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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애정을 담아 내 이름을 말하리

2023.06.24

누군가가 애정을 담아 내 이름을 말하리

지난주 소개한 <별의 시간>(을유문화사, 2023)의 번쩍이고 번뜩이는 힘에 압도되어 서둘러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소설을 더 찾아 읽는다. 너무 뒤늦은 입문처럼 보이지만, 지금이라도 그녀의 뒤를 밟아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단편 모음집 <달걀과 닭>(봄날의책, 2019)을 호기롭게 펼친다. <별의 시간>을 통해 얼마간 겪었지만, 리스펙토르의 소설은 이번에도 역시 만만하지가 않다. 수월하게 넘어가는 문장이 없다. 서사의 기승전결 구조에 익숙한 독자라면 빠르게 내용을 간파하고 싶을 테지만, 그럴수록 리스펙토르는 보란 듯이 더 멀찍이 내달린다. ‘대관절 지금 내 귀에 들리는 목소리, 저 화자는 누구란 말인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전개, 파악, 간파라는 말과는 동떨어진 리스펙토르의 세계는 낯섦 그 자체다. 첫 번째 단편 <달걀과 닭>부터 난관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달걀과 닭'(봄날의책, 2019)

아침에 달걀을 본다. 나는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부엌 탁자의 달걀을 응시한다. 그리고 즉시, 인간은 달걀을 볼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달걀을 본다는 행위는 결코 현재 상태로 유지될 수 없다. 내가 달걀을 보자마자, 달걀은 즉시 3천 년 전에 목격된 달걀이 되어버린다.―달걀을 시선에 담는 바로 그 순간, 달걀은 이미 달걀에 대한 기억에 불과하다.―이미 달걀을 보았던 자만이 달걀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지금 달걀을 본다면, 너무 늦었다. 목격된 달걀은 상실된 달걀이다.―달걀을 본다는 것은, 언젠가 궁극적으로 달걀을 보게 되리라는 언약이다.―더 이상 잘게 쪼갤 수 없는 초미립 응시. 만약 진실로 생각이 존재한다면. 그런데 생각이란 없다. 있는 것은 달걀이다.―응시란 불가결한 도구이며, 나는 그것을 한 번 사용한 다음 던져버린다. 대신 달걀은 계속 간직한다. 달걀은 자아가 없다.―달걀은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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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터 쉽지 않다. 하지만 실은 이 문단이야말로 리스펙토르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단초이자 그녀의 세계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인 문이 돼줄지도 모른다. 응시하는 바로 그 순간, 이미 응시한다는 그 행위는 지나간 과거가 돼버렸다. 뭔가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달걀뿐이다. 응시하는 일도, 응시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도 이 달걀 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이다. 예리한 통찰이 아닌가. 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왜? 그녀의 글은 인간과 비인간, 응시와 응시의 대상이 그 어떤 우위도, 경계도, 선후도 없이 마구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똑떨어지는 답을 내놓지 못하는 우리의 오래된 질문 또는 우문,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이 책을 번역한 배수아 작가의 ‘옮긴이의 말’에 <달걀과 닭>에 관한 각별한 언급이 있다.

나는 <달걀과 닭>이 <G.H.에 따른 수난>과 더불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세계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작품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작가 자신이 그것을 자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유일한 작품으로 언급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이며 어쩌면 거기에 리스펙토르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의 열쇠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클라리시는 다른 자리에서 <달걀과 닭>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달걀과 닭>은 신비하게 읽히며, 실제로 오컬트적인 요소가 있다. 난해하면서도 심오한 이야기인 것이 맞다… 내 영감은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무의식의 정교한 작업이며, 그것이 저절로 누설되는 형태로 표면에 나타난 결과물이다. 게다가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종류든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369~370쪽)

참으로 솔직한 리스펙토르. 그렇다. 그녀의 글은 친절하지도 온순하지도 않다. 무정형에 기이하고 기괴하며 거침없는 세계 그 자체. 기존 언어의 문법과 규칙과는 무관한 오직 리스펙토르만의 언어 세계를 새로이 만들어낸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명성과 달리 그녀는 오랫동안 평단의 무시와 오해를 받아왔다. 심지어 그녀의 글은 문학이 아니라 요술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아마도 여기에는 그녀를 둘러싼 몇 가지 편견이 동시에 작용한 게 아닐까 싶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유대인, 브라질로 이주한 가난한 이민자 집안 출신, 1977년까지 이혼이 합법이 아니던 브라질에서 이혼하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여자, 만성 불면과 불안증에 담배, 수면제, 약물에 의존한 삶,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인 작가. “출판사들은 그녀를 전염병처럼 기피했다”(374쪽)고 하니 20세기 초 디아스포라의 산증인인 그녀의 삶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심지어 “남미의 버지니아 울프”, “버니지아 울프처럼 글을 쓰는, 그레타 가르보의 외모를 지닌 작가”, “마치 카프카가 여자인 것처럼, 릴케가 우크라이나 출신 브라질 유대인 여인인 것처럼, 만약 랭보가 어머니였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는 시작된다.”(인용은 모두 373쪽) 그녀를 향한 호의와 찬사를 위해 쓰였을 이 수식의 말조차 여성이라는 그녀의 정체성과 성장 배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계속 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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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끝에는 말이 있다. 나는 ‘수아레 soirée(프랑스어로 일몰에서 취침까지의 시간)’라는 단어를 말하기를 원한다. 언제 어디서, 그것은 알지 못한다. ‘수아레’의 모서리에는 가족이 있다. 가족의 모서리에는 내가 있다. 내 모서리에 있는 것은 나다. 나에게로 향하는 것, 그것이 내 길이다. 그리고 보기 위해서 나로부터 나올 것이다. 무엇을 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내 죽음 이후의 실제, 그곳을 향해서 나는 간다… 나는 내가 선언하는 하나의 나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무를 이야기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으로만 나는 확장되고 와해될 것이며, 그때 누군가가 애정을 담아 내 이름을 말하게 되리라. 내 가엾은 이름을 향해서 나는 간다.(294~295쪽)

애정을 담아 그녀의 이름을 말해본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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