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이호진 작가의 회화 실험

2023.07.19

이호진 작가의 회화 실험

지금 성북구에 가면 이호진 작가의 개인전 <The Location, 경로>를 볼 수 있다. 전시가 열리는 캔 파운데이션의 이준영 큐레이터는 “작가가 ‘지나온 삶의 경로’를 떠올리고 실험을 했다”고 소개한다.

이 매체에서 저 매체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호진은 동시대 추상미술의 지형도에서도, 세계지도상에서도, 선뜻 좌표를 확정할 수 없는 아티스트다. 그의 ‘삶의 경로’는 명쾌하게 파악할 수 없어 보인다. 이호진의 ‘굉장한 노마디즘’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마 고정 가능한 대상으로 축소되기를 거부하는 작가의 고유한 지향성을 감지했기 때문일 거다. 일체의 고정성에 대한 거절 의사는 분명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은밀하게 암시되기에, 그의 작품 특징인 ‘색’의 활용 방식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는 고정되지 않고 매번 끊임없이 다른 역할과 의미를 갖는 색깔이 그렇지 않은 색깔에 미학적으로 우위를 점한다.

어쩌면 오늘날 노마드적 아이덴티티는 지나치게 흔한 것이어서 더 이상 누군가에 대해 유의미한 진술을 해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호진은 잊힌 단어를 다시 꺼내는 작가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둘러싼 시대와 조건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8월 3일까지 열리는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된 집’에서 열리는 전시의 모습.

‘The Location, 경로’라는 전시 제목이 독특해요.

캔 파운데이션의 전시 공간은 두 곳이에요. 작가들이 늘 두 곳을 사용하진 않지만 저는 모두 쓰죠. 공간 자체가 성격이 완전히 달라요. 하나는 심지어 한옥이죠. 그래서 시간성을 생각했어요. 공간의 특징을 살리면서 어떻게 내 작업과 연계할 수 있을까? 원래는 ‘The Location’을 전체 제목으로 하고, 한옥은 ‘경로’라는 이름으로 따로 하려고 했어요. 결국은 같이 갔죠. ‘The Location’을 번역한 이름이 ‘경로’인 것처럼 했어요. ‘The Location’을 번역하면 ‘경로’가 아닌데, 그런 것처럼 영문을 쓰고 옆에 한글을 썼죠.

‘스페이스 캔’ 2층에서 열리는 전시의 모습.

메인 전시장 ‘스페이스 캔’은 화이트 큐브예요. 일종의 별관인 ‘오래된 집’은 말 그대로 오래된 한옥이고요. 최근 승효상 건축가의 재능 기부로 재생된 건물이죠. 두 공간을 구분하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작업이 까다로웠을 것 같아요.

숙제 같았어요. 제 최근 작업을 보면 추상적인 기호가 많은 것과 이미지화한 것이 섞여 있어요. 추상이 지금은 트렌디하지만, 20년 전에는 추상 작업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20년 동안 추상을 베이스로 작업해오면서 이미지를 어느 정도 넣을 것인가, 뺄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었죠.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운 얘기를 하면서 동시에 장면 구현에 포커스를 맞췄어요. 그런 힘든 고민이 없다면, 전시가 아니라 작품으로 공간 연출하는 것에 불과했겠죠. 시간성과 장소성, 20년간의 고민 속에서 연결성을 찾는 의미가 있었어요.

이번 개인전은 ‘회고전’이 아니지만, 회고적인 성격이 어느 정도 보여요.

회고적인 성격을 갖고 있죠. (뉴욕 생활을 마치고) 20년 전에 서울에 처음 돌아와서 개인전을 가졌어요. 20년 동안 겪은 변화와 고민이 이번 전시에 담긴 셈이에요. 한 작품 빼고는 모두 최근 2~3년 동안 한 작업이지만, 시간이 축적되어서 나온 것이 많아요. 오래 그렸다기보다, 보는 것이 오래되었다는 의미에서요. 감정이 쌓이기도 했고,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도 했죠

이호진 작가. 캔 파운데이션 디렉터 김도연은 그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시를 보러 온 다른 작가가 이호진을 두고 ‘굉장히 노마딕한 작가’라 했어요. 저도 동의해요. 자유롭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작가죠.”

뉴욕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송도국제도시에서 학생을 가르치죠?

2009년 송도에 처음 들어갔어요. 베이징이나 유럽에서 활동하다 오니 송도는 벌판이었어요. 지금은 국제도시 느낌이지만, 당시에는 송도 들어가는 길에 공장이 자리해 인더스트리얼한 에너지가 인상 깊었죠. 이제 송도가 일종의 아트 센터 같은 느낌도 들고, 조금 헐렁하면서도 재밌는 도시예요.

지난 20년간의 인터뷰와 작가 노트를 살펴보면 ‘도시’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이호진 작가가 지나온 ‘경로’를 관통하는 키워드인가요?

도시는 도시지만, 그게 정말 ‘도시’가 아니라, 어떤 컨디션, 시대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뉴욕이나 서울 같은 도시가 제게 큰 이슈는 아니었어요. 복합체라는 것에 관심이 있었어요. 도시 자체를 어떤 혼돈의 공간, 문제의 공간이자 심리적 공간으로 봤어요.

이호진, ‘From the Present’, 2017~2023, Acrylic on Canvas, 257×270cm.

팬데믹 직전, 청담동에 3개월간 오픈 스튜디오를 열었어요. ‘경로’와 ‘로케이션’의 관점에서도, ‘도시’의 관점에서도, 그곳의 장소성에서 끌어낼 요소가 많았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낯부끄럽기도 해요. 굉장히 큰 지하 공간을 작업 공간으로 지원받았어요. 까르띠에 옆 건물이니까 메인 스트리트였죠. 작업실로만 쓰기에는 너무 아까웠어요. 마침 안식년이기도 해서, 이런 스트리트에서 ‘힙’한 팝업 전시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상업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스튜디오를 오픈하는 개방형 전시, 아무나 와서 보는 공간을 꿈꿨어요. 연계해서 다른 도시로도 가고 싶었고요.

‘스페이스 캔’에서 ‘오래된 집’으로 이동하려면 골목길을 걸어야 하죠. ‘전시 경험’ 측면에서 이색적 요소입니다. 기획 과정에서 이 길의 ‘경로’적 성격도 고려했나요?

길이 명확하게 전시에 개입되지는 않아요. 그래도 ‘도달’하는 과정이에요. ‘도달하기’의 최전방인 거죠. 거리가 멀지 않아요. 더 로케이션이라는 지점도 내일이 되면 ‘오래된 집’이 될 수도 있는 거죠. 내가 도달했지만 이것 역시 가고 있는 거니까요. 결국에는 하나의 순환같이 되죠. 뚝 떨어져 있는 것보다, 종착역과 전 정거장처럼 거리가 붙어 있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색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회화인데도 비디오의 성질이 있달까요.

그런 면이 있죠. 독일의 한 기획자가 제 전시를 보고 “여기에 에어로(Aero)가 있다”고 해요. 공기의 순환 같은 것이죠. ‘시니컬한 뷰’를 갖고 있으면서, ‘뷰티’를 같이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업이죠. 사실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어요. 미학적 아름다움과 메시지와 서브컬처 같은 것들을 어떤 지점에서 추상적 기호를 가지고 함께 말하면 좋겠어요. 말씀처럼 색이 화려하고 움직임도 있지만, 기쁘고 들뜨고 팬시한 것이 아니라, 좀 짠하거나, 공허하기도 하고, 또 어느 날 보면 괜찮기도 하죠. 동시대적 메시지가 느껴질 수도 있겠죠. 스페이스 캔 1층과 2층 그리고 오래된 집은 감정이입 정도가 각기 달라요. 전시 설정 안에서 전략적으로 보여주는 것, 다른 것과 호흡하면서 색 이면에 있는 여러 가지를 보여주는 것, 표현 방법의 스펙트럼을 넓혀놓는 시도가 저는 재밌더라고요. 요즘 흰색을 많이 쓰잖아요. 흰색은 여백의 의미도 있지만, 더 잘 보이고 더 팬시하거나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이미지를 오히려 탁하게 만들어요. 사람들은 반대를 원하죠. 톤을 떨어뜨리는 것을 누가 원하겠어요. 멍해지는데요. 그런데 저는 그걸 일부러 써요. 그런 작업이 어렵죠. 대비가 좋고, 화려하고, 센 것은 어렵지 않거든요. 나는 이런 작업을 어릴 때 했고, 이미 할 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어떤 사람은 할 줄 아는 것을 하면서 잘 살기도 하죠. 선택이에요. 새로운 표현 기법에 대한 고민을 하니까 몇 년 걸렸고, 앞으로도 또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 지점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죠. 완성도 측면에서 보면 애매할 수 있거든요. 애매한 것 없이 탁색도 하고, 이미지를 혼탁하게 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좋은 회화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거죠.

작가에게 ‘지나온 삶의 경로’가 있듯, 미술이라는 예술 장르에도 경로가 있죠. 미술사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두 경로가 마주치는 지점이 있나요?

미술을 대학 가서 우연히 했어요. 미술이 좋았다기보다는 브루클린이 좋았어요. 그 당시에 바스키아를 알았어요. 정말 멋모르고요(웃음). 그래피티는 일탈 같아서 좋았어요. 그래서 추상은 나에게는 낙서 같은 것이죠. 잘 그릴 줄 모르고 조금은 뻔하지만 내 멋대로 해도 좋은. 반 고흐 같은 화가도 몇 년 전부터 많이 생각해요. 그런 에너지를 갖고 원초적인 ‘뷰티’를 만들어내는 화가를 많이 보고 싶어요. 현시대에는 별로 없죠. 시스템화되지 않은, ‘크레이지’한, 본능적인 작가들이요. 요즘 독일 쪽 작가들도 좋아요. 표현주의적인 것이 강하면서 뷰티도 있고. 딱딱하지 않은 자유로움이 있달까요.

‘중첩성’ 혹은 ‘중층성’은 이번 전시에서 강조하는 또 다른 개념이에요. 그래서 작품 대부분이 ‘유화’라는 점에 눈길이 갔어요.

큰 것 하나 빼고는 다 유화죠. 기법과 표현이 내가 이야기하려는 방법과 같이 가야죠. 따로 가면 재미없어요. 원래는 선택된 중첩이라 했어요. 내가 살아온 것 중에 기억하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가져와서 집약한 거죠. 표현으로 가면 레이어가 중요하죠. 유화에는 중첩이 있으니까 시간성을 보여주죠. 얇게 그리지만,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경로를 레이어를 통해 투명하게 보여줘야 해요. 어떤 그림에서는 더 투박하게 축적해서 추상적으로 보여주고, 어떤 그림에서는 장면으로 레이어를 통해서 얕게 보여주기도 하고요. 유화의 특성상 힘들어요. 유화는 레이어의 느낌이 안나요. 그래서 유화를 가지고 한다는 것이 제게는 시도였어요. 아크릴에 비하면 깊이감이 있고, 폭이 넓어요. 마르는 시간도 있죠. 하나의 그림이라도 일부러 덜 말라 있을 때 작업하기도 하고, 말라 있을 때 작업하기도 해요.

조각 작품도 간간이 보입니다.

저는 오브제라고 얘기해요. 조각이라고 하기에는 입체 면에서 완결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림과 같이 하나의 장면으로 보였으면 좋겠어요. 형식이 다른 장르가 아니라, 회화적 관점에서 구조물이죠. 그림에 콜라주처럼 붙어 있는 오브제도 있어요. 평면과 3D의 중간일 수도 있고요. 예전에는 큰 의미 없이 툭툭 상징적으로 만들었어요. 지금은 거기에서도 완성도, 미적 강점을 추구해보려고 하는 거죠. 그게 너무 세면 그림으로부터 독립이 되죠. 어느 정도 그림의 모티브가 살짝 나와서, 하나로 묶여서 보일 정도가 좋죠. 회화적 관점에서 보는 오브제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잊지 않으려 하지만, 자꾸 잊는 것이 있나요?

삶의 애환, 아픔. 잊으려 하지만 오히려 자꾸 생각나는 것이기도 하죠.

    피처 디렉터
    김나랑
    구회일(프리랜스 에디터)
    사진
    김형상, 캔 파운데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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