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YKYK: 데본 턴불
팬데믹 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리빙 아이템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임스 체어, 바실리 체어, 북유럽 브랜드의 조명이 불티나게 팔렸고 공간을 채우는 스피커로도 관심이 옮겨갔죠. 오프라인 콘서트에 갈 수 없으니 가성비 좋은 스피커부터 몇천만원을 호가하는 프리미엄 스피커까지, 그 어느 때보다 질 높은 사운드에 대한 욕구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패션 마니아들에게 현장 사운드와 가장 비슷한 효과를 내는 고급 음향 장비 하이파이(Hi-fi) 오디오는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패션계에서 원하는 ‘멋’이 없었던 거죠. 이 시장을 보기 좋게 파고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오디오 메이커 데본 턴불(Devon Turnbull)입니다.
그의 오랜 협업자이자 친구 버질 아블로는 팬데믹이 시작된 후 그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너의 시대는 지금부터야. 곧 엄청나게 뜰 거야.” 미래를 몇 수 앞서 예측하는 버질의 말대로 데본의 스피커 브랜드 오자스(Ojas)는 좋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쿨한 스타일을 바탕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며 갤러리와 미술관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하이파이 오디오도 빈티지 가구처럼 뭐든지 쉽게 사고 버릴 수 있는 시대에 꽤 불편하지만 알면 알수록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장르입니다. 중장년층의 취미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을 넘어 이젠 모든 연령대로 오디오필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디지털 스트리밍 시대에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LP 열풍이 부는 것처럼 말이죠. 데본은 젊은 세대가 곧 하이파이 오디오로 눈길을 돌릴 것을 예상했습니다.
2020년 4월을 기점으로 데본은 자신의 브랜드 오자스의 홈페이지와 리테일 숍을 통해 커스텀 스피커의 상용화 버전 ‘아트북 쉘프 스피커(Artbook Shelf Speaker)’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팬은 전 세계적으로 늘어났고 5,000달러를 훌쩍 넘는 가격이지만 매번 품절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1979년 뉴욕에서 태어난 데본 턴불은 현재 오디오 제작자, DJ, 아티스트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그는 자신이 제작한 커스텀 오디오를 에이스 호텔과 슈프림 매장에 설치하는 것은 물론 사운드 디자인까지 맡았습니다. 바이레도 창립자 벤 고햄, 뉴욕 퍼블릭 레코즈, 포토그래퍼 타일러 미첼, 음악가 후지와라 히로시, 래퍼 나스 등 음악과 패션 신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 그의 오디오를 설치할 만큼 큰 애정을 보여왔습니다. 한국에서도 스트리트 웨어 편집숍 하이츠나 데이토나 레코즈 같은 곳에 그의 스피커가 설치된 걸 볼 수 있죠. ‘Sound Sculpture’, 자신이 만든 스피커를 사운드가 담긴 조각 작품처럼 여기길 원했던 그의 바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 드디어 빛을 발했습니다.
데본 턴불이 지금 패션계가 원하는 걸 예리하게 파악한 데는 2003년 친구들과 함께 론칭한 브랜드 놈 드 게르(Nom de Guerre)의 영향이 컸습니다. 당시 <W> 매거진 에디터, 스투시의 스토어 매니저, 마크 제이콥스 직원들로 구성된 공동 창립자와 함께 만든 브랜드로 패션 신에 반향을 일으켰죠. 브랜드를 운영하던 시절 데본은 일본과 파리에 종종 출장을 갔는데, 이는 일본과 파리의 오디오필 문화에 영감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0년 브랜드는 운영을 중단했으며, 이후 데본은 자신만의 오디오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오브제로 만들어야겠다는 더욱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데본을 둘러싸고 비평의 목소리도 간혹 들립니다. 누군가는 스피커 브랜드 JBL의 부품을 쓰며 사용자가 DIY로 조립해야 하는 스피커가 수백만원씩 하는 건 ‘겉멋’이라고 말하기도 했죠. 하지만 자신의 패션 브랜드를 론칭한 적도 있는 그의 패션 신에 대한 높은 이해도, 자연스럽고 쿨한 마케팅 능력, 스피커뿐 아니라 케이블과 앰프, 진공관까지 생산하는 전문성은 구매에 합당한 이유를 더합니다. 게다가 실제로 음악을 업으로 하는 전 세계 뮤지션들이 그의 브랜드를 좋아하고 지지하니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수표가 있을까요.
작년 데본 턴불은 뉴욕 리손 갤러리(Lisson Gallery)에서 자신이 설계한 사운드 시스템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리스닝 전시, ‘음감회’를 열었습니다. 재즈를 취급하는 블루 노트 레코즈, 클래식 음반사 도이체 그라모폰의 LP처럼 베이스와 미드 레인지를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음악 장르를 그의 스피커를 통해 경험할 수 있었죠. 클래식을 좋아하는 장년층부터 패션을 좋아하는 젠지 학생까지, 청취자의 연령대는 다양했습니다. 데본은 직접 갤러리에 출근해 청취자들에게 각 앨범이 현대음악에 미친 영향, 스피커의 재질과 디자인, 진공관의 원리까지 알려주며 음악을 듣는 경험을 몇 단계나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정진해온 스피커를 아우르는 음악이라는 장르에 얼마나 진심인지 엿볼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올해에도 데본 턴불의 영향력은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얼마 전 뮤지션 아미네와 DJ 겸 프로듀서 케이트라나다 듀오의 신곡 ‘4EVA’ 뮤직비디오에 데본 턴불의 아트북 쉘프 스피커가 등장했죠. 패션 디자이너 헤론 프레스톤은 댓글로 “오늘날 문화적으로 가장 유의미한 스피커”라고 칭송했습니다. 지금 당장 오자스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 아직 국내에 정식 유통처는 없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국내 일부 패션 스토어에서 오자스의 스피커를 직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주목하는 그 스피커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한걸음에 달려가보시길.
‘If You Know You Know’ 는 많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패션계에서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는, ‘알 사람은 아는’ 인물에 대해 탐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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