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대 인간 전쟁, 패션계는 안전할까?
생성형 AI의 등장은 모든 산업 부문의 전망을 바꿔놓고 있다. 요구 조건을 넣으면 실사에 가까운 3D 이미지건 소설 줄거리건 몇 초 만에 뚝딱 만들어내는 생성형 AI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인간의 오랜 낙관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예컨대 언어 생성 AI인 ChatGPT는 ‘AI는 정확하고 인간은 창의적이다’라는 상식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었다. ChatGPT에 한국 역사 소설을 써달라고 하면 신사임당과 세종대왕이 부부였다는 식의 정신 나간 서술도 개의치 않는다. 생각보다 창의적이고, 확실히 부정확하다. 최근 한국에서는 ChatGPT가 쓴 소설 <백합>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야구 경기를 보고 나온 수아와 라미가 그날 투수로 등장한 수아레즈와 라미레즈에 대해 얘기하다가 서로 레즈비언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이다. 한국 프로 야구 용병사를 꿰고 있는 한국어 화자라도 상상해본 적 없는 신선한 언어유희와 과감한 전개가 충격이었다. 과연 인간이 AI보다 창의적인가? 이제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인간의 창의력도 지식, 경험, 기술이라는 제한된 요소의 결합일 뿐이다. 그것들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변수로 작용하는 감성이라는 요소도 이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미드저니, Dall-E 등 생성형 이미지 AI 모델은 ‘누구 누구 스타일’이라는 주문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기존 작가들의 창작물을 바탕으로 감성을 역추적해 모방하는 것이다.
이미지 생성 AI에 기존 패션 브랜드의 아카이브를 제공하고 다음 시즌 컬렉션을 완성해달라고 하면 금세 다양한 이미지를 쏟아낸다. 샤넬, 구찌, 디올처럼 유서 깊은 브랜드라면 별도의 아카이브를 제공할 필요도 없다. 당장 창을 열어 시험해보라. 저작권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기존 디자인의 재탕일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감히 활용할 수는 없지만, 제법 그럴듯한 이미지가 쏟아진다. 알다시피 우리의 AI 친구들은 허언증이 대단히 심하고 도덕성은 많이 떨어진다. 아직은 인간이 노련한 마부처럼 제시어를 다듬고 수정을 명령하며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 하지만 곧 AI가 틱톡과 인스타그램의 패션 콘텐츠 노출 빈도, 고객 게시판에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 브랜드의 세일즈와 재고, 반품, 폐기 내역을 분석해 계속 팔릴 상품과 새로 추가할 상품을 결정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 결과값이 마케팅과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과정을 극도로 단순화해 트렌드 분석부터 디자인까지 한 번에 해결해주는 패션 AI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홍콩에 본사를 둔 인공지능 디자인 연구소(AiDLab)는 이미 ‘세계 최초 AI 패션 플랫폼’을 표방하며 AI를 이용한 디자인, 품질관리, 제조, 3D 피팅 등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패션계에서는 아직까지 AI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패션 회사용 ERP를 제공하는 어패럴 매직(Apparel Magic) CEO 브랜든 긴스버그는 올해 2월 <포브스> 온라인 기고문에서 AI가 공급망 관리에 혁신을 가져올 거라고 예측했다. AI에 재고 변화를 학습시키면 공급 규모와 시기를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최적의 타깃을 발굴하고 전략을 세우고 알고리듬으로 유행을 예측하고 마케팅 적중률을 높이는 데도 AI를 활용할 수 있다.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패션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에서 벗어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올해 5월 맥킨지 보고서는 ‘AI가 패션 산업의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생성형 AI는 향후 3년에서 5년 안에 의류, 패션 및 럭셔리 부문 운영 수익에 1,500억~2,750억 달러를 추가할 수 있다. 이 분석에는 AI가 이 분야의 업무 효율성을 높여 인간들이 그들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게 해준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예컨대 현재 수준의 AI로도 인간 디자이너가 만든 간단한 스케치나 분위기 보드를 3D 모델로 변환하는 일은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 과거의 제품 라인에 새로운 영감을 주는 이미지를 가미함으로써 제품 개발 아이디어를 얻기도 쉬워질 것이다. 이 리포트 역시 트렌드 분석과 타깃 마케팅으로 재고를 줄인다는 측면에서 AI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패션계에서는 가치 판단보다 AI 참여를 비가역적 흐름으로 보고 재빨리 적응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올해 4월 메종 메타(Maison Meta)가 개최한 2023 AI 패션 위크(AIFW)는 패션계에서도 큰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 메종 메타 창립자 시릴 푸아레는 생성형 AI를 사용해 미학과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다면 누구든 패션계에 진입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과연 AIFW에는 그래픽 디자이너, 경영 컨설턴트, AI 개발자 등 다양한 직군이 참여했다. 디지털로 생성되었다는 AIFW 이미지는 실제 패션 위크 스틸컷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했다. 시릴 푸아레는 “<보그> 품질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밝혔다. 최종 선발된 3개 컬렉션은 리볼브닷컴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세계 유명 패션 학교들은 디지털 패션 과정을 커리큘럼에 포함시키고 있다. 파슨스는 2022년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와 협력해 디지털 패션 교육 프로그램을 출시했다. 이스티튜토 마랑고니는 올해 6월에 첫 번째 디지털 패션쇼를 개최했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은 호주 디지털 패션 레이블 마이애미(MYAMI) 스튜디오와 협력하고 있다.
다만 AI를 현장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할 숙제가 있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우려하는 부분은 세 가지다. 첫째는 인간의 일을 AI가 대체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대량 실업 문제다. 둘째는 기존 데이터에 기반한 AI 디자인이 패션을 획일화하고 개성과 모험을 축소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저작권을 비롯한 법적 합의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 할리우드는 63년 만에 벌어진 작가 조합과 배우 조합의 동반 파업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OTT 등 콘텐츠 공급망 변화로 인한 수익률 분배 문제가 핵심이지만 AI 활용에 따른 저작권, 초상권 규정도 중요한 이슈다. 예컨대 드라마 제작자들은 AI가 기존 시즌을 바탕으로 새 시즌의 줄거리를 짜고 인간 작가들이 수정하는 형태로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경우 AI의 창작 도구로 활용된 원전 아이디어의 저작권을 어떻게 보장할지, 인간 작가들의 참여 범위와 크레디트, 보상은 어떻게 책정할지, 아직 원칙이 없다. 이건 문화 산업 분야의 막대한 일자리가 걸린 문제기도 하다. 배우들에게도 남 얘기가 아니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 6에는 생각 없이 OTT 가입 약관에 동의했다가 자신의 사생활이 디지털 기기를 통해 모니터링되어 드라마 소재로 활용된 일반인 이야기가 나온다. 그 드라마는 실제 배우와 촬영진이 아니라 배우의 초상권을 사들인 기업이 AI로 만든 것임이 밝혀진다. 5년 전만 해도 공상과학처럼 보였을 이야기가 이제는 현실 풍자로 다가온다. 그 때문에 이번 파업을 AI 대 인간 전쟁의 서막처럼 보는 입장도 존재한다. <터미네이터>를 보고 자란 영화 팬들의 과장된 흥분일 수 있다. 하지만 패션계에서도 유심히 지켜볼 사안임은 분명하다.
국내에서는 일러스트업계가 가장 먼저 AI 전쟁에 참전했다. 웹소설 표지 일러스트가 AI의 작업으로 대체되면서 단가가 떨어지거나, 기존 작가들이 공정을 줄이기 위해 AI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었다. AI가 어떤 이미지를 학습해 결과물을 도출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표절이나 도용 시비도 종종 벌어진다. 지난 4월 그림 창작자들은 ‘AI 이미지 생성기의 무분별한 사용과 악용을 막기 위한 법적 규제에 관한 청원’을 국회 청원 홈페이지에 올렸다. 청원 내용은 첫째, AI 기업이 사용하는 학습 데이터에 저작권 있는 이미지가 포함됐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법률을 제정할 것, 둘째, AI로 만든 이미지에 대해 AI 모델, 원작자 등의 출처를 표시하고 AI로 만든 이미지임을 검증할 수 있도록 워터마크 등을 의무화할 것, 셋째, 이미지 생성 AI의 윤리적 활용을 위해 저작권, 초상권 등 관련 인식 개선과 교육을 실시하고 사례별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것 등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외국에서는 게티이미지가 이미지 생성 AI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AI 기업들이 게티이미지의 데이터를 허가 없이 AI 학습에 이용해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동의나 보상 없이 AI 학습 도구로 활용되는 데 반발해 직접 소송을 제기하는 예술가들도 나오고 있다.
올해 2월 에르메스는 NFT 관련 소송에서 승리했다. 에르메스가 버킨 백을 NFT로 만들어 판매한 아티스트를 상표권 침해로 고소한 사건이다.
버킨 백 NFT를 제작, 판매한 아티스트는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처럼 예술로 봐달라”고 주장했으나 상표권 소송에서 패했다. 이 판결은 디지털 기술 관련 법적 장치가 미비한 틈을 타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사례에 경종이 될 것이라 평가받았다. 하지만 상표가 아니라 디자인 데이터만 사용하는 경우면 얘기가 다를 수 있다. 물론 패션 브랜드의 가치는 디자인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케아 쇼핑백에 발렌시아가 로고를 붙이면 수백만원이 되는 게 패션이다. 그래서 유명 브랜드끼리도 아이디어 도용, 모방이 빈번히 벌어지고 ‘영감’이라는 명목의 문화 전유, ‘오마주’나 ‘회고’라는 핑계의 재탕, 삼탕, 다른 브랜드 흉내 내기도 허용된다. 업계 현실이 이러니 패스트 패션 업체가 누구를 카피해서 헐값에 팔아치운다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AI가 기존 패션 데이터를 무단 활용하는 것에 패션 브랜드들은 할 말이 궁색하다. 하지만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는 작은 레이블에는 아이디어가 무제한 오픈소스로 활용되는 환경이 불리할 수 있다. 인간 창작자나 모델의 권리 문제에서도 패션계만 예외일 수 없다.
새로운 기술은 대개 고민할 겨를도 없이 우리의 삶을 파고든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긴 시간 SF로 미리 접한 변화다. 그 때문에 오히려 성급한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두려움보다는 탐구가 답이다. 패션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신 AI 개발자가 만들고 데이터 분석가가 승인한 컬렉션, 유명 모델을 여러 명 합성해 초상권이 불분명한 가상의 AI 모델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아직은 우리가 미래를 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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