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 포인트

시간에 관한 아주 사적인 이야기

2023.05.16

by 류가영

    시간에 관한 아주 사적인 이야기

    그리움과 두려움, 무력감 혹은 해방감. 시간에 관한 개인적 화두를 품고 살아온 필자 4인이 영화 속 시간에 얽힌 어지러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고유시(Proper Time)’, 가변 크기, 668개의 시계, 2017. 전 세계 1,200명을 인터뷰하고 얻은 데이터로 완성한 이완 작가의 작품. 시간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흐른다는 메시지를 표현했다.

    타임 루프의 지독한 고단함

    그런 영화가 있다. 수차례 봤더라도 어느 날 문득 다시 봤을 때 미처 닿지 않았던 생각과 심상으로 나를 데려가는 영화. 이런 신선한 감각은 매일 멍하니 올려다보는 방 천장의 빛바랜 얼룩을 발견하는 것과는 다르다. 지금 보고 있는 영화 장면과 대사는 과거에도, 다시 보게 될 숱한 순간에도 늘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럼 천장의 얼룩처럼 뭔가 달라진 건 내 쪽인데, 뭐 그렇다 치자. 그런 영화적 경험을 최근 맞닥뜨렸다는 얘기를 하려는 참이니까.

    얼마 전 멀티버스 소재를 기상천외하고 끝내주게 변주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시상식 시즌을 휩쓸었다. 그 여파인지 영화 채널에선 공통분모를 지닌 작품이 빈번하게 보였다. 그런 연유로 세상에 나온 지 10년도 더 된 <소스 코드>를 다시 봤다. 제이크 질렌할이 주연한 SF 영화인데, 똑같은 상황이 진절머리 나도록 반복되는 타임 루프와 당시 영화적 소재로 생소하던 평행 우주 설정을 응집한 수작이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미군 헬기 조종사인 주인공은 무슨 영문인지 열차에서 정신을 차리고, 이내 생판 모르는 남자의 얼굴을 한 자신을 발견한 것도 모자라 열차가 폭파되면서 밀폐된 캡슐에서 다시 깨어난다. 알고 보니 열차 내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그는 테러 발생 8분 전의 평행 세계에 반복해서 투입되는 중이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던져지듯 말이다.

    오랜만에 본 <소스 코드>는 몇 번이나 봤던 <소스 코드>와는 뭔가 달랐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는 쥐뿔도 달라진 게 없는데 다른 맥락과 관점이 두드러져 보였다. 거듭 똑같은 시간대에 놓이는 주인공은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는 와중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내동댕이쳐지고 열차 폭발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속수무책의 연쇄.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테러를 막고야 만다. 특히 모든 전말을 파악한 주인공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세상을 구하는 장면은 꽤 폼이 난다. 카타르시스가 치고 올라온다. 그런데 최근 다시 보면서는 연출보다 주인공의 고단한 얼굴과 허둥대는 마음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해피 엔딩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똑같은 상황이라 해도 그는 우르르 실패를 반복한다. 실패의 딱지가 아물기도 전에 실패를 거듭한다. 시곗바늘처럼 그렇게 제자리를 맴도는 모습이 새삼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누구나 지나간 시간에서 못 빠져나오고 머뭇거릴 때가 있다.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놓아주지 못한 채 사그라지지 않는 아쉬움, 미련, 한탄으로 속절없이 바라보는 거다. 만약 시간을 틀어 원하는 때로 돌아간다면? 그때 풀지 못한 일들을 해결하게 될까? 글쎄다, <소스 코드>를 보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다. 주인공은 예습 복습하듯 수차례 반복해서 같은 시공간을 겪으면서도 원하는 답을 쉽게 거머쥐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가 결국 사람이 똑같아서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절반 이상 흘러갈 때까지 주인공은 줄곧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태를 보이며 막무가내로 덤벼든다. 그게 발목을 잡는다. 조금씩 진전을 보이기도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영화의 흐름에 변화가 찾아오는 건 어떤 에피소드를 통해 주인공이 각성하듯 마음가짐을 교정하고 나서다.


    안타깝게도 영화 밖에선 그런 드라마틱한 순간이 흔치 않다. 우리는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미련과 몽상이 부질없음을 절절히 깨닫게 된다. 더 말해 뭐할까 싶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줄이면 딱 이럴 것이다. ‘썰물처럼 왔다 간 지난 시간은 그런대로 흘려보내자, 그러면 인생이 편안해진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말은 나부터 절절히 새겨들어야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만약에’라는 돋보기로 과거를 들춰 보고, 그 안에서 애꿎은 가능성을 찾으려 하며,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가두고 몸부림치는 게 지금의 나란 사람이니까. 그래서 어쩌면 지금 이 영화가 전과는 다르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처음 봤던 시절의 나는 이런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는데… 꼭 이런 식이다. 과거 타령이 또 고개를 든다. 김영재 프리랜스 에디터

    시간으로부터의 해방

    제목은 모른다. 배우가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강렬하게 내게 파고들어 평생의 이미지로 남은 영화 한 편이 있다. 그 영화를 본 건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KBS <토요명화>를 통해서였을 거다. 주인공은 늙는 걸, 살 떨리게 두려워하는 여자다. 젊음에 대한 여자의 집착은 광적이다 못해 병적일 정도이고, 그 욕망 덕분인지 여자는 놀랍게도 세월의 중력을 견딘다. 늙어가는 지인들과 달리 홀로 탱탱한 피부를 유지하는 여자. 그러나 그 욕망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절정에 이른 어느 날. 그녀의 머리가 순식간에 하얗게 세어버리고 피부도 쭈글쭈글하게 변한다. 평생에 걸쳐 일어날 노화가 단 몇 초 만에 일어난 것이다. 여자는 거울을 통해 한순간에 늙어버린 자신과 마주한다. ‘악!’ 자기 모습에 자기가 놀라서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 평생 늙음과 사투를 벌여온 여자의 가장 비참한 최후였다.

    줄거리로 요약해 말하니 상당히 괴상하게 느껴지는데, 한순간 늙어버린 여자의 이미지는 어린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물음을 남겼다. 인간은 왜 늙는가. 기껏 태어나놓고 왜 또 죽는가. 늙음과 죽음에 관여하는 시간은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인 건가?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며 죽기 싫다고 밤마다 울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는데, 조숙했다기보다는 상상력이 과도한 아이였던 탓이 크다. 그렇게 시간과 죽음은 내 삶의 화두가 됐다.

    영화 기자로 활동하며, 시간의 법칙을 거스르는 작품이나 인물을 편애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령, 날고 기는 마블 캐릭터 중 <닥터 스트레인지>의 빌런 케실리우스(매즈 미켈슨)에 끌린 이유가 그렇다. 존재감 없다고 평가받은 캐릭터이긴 했으나, 내겐 달랐다. ‘세계 최강은 나’라고 우기는 악당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족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나름의 논리를 지닌 악당이었기 때문이다. “우릴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적은 시간이야. 시간은 모든 걸 죽이니까”라는 케실리우스의 대사를 지금도 종종 떠올린다. 그의 말대로 시간 앞에서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 사랑도 젊음도 모두 흩어지니까.


    잘은 모르지만, 소설가 마크 트웨인 역시 ‘늙음’이 삶의 후반부에 찾아오는 인간의 삶이 불행하다 여겼던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80세로 태어나 18세를 향해 늙어간다면 인생은 무한히 행복하리라.” 그런 마크 트웨인의 말에 영감을 받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역노화’를 겪는 남자에 대한 독특한 단편을 한 편 썼고, 훗날 데이비드 핀처가 그 단편을 각색해 영화로 만들었다. 짐작하겠지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다.


    생로병사가 우리와 반대로 흐르는 남자 벤자민(브래드 피트). 80세 노인의 몸을 지니고 태어난 벤자민은 시간이 흐를수록 중년으로, 청년으로, 어린아이로 역주행한다. 그런데 마크 트웨인의 의도와 달리 그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 심지어 벤자민은 거꾸로 작동하는 시간을 형벌로 느낀다. 왜?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와 자신의 시간이 연신 엇갈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이 그래프가 아래로 하강하며 점점 회춘하는 벤자민과 상승하며 점점 늙어가는 데이지가 접점에서 만나 서로에게 온전히 열정적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둘만의 화양연화가 지나고 시간이 다시 엇갈리면서 두 사람의 사랑도 시험에 든다. 등에 검버섯이 나고 피부 탄력도 잃은 데이지가 뽀얀 광채를 내뿜으며 침대에 잠들어 있는 벤자민을 보며 짓던 슬픈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데이지와 헤어진 후 홀로 세상을 떠돌던 벤자민은 청년기를 보내고 소년기를 거쳐 유아기에 당도해 치매에 걸리면서 다시 데이지 품에 안기는데,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의 은유 같기도 하다. 여하튼 영화는 시간을 되돌린다고 영생의 삶을 사는 건 아니라고, 신생아로 요람에서 죽음을 맞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첨언하는 듯하다. 늙어가는 것 자체가 불행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갈 수 없는 것이 형벌이라고. 그러고 보니, 영화로 수도 없이 변주된 그 유명한 브램 스토커의 고전 <드라큘라> 역시 영생이 징벌처럼 그려지곤 했다.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저주라니. 물론 이 겸허한 자연의 이치를 행복이라 생각하기엔, 나는 여전히 가는 세월이 무섭다. 정시우 영화 기자

    멈춘 시계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시계지만,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건 고장 난 시계다. 잘 돌아가던 시계가 어느 날 멈췄을 때, 건전지를 갈아줘도 통 움직이지 않을 때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느낀다. 그 시계를 처음 그 자리에 둔 날로부터 오늘날까지, 스타카토처럼 시간을 끊어 보던 나에게 시간의 덩어리를 던지는 기분이다. 망가진 시계를 보면 항상 그랬다.

    대체로 아무 생각 없이 곁에 두고 있다가, 망가지거나 먼지 쌓인 시계를 보면, 내가 무감하게 보던 시간의 흐름이 한 번에 정산되어 날아든다. 그것은 케케묵은 냄새를 풍기고 씁쓸한 맛을 낸다. 흘러버린 시간을 감각한다는 것은 그렇다. 나아감과 동시에 무언가를 지나치고 있음을, 새롭게 만나는 것들 뒤에는 내가 잊고, 버리고, 두고 온 것들이 있음을, 그 시간을 되찾는다고 해도 나는 이미 그 시간을 통과했으므로 다시는 그때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감정을 가장 잘 느끼게 한 영화로, 나는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시리즈를 이야기하고 싶다. <토이 스토리>는 움직이는 장난감을 소재로 아이들에게는 꿈같은 판타지를 보여주고 어른들에게는 잊고 있던 유년의 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소년 앤디의 친구들. 가장 아끼는 카우보이 인형 우디부터 우주를 지키는 버즈 라이트이어, 누구나 집에 한 번쯤 두었을 공룡 인형 렉스와 눈이나 팔이 마구잡이로 빠지는 포테이토 부부 등 장난감들은 인간이 없을 때 그들만의 모험을 펼친다. 한국인의 추억 속 장난감과는 결이 사뭇 다르지만 우리는 그것이 ‘장난감’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숙함을 느껴 쉽게 마음을 연다. 장난감들이 자동차에 매달리거나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 가는 모습은 유쾌하고 즐겁지만, 이 시리즈는 어른들의 눈물을 훔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토이 스토리 3>, 애니메이션의 인물들은 영원하다는 공식을 깨고 우리의 소년 앤디가 커버렸다. 대학에 진학한 앤디는 어느 순간부터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았고, 장롱 속 상자, 침대 밑, 책장 뒤에 우두커니 놓인 인형들은 앤디가 자신을 찾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린다. 시간의 흐름이 먼지처럼 장난감 위에 쌓인다. 그러다 앤디 엄마의 실수로 탁아소에 기증되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우디가 앤디를 다시 만나기 위해 위험천만한 여정을 펼친다.


    우디의 절절함은 우리가 잊어가고, 또 잃어가는 어린 시절의 따뜻함과 같다. 그 온기다. 그 온기로 만들어진 시간의 덩어리가 앤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를 보며 우리가 눈물을 훔치는 이유는 우리에게도 우디가 있었고, 그것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으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 멈춰버린 시간을 본 후에야 우리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있고, 흘러간다는 것은 언제나 아쉬움과 미련을, 그리움을 동반한다.


    영화를 본 후에도 우리는 우디가 영원히 앤디를 그리워할 것이라는 걸 안다. <토이 스토리 4>는 그런 우디에게 또 다른 주인을 만들어주지만, 우디는 앤디를 잊을 수 없다. (앤디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이 깨달음은 한동안 잊고 지낸 어린 시절 나의 가장 친했던 친구를 보고 싶은 막막한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한 번만 더 그 시절로 돌아가 그 친구와 놀고 싶다. 그게 가능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나온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그렇게 고장 난 내 친구를 떠올리는 것이다. 케케묵은 냄새와 씁쓸한 맛을 느끼며. 천선란 소설가

    공간에 새겨진 시간

    기억 속의 시간은 정확히 고정되지 않는다. 마구 뒤엉킨 탓에 그것을 회상하는 시점에 따라 달라진다. 유년기의 기억은 더욱 그러하다. 일기를 쓰지 않는 한, 그때의 기억은 시간 없이 창문 너머 실루엣으로만 남아 있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이미지는 그때 정을 붙인 장소 정도다. 일곱 살 무렵이었나, 나는 한동안 집 건너편에 있던 북한산을 공룡산이라 불렀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1993)을 본 날부터였다. 그날 새벽 티라노사우루스가 북한산에서 나오는 악몽을 꾸었고 내 몸만 한 이빨을 보고는 오줌까지 찔끔했다. 언제 일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계절감마저 흐릿하다. 그후 공룡산(북한산)은 나의 유년기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기억을 떠올릴 때 우린 가장 먼저 시간을 거슬러가지만 결국 실마리가 잡히는 것은 특정 공간을 포착했을 때다. 나에게 유년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건 1993년이란 시점이 아니라 북한산인 것처럼. 많은 사람이 ‘인생 영화’로 꼽는 찰리 카우프만의 <이터널 선샤인>은 그런 관점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아직 제대로 된 연애 감정을 경험해본 적 없는 중학교 3학년의 나에게 이 영화는 로맨스가 아닌 SF 영화처럼 느껴졌다. 헤어진 전 애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지운 것에 분노해 주인공 조엘은 마찬가지로 기억을 삭제해주는 회사 라쿠나로 찾아간다. 하지만 마음먹은 것과 달리 마취 상태의 조엘은 그녀와의 기억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박사가 기억을 삭제하려 할 때마다 그에 저항한다. 조엘의 뇌 속에서 공간은 책 페이지가 넘어가듯 훌훌 넘겨진다. 책방, 기차, 몬턱 바닷가, 침대… 그가 발 닿는 공간마다 특정 기억이 재생된다. 조엘의 돌파구는 기계를 피해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것.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으려고,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이 깃든 공간을 지켜내려고 그는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영화는 다행히 추억을 지켜내기 위해 공간을 사수하는 조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온갖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계에 의해 모든 기억이 사라진 조엘은 어느 날 문득 낯선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다시 클레멘타인이다.


    영화 주제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따로 있다. 부끄러운 기억 속으로 들어간 조엘이 숨으려 애쓰는 장면이다. 어린 시절 괴롭힘 속에서 억지로 새를 죽여야만 했던 공터, 어머니를 피해 숨은 탁자 아래, 야한 만화를 보고 자위를 하다가 들켰던 수치스러운 침대 등 조엘이 바로 그곳으로 클레멘타인을 데려가 부끄러운 시간을 고백하는 장면은 사랑스럽다. 조엘은 사적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온전히 열어준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짧고 강렬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 ‘아방튀르(Aventure)’는 모험과 동의어다. 연인과 함께 세상 곳곳을 누비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란 뜻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는 ‘흠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다. 연인과 헤어진 후 속세와 단절하고 수녀가 된 여인의 마음을 다룬 알렉산더 포프의 시에서 착안했다. 클레멘타인이 계속 기억을 지우기 위해 노력할 거라는 비극적인 암시가 서린 서글픈 제목이지만, 연인이 함께한 공간과 거기에 새겨진 흠결 없는 마음으로 인해, 특정 장소에 얽힌 비밀스러운 시간으로 인해 그 세계는 영원한 햇빛으로 드리워진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가 오가던 공간을 자주 소개하는 편이다. 최근 여자 친구에게 석사 논문을 쓸 당시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방문했으나 아쉽게 문을 닫은 단골 돈가스집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평소 사람 없는 카페에서 시나리오를 쓰곤 하는데 영화가 개봉하고 난 뒤에 들르면 사라져 있다”라는 봉준호 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공간에 얽힌 소중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라졌지만 언제나 그 장소에 머물러 있을 시간이다. 김경수 영화 평론가 (VK)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