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뉴스

청바지 짓는 여자 – 순진 디자이너, 박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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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짓는 여자 – 순진 디자이너, 박순진

2023.10.06

by 이소미

    데님을, 정성스럽게 짓는 여자가 있다.

    순진 디자이너, 박순진.
    순진 팝업 스토어, 비이커 청담.

    순진(Soonjeans)은 이제 갓 돌을 넘긴 신진 브랜드지만 주인장 박순진은 준지, 카이아크만, 티아이포맨 등 굵직한 브랜드에 몸담았던 베테랑 디자이너다. 오랜 기간 여러 사람과 손과 머리를 맞대며 옷을 만들어온 그는 이제 작업실에서 홀로 데님을 만진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여름, 비이커 청담에서 열린 순진의 팝업 스토어에서 박순진을 만났다. 순진의 데님 셋업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스타일에선 흔히 데님 하면 떠오르는 거칠고 반항적인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담백하고 묵직한 품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실루엣이 생경하고 묘했다.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자태는 클래식한 수트를 입은 비즈니스우먼만큼 근사했고, “첫날인데 떨리시겠어요”라는 말에 “설레요”라고 대답하는 모습에서는 단아한 활기가 느껴졌다.

    1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데님의 몰랐던 얼굴을 너무 많이 마주해서였을까. 인터뷰를 위해 자리를 옮긴 카페에서 제대로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재채기하듯 질문을 뱉어버리고 말았다.

    Courtesy of Soonjeans
    Courtesy of Soonjeans
    Courtesy of Soonjeans

    왜 하필 데님이었나?

    내 옷차림의 기본이자 베이스는 언제나 진 팬츠, 청바지였다. 여러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작업하면서 내가 나의 컬렉션을 연다면 어떨까에 대한 고민은 계속해왔다. 마냥 내 브랜드를 론칭해야겠다는 결심보다는 내가 앞으로도 즐기고 좋아할 수 있는 것을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데님이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 때쯤, 순진을 시작했다.

    데님의 어떤 부분을 그토록 좋아하는 건가?

    우선은 자유로움. 한 벌만 걸쳐도 스타일을 완성하는 데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 데님은 클래식과 캐주얼을 이어주는 브리지 역할이자 두 경계를 허무는 아이템이다. 클래식한 옷차림에 청바지만 곁들여도 훨씬 젊어 보이지 않나. 시간의 묘미도 엄청나다. 데님은 입으면 입을수록 그 멋이 산다. 오랫동안 함께했을 때만 볼 수 있는 컬러감과 모양새가 있다. 그 모습이 그냥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입는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닮아가는 것. 그건 새 옷을 입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즐거움이다.

    데님에 처음 ‘꽂힌’ 순간이 궁금해진다.

    ‘와, 나 이 옷이 너무 좋아!’라는 생각이 처음 든 건 제인 버킨이 청바지를 입은 이미지를 봤을 때. 너무 쿨하고 또 멋졌다. 사실 데님뿐 아니라 여성이 바지를 입었을 때의 실루엣을 참 좋아한다. 주체성과 강인함이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특히 데님엔 언제나 나를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있다.

    애정과 별개로 직접 만든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을 텐데.

    물론 기술적인 측면만 따지고 보면, 소재부터 봉제까지 과정 하나하나에 내가 감히 도전장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숙련된 분들이 많을 거다. 완성도를 기본으로 깔고 가되 나머지 부분은 오직 ‘순진’만 할 수 있는 것들로 채우고 싶었다.

    Courtesy of Soonjeans
    Courtesy of Soonjeans
    Courtesy of Soonjeans

    그래서 그런가, 순진의 데님은 여타 데님과는 다른 품위가 느껴진다. 정갈하면서도 묵직하고.

    데님이 지닌 거칠고 강렬한 이미지를 순화하고 싶었다. 한복의 배래선에서 따온 재킷의 소매 라인이나 호랑지와 같은 디테일도 포인트였지만 가장 염두에 둔 건 실루엣이다. 그래서 봉제와 패턴에 신경을 많이 썼다. 데님은 워싱이라는 작업을 거치면서 고유의 패턴 메이킹을 해야 하는 영역이 있다. 처음 스튜디오 라인의 목업 샘플을 만들 때부터 데님 봉제를 하는 대신 훨씬 더 정교한 셰이프를 낼 수 있는 우븐 봉제와 패턴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데님은 여타 우븐 소재에 비해 두껍고 질기다. 하시(Harsh)한 모양새에서 눈치챘겠지만 특히 내가 선택한 원단은 더 하드한 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닳고 색이 빠지는, 앞서 말한 입는 사람에 의해 길들여지는 데님 고유의 멋과 정통성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떻게 하면 이 투박하고 질긴 원단에 우븐 패턴을 잘 적용할 수 있을까가 핵심이자 순진만의 포인트였다.

    그렇게 탄생한 데님의 사이즈가 오직 두 가지뿐이라는 것도 인상 깊다.

    남성, 여성으로 나눈 사이즈가 아니다. 그냥 큰 옷, 작은 옷일 뿐이다. 순진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젠더 플루이드’다. 성 정체성을 떠나서 모두가 각자 취향대로 각자의 실루엣을 만들어나갔으면 했다. 박시하게 입는 걸 즐기는 여성은 큰 사이즈를, 꼭 맞는 핏을 좋아하는 남성은 작은 사이즈를 입으면 되는 거다. 최근에는 체구가 상대적으로 아담한 이들을 위해 한 단계 더 작은 사이즈를 만들었다.

    반면 스튜디오 라인은 에이징한 데님으로 작업하는 업사이클링 방식이었다. 최근 진행한 캠페인 중 하나인 ‘사랑유랑’도 마찬가지고.

    개인의 추억이 새겨진 데님 팬츠를 순진만의 실루엣을 담은 재킷으로 재탄생시켜 다시 전달하는, 리크리에이트 라인이다. 제작이 아닌 해체에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다 보니 기존 커머셜 라인과는 또 다른 몰입의 재미가 있다. 데님도 브랜드마다 봉제 방법이 달라서 옷을 뜯는 방법도 제각각인데, 이 과정에서 새롭게 알아가게 되는 것들도 많다.

    오직 한 사람(가족)을 위한 제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여타 업사이클링 브랜드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업사이클링이라는 대단한 의미를 내세우려 했던 게 아니다. 특히 ‘사랑유랑’ 캠페인에서는 순진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빠의 추억이 담긴 청바지를 뜯고 이어 그의 딸을 위한 데님 재킷을 만들어내는, 그 과정 자체로 말이다. 딸은 한때 아빠의 청바지였던 그 재킷을 입고 자신만의 새로운 추억을 쌓게 될 거다. ‘유랑’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랑은 어딘가에 정박하지 않고 계속 옮겨 다닌다는 뜻이지 않나. 내 작업으로 그렇게 사랑을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라벨에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해리, 엘리오, 하치, 무슨 의미인가.

    모두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담은 영화다. 아이템의 성격에 따라 라벨을 달리했다. 싱글 블레이저, 더블 브레스트 재킷은 클래식한 범주에 들어가는 피스이기에 해리와 샐리(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붙여줬고, 트러커와 칼라리스 스타일처럼 캐주얼한 성향이 강한 아이템에는 엘리오 앤 올리버(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를 선택했다. 유니폼스러운 무드가 있는 초 재킷의 경우 키즈 라인도 함께 만들다 보니 패밀리형이 됐는데, 여기에 동물까지 그 영역을 넓혀보고자 파커 앤 하치(영화 <하치 이야기>)를 가져왔다.

    디테일 하나하나에 이렇게까지 섬세함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브랜드 고유의 결을 견고히 하고 싶었다. 온라인 판매나 홈페이지 제작을 늦춘 이유도 브랜드가 단단해지지 않았을 때 온라인으로 옷을 판매하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어서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옷을 먼저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오늘의 팝업 스토어처럼 말이다. 결국 옷이라는 건 직접 만져보고 느껴봐야 하는 거니까.

    지난 1년간 홀로 이 모든 걸 해냈다. 오랫동안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더 많은 것이 다르게 느껴졌을 것 같다.

    다른 부분이 분명히 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내 역할이 명확했고 거기에만 몰두하면 됐다. 지금은 1부터 10까지 모든 걸 해야 한다. 몸은 힘든데 마음은 더 즐겁다. 샘플 선생님이나 모델리스트, 공장 사장님 만나러 다니면서 옷을 막 처음 시작했을 때 막내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아주 재미있다. 샘플 선생님한테 혼나기도 하고(웃음).

    Courtesy of Soonjeans

    어려운 점은 없나.

    아무래도 행정 업무가 가장 어렵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 조직에 있을 땐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해당 업무를 맡은 분들이 그때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 그 과정에서 실수가 마땅히 생길 수도 있었겠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오히려 개인 작업을 하게 되면서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게 된 거다. 사고가 넓어졌다고 해야 하나, 철이 들어가고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사람들이 순진의 데님을 입으며 어떤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나.

    입는 즐거움. 이건 내가 브랜드를 만들게 된 이유이자 원동력이기도 하다. 옷은 결국 보이는 것보다 입었을 때의 만족감을 최대치로 가져가는 게 중요하다. 특히 데님은 ‘오래오래’ 입는 즐거움을 안겨주는 아이템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무언가에 처음 관심을 가졌을 때, 흥미를 느끼고 즐거웠던 그 모든 순간에 늘 데님을 입고 있었다. 데님과 함께한 시간이 데님을 더욱 ‘나다운’ 아이템으로 만들어준 셈이다. 순진을 입은 이들도 이 즐거움과 함께 그런 순간을 누렸으면 한다.

    #Women Designers

    포토그래퍼
    이우정
    디자인
    허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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