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희와 야콥, 퍼펙트 매치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으로 선정된 이설희와 야콥 파브리시우스 듀오가 프리즈 서울 기간에 슬며시 서울을 찾았다. 1995년 한국관이 개관한 이후 공동 감독 체제는 처음이고, 외국인 감독이 선정된 것 역시 최초이기에 이들이 남긴 향기에 이목이 집중된다.
오감 중 가장 감미로운 것은 아마 향기가 아닐까? 향기는 사랑을 부르거나 과거를 기억하게 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이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2년마다 세상을 들썩이는 현대미술 축제 베니스 비엔날레(La Biennale di Venezia)의 2024년 한국관 예술감독이 선택한 주제가 바로 향기다. 전시 제목 <오도라마 시티(Odorama Cities)>의 ‘오도라마’는 향기를 뜻하는 ‘Odor’와 드라마의 ‘rama’를 더한 단어에서 탄생했다. 이는 한국관을 혼자서 채우게 된 아티스트 구정아가 2016년 런던 지하철역에서 펼친 향기 전시 제목이기도 하다.
2020 부산비엔날레를 통해 예술감독과 큐레이터로 인연을 맺은 야콥 파브리시우스(Jacob Fabricius)와 이설희 감독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다시 한번 손을 잡게 됐다. 최근 두 사람은 덴마크의 미술관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는데,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시즌을 맞아 비엔날레 준비 차원에서 함께 서울을 방문하게 됐다.
“오픈 콜을 통해 한국 향기에 대한 대중의 추억을 수집했습니다. 이렇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사전 준비 과정을 대중과 함께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 의미가 깊어요. 처음에는 한국인이 한국 향기를 찾아나서는 소박한 향기 여행(Korean Scent Journey)쯤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점차 범위가 넓어졌어요. 북한과 남한을 방문한 외국인, 해외 입양아, 해외 이민자, 한국 거주 해외 근로자 등 여러분의 추억에서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덴마크 쿤스트할 오르후스(Kunsthal Aarhus) 큐레이터 이설희와 아트 허브 코펜하겐(Art Hub Copenhagen) 관장 야콥 파브리시우스는 부산비엔날레에서 구정아 작가의 작품을 선보일 당시 그녀가 1990년대부터 여러 번 향기를 소재로 한 전시를 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024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예술감독 공개 모집에 향기를 매개로 한 전시를 제안했다. 마침 PKM갤러리에서 개인전 <공중부양>을 선보이던 구정아 작가와 함께 미팅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두 감독이 생각하는 구정아 작가의 특별함은 공간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다. 어두운 밤에 빛을 발하는 야광 스케이트 파크 연작은 공간을 압도하는 스케일이 특히 매력적인 작업이다. 초기 작업에서부터 구정아는 나프탈렌 작품 설치 등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의 매체를 전시장에 선보이며 감각과 매체의 관계에 몰두해왔다. 내년 한국관 역시 복잡한 역사와 기억이 어떻게 향기로 매력적이고 인상적으로 구현될 것인지가 관건이기 때문에, 세 사람은 긴밀하게 교류하며 협업을 진행한다.
향기는 추상적 미디엄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설명하기도 힘들다. 이설희와 야콥 파브리시우스는 부산비엔날레에서 문학과 음악 등을 접목해 예술의 감각적 전이를 시도했고, 이번에는 ‘예술 속 향’이라는 주제로 한국 향기를 활용한다. 그렇다고 한국의 국가적 초상이나 남북한 분단이라는 거대 담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니다. 시각언어 중심의 전시가 각광받는 예술계의 흐름에 모두가 지쳐 있기에 새로운 감각으로 이를 환기하고 일깨우려는 의도다. 하지만 구정아라는 한 개인의 추억에만 의존한다면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려울 수 있기에, 향기의 수집 대상과 범위를 넓힌 것이다. 두 예술감독은 최근 해외 한인 단체, 입양아 단체, 유학생 단체, 이북 5도 단체 등 다채로운 그룹과의 만남을 통해 리서치를 확장하고 있다.
“한국 향기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더라고요. 수많은 세계인이 한국 향기와 연관되어 있죠. 이번 오픈 콜을 통해 알게 된 사연 중 덴마크에 입양된 분의 추억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느덧 40대가 된 그분은 두 살 때부터 덴마크에서 살았는데 여전히 잊지 못하는, 한국에 대해 막연하게 떠오르는 어떤 감각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다 친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잊고 있었던 냄새의 근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무려 40년 만에 향기 기억의 퍼즐을 맞춘 것이죠.”
흥미로운 점은 오픈 콜을 통해 수집한 추억의 향기에 일종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생들은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가 많아 할머니의 옷장과 집 냄새를 그리워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렇듯 수많은 개인의 역사로부터 발견한 공통점을 통해 한국 역사까지 유추할 수 있었다. 두 예술감독은 오픈 콜을 통해 접수된 이야기를 매일 읽으며 아름다운 영감에 사로잡혔다. 오픈 콜을 통해 수집한 한국 향기에 대한 추억은 특정 키워드를 통해 분류되고, 전문 조향사에 의해 향기로 소생할 것이다. 조향사의 작업은 최소 6개월의 안전성 테스트를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까다로운 프로젝트다. 후각을 잃었거나 후각이 약한 이들도 전시를 만끽할 수 있도록 시각과 청각 등 다른 감각의 장치도 전시장에 함께 설치하기 때문에 두 감독의 시계는 그 어느 때보다 바삐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설희와 야콥 파브리시우스의 특별한 추억 속에 자리한 한국 향기는 무엇일까. 이설희 감독은 어린 시절 밀양에서 자랐을 때 감각한 계절이 바뀌는 향기를 꼽았다. “몹시 아름답고, 늘 다시 돌아가고 싶은 장소입니다. 서울에서 살고 싶었던 어린 시절에는 밀양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지냈죠. 신기하게 서울에서는 사계절이 바뀌는 냄새가 아주 흐릿합니다. 봄에 산들바람이 일으키는 냄새, 여름날 무더움 속에 자리하던 그 냄새가 그립습니다. 아이 때는 향기를 느끼는 감각이 더 예민한 것 같아요. 그러니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특히 향기에 대한 미사여구를 자주 쓰게 되나 봅니다.” 야콥 감독은 한국에서 만끽한 자연의 향기를 추억했다. 그는 짠 내 나는 바다 냄새, 신선한 수풀 내음, 한국 식당의 문을 열면 밀려오는 풍부한 냄새를 사랑한다. “한국은 도시마다 모두 다른 향기가 납니다. 덴마크에서는 느끼지 못한 점인데요. 그만큼 한국은 다양성이 큰 나라인 것 같아요. 여러 도시를 걸을 때마다 느끼는 온갖 냄새는 매번 다른 감각을 자극하며 신비로운 자국을 남깁니다.”
한국인과 덴마크인, 여성과 남성, 미술관 큐레이터와 독립 큐레이터 등 이설희와 야콥 파브리시우스는 언뜻 봐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하다. 이설희 감독은 국공립 미술관에서 인턴에서부터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온 큐레이터이며, 야콥 감독은 현장에서 스스로 큐레이팅을 익히며 인맥을 구축한 독립군 스타일이다. 이설희가 전형적이고 분석적인 학예 연구사로서 계획적인 큐레이팅을 선보인다면 야콥은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확장성이 특징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배경의 두 사람이 팬데믹 시기 부산비엔날레에서 함께 일하며 케미스트리를 발휘하게 됐다. 비엔날레 직전 딱 한 번 만났고, 팬데믹이 심화된 이후에는 6개월 동안 매일 스카이프를 통해 회의를 진행했다. 이설희 감독은 야콥 감독에게 솔직한 것은 아름답고 긍정적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당시 팬데믹으로 인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와 광주비엔날레는 모두 연기되었지만 부산비엔날레는
예정대로 열린 것은 고마운 행운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작품 제작과 운송이 어려웠기에, 신작 제작이 어렵다면 과감히 포기하고 구작을 전시하는 등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최선을 다했다. 한국 미술계 구조는 대안을 선택하면 비난을 받는 경향이 있지만,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즐겁게 대안을 찾으며 전진했다.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장애물과 부딪히며 그동안 두 사람은 예술 여정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중요한 전시도 결국 인간 활동의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 예술만큼 삶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에 공감했다.
야콥 파브리시우스는 덴마크에서 유일하게 한국 작가의 작품을 연이어 선보이는 큐레이터이기도 하다. 김소라, 김범, 남화연, 최고은 등 한국 작가들이 그의 도움에 힘입어 덴마크에서 전시를 열었다. 2019년에 야콥 감독이 아트선재센터에서 선보인 <나는너를중세의미래한다1>은 그가 선보인 국제 작가 그룹전인데, 100년 동안 10편으로 나누어 진행하는 동명 전시의 네 번째 버전으로 2016년 시작되었다. 현대사회에 깃든 환상과 기괴함, 디스토피아적 묘사를 통해 미래를 가늠해보는 전시다. 얼마 전,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총예술감독으로 선임된 브라질 출신 아드리아누 페드로자(Adriano Pedrosa)는 전시 주제를 ‘포리너스 에브리웨어(Foreigners Everywhere)’라고 선언했다.
제목 그대로 이방인, 외부인, 이민자, 난민 등 타자에 대한 시선이 살아 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야콥 감독은 본전시와 한국관 전시를 굳이 연관시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설희 감독은 두 개의 전시로부터 발견되는 일맥상통을 반겼다. 주제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한국인과 덴마크인 예술감독이 함께한다는 자체가 바로 ‘포리너스 에브리웨어’가 아닐까.
인터뷰가 마지막을 향해갈 즈음 나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현대미술 축제를 넘어 수상에 초점을 맞추는 올림픽으로 여겨지는 현상에 대한 두 예술감독의 의견을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야콥 감독은 예술은 아무 제약도 없고, 규칙도 없고, 빨리 어딘가로 이동할 필요도 없는 지극히 자유로운 활동이라고 예찬했다. “모든 국가관이 그 나라의 대표 작가를 내보내는 구성으로 자리 잡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를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며, 예술감독과 미술가가 자유의 플랫폼을 만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설희 감독은 국가관이 자리 잡은 베니스 비엔날레의 자르디니(Giardini) 자체가 아이러니한 공간이라는 것에 동감했다. “우리가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서로 노력해 공동의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요. 국가관끼리 협업을 논의하기도 하고, 한국 큐레이터가 다른 국가관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여러 차원에서 국가주의를 벗어나는 중이라고 봅니다. 야콥 감독이 이번에 한국관 기획을 맡았다는 것도 국가주의를 유연하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미술 올림픽이라는 무거움에서 벗어나 약간 여유를 가질 수 있지요. 사실 유럽인의 관점에서 보면 자르디니는 남아시아는 한 곳도 없는 동아시아 국가관 중심이기도 합니다.”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는 2024년 4월 20일부터 11월 24일까지 약 7개월간 진행된다. 미술 문외한이라도 베니스 비엔날레를 즐길 수 있으며, 이설희와 야콥 파브리시우스가 구정아 작가와 함께 한국관에 펼쳐놓을 향기는 누구나 음미할 수 있다. (VK)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사진
- 채대한
- 글
-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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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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