면 좋겠다.
당신은 늘 새로운 기술과 매체를 찾는 ‘전통적인 조각가’다. 또 도전하고 싶은 것은?
새로운 뭔가를 하기는 무리가 있다. 지금 스튜디오에서 이미 80여 개 작품을 동시에 제작하고 있다. 막 시작한 것부터 마무리되어가는 작품까지 다양하다. 작품 외에도 이를 전시할 좌대를 만들고, 돋보이게 할 조명을 제작하는 등 부수적인 일도 많다. 이 하나하나가 내겐 도전이다. 다만 기술과 영감 모두 매일 한 단계씩 발전했으면 좋겠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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