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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2023.05.19

by 정지혜

    각각의 계절

    뭉뚱그려 계절이라고 하지 않고 애써 하나하나를 떼어내 ‘각각’이라고 하는 섬세하고 사려 깊은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연이어 있는 ‘ㄱ’이 뾰족하거나 답답해 보이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모서리가 실은 굽이굽이 이어진 세월의 길목이 되어 그 각진 틈에 말하지 못한 누군가의 진의가 소록소록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괜스레 애달파진다. 살면서 우리는 그런 퇴적층의 안쪽을 몇 번이나 들여다볼까. 그런 게 있다는 걸 알아채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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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바른 여름이 봄을 덮치는 이때, 권여선의 신작 소설집 <각각의 계절>(2023, 문학동네)을 펼친다. 작가는 책에 독자에게 보내는 손 편지를 동봉해 책 제목의 연유와 이 책에 흐르는 목소리—부를 땐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불렀던 너무 일찍 도착한 누군가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덧대어뒀다.

    ‘살면서 보니, 어느 시절을 살아내게 해준 힘이 다음 시절을 살아낼 힘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다음 시절을 나려면 그 전에 키웠던 힘을 줄이거나 심지어 없애거나 다른 힘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힘은 딱 그 시절에만 필요했던 것인데 계속 그 힘으로만 살려고 하다 추해지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죠. 우리가 한 생을 살아내려면 한 힘만 필요한 게 아니라 각각의 시절에 맞는 각각의 힘들, 다양한 여러 힘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권여선 ‘각각의 계절'(2023, 문학동네)

    여기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이 각각의 계절을 나고 있을 당신에게 각각의 힘이 돼줄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글은 각각의 방식으로, 과거를 거쳐 현재로, 지금 이곳에서 그때 그곳으로, 지금을 거쳐 언젠가가 될 미래로 오가며 그 언저리를 더듬댄다. 여기에서는 사뭇 진중한 태도 하나가 엿보인다. ‘어째서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은 것인가’에 관한 덧없는, 하지만 할 수밖에 없는 질문. 그럼 우린 매번 후회만 하고 살까? 매번 후회만 하고 살아. 우린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 태연한 듯 단호한 이 문답법을 나는 첫 번째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에서 배웠다. 화자 ‘나’는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인 20대 시절 절친한 친구들과 떠난 1박 2일 여행의 기억을 떠올린다. 숙소에서 발견한 커다란 사슴벌레 한 마리. 방충망도 있는데 이렇게나 큰 벌레가 대체 어디로 들어온 것일까?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친구 정원의 물음에 주인이 답한다. “어디로든 들어와.”(둘 다 p. 21) ‘어디로든’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디로든’을 ‘모든 곳’이라고 다시 쓸 수 있다면, 그럼 그것은 여기도 저기도 다 들고 나는 문이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이 되는 걸까. 그렇기에 반대로 생각하면, ‘어디로든’은 도무지 어디로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손쓸 수 없고 속수무책인 상태인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너무 절망적이고 허망하고 난감한 일이 아닌가. 무엇이 됐든 ‘사슴벌레는 이미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없이 자명하다. 이미 벌어진 일, 어디로든 왔으나 어디로인지 알 수 없어 어디로도 나갈 수 없는 상태, 그 지경.

    그럼 어쩌나. 이렇게 끝나도 괜찮은 걸까. 폐색의 고리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나마 우리가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오직 폐색의 상태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로, 자기 자리를 잊지 않는 일로, 긴 세월 끝에 비로소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일로만 가능하다. 마지막 단편 <기억의 왈츠>는 그것에 대해 완강하게 말한다. 화자는 동생 부부와 교외의 한 식당을 찾았다가 40여 년 전 자신이 이곳에 누군가와 온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낸다. 어째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까마득히 잊고 살았을까 싶은 바로 그 순간,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과, 그때는 미처 볼 수 없던 사태의 한 조각과 마주하게 된다. 잊고 지내고 알지도 못한 채 지나갔던 일들을 뒤늦게 깨닫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당혹스럽다. 그럼에도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나는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p. 241)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다시 기억할 때뿐이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p. 24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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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도 나갈 수 없어 여기까지 왔더라도,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미 저질러버린 과오와 후회를 잊지 않고 지금이라도 제자리를 찾고자 한다면. 시간의 굽이에 파묻혀 채 발견되지 못한 기억, 사람, 목소리, 노래가 끝내 잊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한 계절을 살아갈 힘이 돼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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