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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공포와 마주하는 부부의 의지

2023.09.13

by 강병진

    ‘잠’, 공포와 마주하는 부부의 의지

    약 1년 전, 블라인드의 게시물 하나가 화제를 모았다. 제목은 ‘아내 불면증 고친 후기’. 이야기의 주인공은 결혼 5년 차 부부다. 불면증이 심한 아내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내는 말한다. “잠 좀 푹 자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남편은 조퇴 후 귀가해 오후 5시부터 잠을 잤고, 11시에 일어나 그때 침대에 누운 아내의 수면 패턴을 밤새 분석했다. 아내가 휴대폰을 보려고 하면 빼앗고, 밖에서 나는 소리를 차단하고, 에어컨으로 온도를 맞추고, 아내 목에 수건을 둘러 습도까지 맞추었다. 그날 이후 아내는 문제없이 제시간에 잠들 수 있었다. 영화 <잠>을 보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내를 위한 남편의 헌신도 아름답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을 편히 잘 수 있도록 해주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영화 <잠>은 잠을 자는 동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남편에게 느끼는 공포를 그리는 영화다. 하지만 동시에 포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부부의 의지가 돋보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이런 의지는 이 영화가 기존의 여러 장르적 요소를 가져오면서도 그들과 구분되는 지점을 부각하는 요소다.

    가까운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하면 무섭다. <잠>의 공포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어느 날 잠에서 깬 아내 수진(정유미)은 아직 잠에 빠져 있는 남편 현수(이선균)의 모습에 놀란다. 얼굴이 피칠갑이다. 자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손톱으로 얼굴을 긁은 탓이다. 또 어떤 날의 남편은 자다가 일어나 냉장고를 열더니 고기와 생선, 달걀을 날것 그대로 먹어치운다. 아내는 어떻게든 남편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다. 수면 클리닉의 처방대로 집 안 구조와 생활 습관을 바꿔본다. 그래도 남편의 이상행동은 나아지지 않는다. 여기서 <잠>은 또 다른 층위의 공포감을 덧씌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기괴한 행동에 공포감을 느낀 사람이 점점 예민해지면서 뿜어내는 파괴적인 에너지가 불러오는 공포다. 아기가 태어난 후 아내는 잠에 빠진 남편이 아기를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관객들은 여기에 더해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의 괴로움까지 상상하게 된다. 그처럼 <잠>은 공포의 레이어가 여러 겹으로 쌓인 영화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부부의 집 안에서만 이루어지는데도, 오히려 감정이 확장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다. 하지만 이 영화에 담긴 공포의 층위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공포 영화 팬이라면 <잠>에서 또 다른 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가깝게는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마더!> 같은 작품이 있고, 멀게는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가 있으며, 비슷하게 보면 나홍진의 <곡성>도 떠올릴 수 있다. 모두 평화로운 공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부의 힘이 침범하며 시작되는 공포 영화다. 그런데 <잠>의 배경인 아파트는 다른 영화 속 공간보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더 희미한 곳이다. 아파트에서 ‘침범’은 일상이다. 천장에서 울리는 소음으로, 또는 누군가의 오지랖으로. 아파트 생활자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이런 일상적 불편이 한발 더 나아가 공포로 다가온다면 어떨까? 한국 아파트의 사회학에서 오컬트 장르의 패턴을 상상한 덕분에 <잠>은 상당히 흥미로운 한국식 오컬트 영화가 된 듯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잠>과 <잠>에서 떠오르는 또 다른 영화를 구분 짓는 부분은 영화 속 ‘부부 관계’다. 이들은 ‘둘이 함께하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란 문구를 거실에 붙여놓고 항상 다짐한다. 어느 부부나 가질 법한 태도지만, <잠>에서 이 문장은 곧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다. 남편 현수는 자신의 이상행동이 아내와 아이에게 위협이 될 것이란 두려움에 다른 곳에서 잠을 청하려 한다. 그런데 아내 수진은 그것이 문제 해결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진은 남편을 병원에 데려가는 데 그치지 않고, 처음에는 거부했던 무속의 힘까지 빌려 이 상황을 해결하려 애쓰며, 급기야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원인과 해결 방안을 상정한 후 그에 따라 실천하기까지 한다. 영화 <곡성>의 종구(곽도원)와 비교할 때 수진의 에너지는 더 폭발적이다. 귀신 들린 딸을 치료하기 위해 종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지만, 결국 ‘그놈’이 던진 미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수진은 아예 자신이 먼저 새로운 판을 짜는 인물이다. 비록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무리한 방식이어도 말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진의 광기 어린 집착과 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은 <잠>의 결말에 대해 여러 해석을 낳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 속 아내의 광기와 집착을 표현한 정유미의 연기는 분명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뚜렷한 족적으로 남을 것이다.

    포토
    영화 <잠>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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