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한국 SF 유감

2023.05.17

by 이숙명

    한국 SF 유감

    ‘택배기사’ 스틸

    5월 12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택배기사>는 기대와 달리 조용히 묻히는 모양새다. 김우빈이 뛰어난 존재감을 발휘했고, 야외 활동이 여의치 않은 미래에 택배기사가 중요한 직업으로 떠오른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하지만 설정을 풀어가는 방식이 아쉽다. 민중을 혐오하는 재벌은 가뜩이나 한국 영화, 드라마의 단골 소재라 진부하다. 세상을 그 지경으로 만든 인류 전반의 문제나 시스템에 대한 비판도 없이 재벌집 망나니 아들 한 명의 과욕으로 문제를 몰고 가니 이야기가 싱겁다. 디스토피아 상황에서 인간이 느낄 공포, 긴장, 상실은 무데뽀 긍정왕 사월(강유석)의 좌충우돌을 그리는 동안 가볍게 휘발되고 만다. 달라진 환경에 따른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극악한 상황에서의 생존력, 적응력, 행동 방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돌아보게 만드는 통찰이라도 있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코미디든 드라마든 깊이 파서 정서라도 감응시켜야 했다. 하지만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니 인물들의 매력마저 떨어진다. 난민 연쇄 실종 사건의 실마리는 너무 쉽게 드러나서 긴박감이 없고, 천명그룹의 타깃이 된 사월이 택배기사에 도전한다고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활동하는 건 개연성이 없다. 공들인 비주얼도 신선도가 떨어진다. 택배기사들이 사막화된 서울에서 질주하는 모습은 <매드 맥스>의 간소화 버전처럼 보인다. 자기 일상의 공간이 폐허로 바뀐 걸 보는 서울 사람에게나 흥미로울 비주얼이다. 이 작품의 문제는 결국 야심 찬 설정에 못 미치는 진부하고 작은 이야기, 빈약한 디테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근 한국 SF에서 반복되는 문제다.

    ‘승리호’ 스틸

    <택배기사>가 디스토피아 배경 반재벌 영웅담이라면 <승리호>는 우주를 배경으로 ‘천만 영화’풍 농담과 눈물 한 방울 공식을 적용한 가족극이었고 <인랑>은 미래 한국 배경 청순 멜로였다. 새로운 배경 위에 익숙한 장르, 익숙한 줄거리, 익숙한 캐릭터, 익숙한 대사를 입힌다. 두 레이어가 잘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배경 레이어를 지우고 플롯만 보면 매력은 더 떨어진다. 반재벌 영웅담, 코믹 가족극, 청순 멜로라는 측면에서 일련의 작품은 응당한 정서적 반응을 끌어내는 데 실패한다.

    ‘고요의 바다’ 스틸
    ‘그리드’ 스틸

    <고요의 바다> <그리드> <정이> 등은 그나마 SF적 상상력을 서사에도 적극 활용한 작품이다. 기존 해외 SF 영화, 드라마, 소설을 섭렵한 관객은 진부하다고 느낄지 몰라도 한국 드라마, 영화에서는 처음 시도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들 작품도 아쉬움이 남는다. <고요의 바다>는 물 부족에 시달리는 지구, 달 탐사 기지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등 흥미로운 설정을 담았다. 제작비를 떠나 세계관은 가장 컸고, 배두나의 섬세한 연기 덕분에도 작품이 고급스러워 보인다. 미스터리 스릴러로서 분위기도 훌륭하다. 촬영, 세트, 조명 등 기술적인 요소에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인물들이 달 표면에서 유영하는 초반 장면부터 과학적 고증이 무너지면서 작품에 신뢰가 옅어지고,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 인물들이 많아서 후반으로 갈수록 피로감이 든다. 주요 캐릭터 몇몇은 인류의 생사가 걸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에 탐사선을 보낼 때 상식이 똑바로 박힌 결정권자라면 가장 마지막에 선택할 것 같은 인물들이다.

    <그리드>는 태양풍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한 방어막 ‘그리드’를 탄생시키고 사라진 미지의 존재 ‘유령’이 24년 만에 나타나면서 시작되는 미스터리 타임 루프물이다. 저예산으로 큰 아이디어를 다룰 수 있는 훌륭한 설정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 톤이나 연출이 균일하지 않고,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주인공 개인의 한풀이로 축소되면서 중언부언하고, 내용 전달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드라마 ‘정이’ 스틸

    위의 작품이 큰 도화지를 펼쳐놓고 작은 그림을 그린 격이라면 <정이>는 적당한 사이즈의 그림판에 적당한 사이즈의 그림을 올리고 배경을 충분히 활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인간과 인간형 로봇을 대비해 인간성의 본질을 묻는 건 SF 팬이 아니어도 익숙할 정도로 흔한 설정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최소한의 세트, 인물, 사건으로 간결하게 주제를 풀어나가서 분위기와 개연성, 전달력을 확보했고, 매력적인 주인공을 만들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자신이 로봇임을 모르는 로봇, 나이 든 딸과 과거에 박제된 어머니의 특별한 관계 등 설정을 다양하게 활용한 점도 영리했다. 하지만 애초에 오락적으로 잘 만든 소품 정도가 야심의 한계였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관객은 <승리호> <고요의 바다> <정이>를 거치며 한국 SF의 비주얼은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건 최근 SF 붐이 남긴 큰 수확이다. 하지만 조지 루카스와 제임스 카메론과 리들리 스콧의 영화를 보고 자란 관객에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처럼 화려한 볼거리와 강렬한 메시지, 눈물 펑펑 나는 드라마와 유머가 다 들어 있는 완벽에 가까운 블록버스터가 나오는 마당에, 이 정도로 승부를 걸기는 어렵다. 극장이 아니라 OTT용 소품이라도 마찬가지다. 지금으로선 아이디어 한 줄에 기대 기존 한국 영화 드라마투르기와 캐릭터, 정서, 메시지를 느슨하게 재활용하는 SF 드라마, 영화보다 차라리 K-팝 아이돌 기획사들이 세계관을 구축하겠다고 영상화니 예산이니 안 따지고 막 던지는 정신 나간 시나리오가 더 흥미로울 지경이다.

    결국 중요한 건 이야기다. 좀 더 과감하게, 야망의 크기에 부합하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택배기사’ 스틸
    포토
    Courtesy Photo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