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남자 고르는 취향이 의미하는 것은?
‘빅(Big) vs 에이든(Aidan)’
우리 시대의 시끌벅적한 문화적 논쟁 중 빅과 에이든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를 능가하는 질문은 거의 없다. 이는 케첩이냐 마요네즈냐! 드레스 컬러는 파란색인가 금색인가! <타이타닉>의 잭과 그 빌어먹을 문짝 논쟁-로즈가 올라탄 문짝엔 주인공 잭도 함께 올라탈 수 있었다는 의견이 일었다-에 버금간다.
<섹스 앤 더 시티>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의 대단했던 러브 스토리 두 번의 전말은 잘 기억나지 않더라도 빅과 에이든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쯤은 기억날 거다. 에이든의 터키석 반지와 시골 오두막집, 프라이드치킨을 아주 많이 먹고 난 후 캐리에게 배를 문질러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유명하다. 빅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그의 세련되고 매끈한 오버사이즈 블랙 캐시미어 코트, 번들거리던 붉은색 침실 벽, 그가 캐리의 35번째 생일에 자신의 차 안에서 기분 좋은 목소리로 “타, 꼬맹아”라고 말한 장면이 기억날지도 모른다.
팀 에이든이 될 것인지, 아니면 빅의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섹스 앤 더 시티>의 통과의례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애착 스타일,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의 크기, 로맨틱한 선택의 이유와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일 수도 있다. 관계에 관해 글을 쓰고, 섹스 칼럼을 기고한다는 것, 신발에 상당한 돈을 쓰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라는 내 삶이 캐리와 비슷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캐리라는 캐릭터가 수년에 걸쳐 무자비하게 비판받는 상황을 고려해볼 때 (‘캐리 브래드 쇼 최악’이라는 태그는 틱톡에서 9억9,300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이것이 칭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아는 건 우리 둘 다 작가이며, 우리 중 한 사람만 마놀로 블라닉의 슈즈로 가득한 맨해튼의 원룸 아파트를 임대할 여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섹스 관련 글을 기고하는 것과 신발 쇼핑은 차치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텔레비전 속 그 칼럼니스트와 내가 공통점이 있다면, 결국 ‘빅’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수년간 드라마와 그 후속작을 종교적으로 지켜본 나는 항상 그녀와 같은 선택을 했다.
오랫동안 당당하게 그것도 자부심을 가지고 팀 빅의 지지자임을 밝혀왔다. 물론 그가 항상 완벽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녀를 구하러 파리에 오지 않았던가! 그는 그녀의 소울메이트였다. 그녀의 사람이었고, 그녀의 랍스터(영원히 함께할 운명인 사람)였다. 하지만 내 연애사에서 내린 결정을 돌이켜보면,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빅 vs 에이든 논쟁은 단순히 남자 A와 남자 B의 비교 우위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성애적 남성성의 두 유형을 대표한다. 첫 번째 유형은 로맨틱한 제스처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어머니에게 당신의 존재를 숨기며, 파티에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며 당신을 꾸짖는 우울하고 오만하며 감정적으로는 자비로운 유형이다(빅). 반면에 두 번째 유형은 예민하고 사려 깊으며 일관되게 친절한 사람들로 사랑으로 흠뻑 샤워하는 느낌을 주며, 재미로 아파트 전체를 개조하고, 친구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다주는 사람이다(에이든).
다시 말해 빅과 같은 남자는 항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게 할 것이고, 에이든 같은 남자는 ‘내가 이 사람에게 가치 있는 사람일까?’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 논쟁에서 선택은 빅 vs 에이든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불안 vs 안전, 불확실성 vs 안심, 혹은 위험 vs 안전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 갈림길에서 에이든이 아닌 빅을 선택하는 것일까?
여기서 모든 것이 흥미로워진다. 애착 이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라. ‘불안정한 관계’에 유독 끌리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어린 시절 일종의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연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들에게는 일종의 정서적 공허함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 공허함은 결국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인정이나 사랑에서 찾고, 상처를 주는 파트너를 쫓아다니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가상의 인물을 지나치게 의사 분석적(Pseudo-analytical)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캐리와 빅 사이의 역학 관계처럼 보인다. 빅이 캐리를 몇 차례 실망시켰는지와 상관없이, 그가 객관적으로 굉장히 끔찍한 사람이자 남자 친구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캐리는 빅이 자신의 ‘위대한 사랑’이라는 생각에 계속 집착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남자는 여자 친구와 상의도 없이 파리로의 이사를 결정했다. 절대 결혼하지 않겠노라 고집하다가 자기 나이보다 절반이나 어린 여성과 결혼한 남자이며, 결혼 후에도 자신의 아내를 속이고 부정을 저지른 남자. 그리고 그가 캐리를 식장에 어떻게 남겨두었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빅은 꽤 노골적이고 한심한 잘못을 여러 번 저질렀다. 그저 터키석 반지를 끼고 캐리가 불편할 만큼 그녀를 사랑한 것이 유일한 죄였던 에이든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엄청난 팬층을 고려할 때 당연히 내 생각에 반기를 들고, ‘아니야! 에이든이 이 시리즈의 진정한 빌런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내 말의 요지는 팀 빅을 지지함으로써, 내 연애사에서 빅처럼 하는 행동을 묵인해왔다는 것이다. 아니, 빅의 행동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20대 초반엔 캐리와 빅 같은 관계를 갈망했다. 격렬하고 열정적이고, 수은처럼 뜨겁고, 멜로드라마 같은 관계. 감정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남자들은 나를 아주 약하고 작게 만들었다. 그들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라도 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밀당의 역학 관계에는 매혹적이면서도 중독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상대방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의 관심을 받으려고 더 열심히 싸워야 했고, 관심을 얻을 때 더 큰 보람을 느꼈다. 비뚤어진 경쟁에서 이긴 것만 같았다.
나는 쫓고 쫓기는 스릴에 취해, 상대의 나쁜 행동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 정도라 간주했다. 이를 극복했을 때 관계가 더 유의미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내가 깨달은 것처럼, 스크린 밖 세상에서는 빅과 같은 남자를 좇으면 엔딩은 눈물 바람뿐이다. 낭만적이거나 신나는 일은 전혀 없다. 대부분이 그저 불쾌할 뿐이다.
TV 시리즈 중 <섹스 앤 더 시티>만 이런 지독한 관계에 집착하는 건 아니다. <가십걸 >의 척과 블레어, <길모어 걸스>의 로리와 딘, <글리>의 커트와 블레인도 마찬가지다. 이유도 아주 간단하다. 건강한 관계는 드라마를 지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지루함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목표일지 모른다. 그리고 감정적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스스로 채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말한 이 모든 것이 제작진의 선택을 기쁘게 생각하는 이유다. 스포일러 주의! 그들은 빅을 <섹스 앤 더 시티> 리부트 시리즈 <앤 저스트 라이크 댓: 섹스 앤 더 시티>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웃시켰다. 그리고 시즌 2에서 누가 돌아오는지 말했던가? 바이럴 영상에서 사라 제시카 파커와 존 코베트는 맨해튼 거리에서 진하게 키스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캐리는 결국 빅과 함께할 운명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에이든이 돌아왔으니 더 좋은 것이 캐리를 기다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쩌면 내게도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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