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 소수 부족을 위한 검색어: 쓰리프팅
요즘 나의 소소한 즐거움은 유튜브의 쓰리프팅(Thrifting) 영상이다. 유튜브 알고리듬이 왜 이걸 추천했는지는 모르겠다. 호주 시골에서 떡볶이 파는 사람, 어항에 낙지 키우는 사람 채널을 추천한 것보다 뜬금없다.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이 지드래곤에게 동묘 가자고 꼬드기는 에피소드를 수백 번 보는 바람에 알고리듬이 혼란에 빠진 것 같다. 아무튼 감사하다.
쓰리프팅은 중고 매장에서 싸거나 독특한 제품을 사는 행위를 말한다. 쓰리프팅 브이로그만 전문으로 찍어 올리는 크리에이터도 많다. 한국의 빈티지 쇼핑은 특이한 취향이나 사이즈 때문에 수입 구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마이너 패션광의 전유물, 혹은 잘 정돈된 숍에서 디자이너 브랜드를 헌팅하는 개념에 가깝다. 이와 달리 쓰리프팅은 ‘절약’이 강조된 단어다. 배경도 주로 아름다운가게와 유사한 사업 모델이되 규모가 훨씬 큰 서구의 창고형 중고 매장이다. 스타일을 위한 옷이 아니라 생필품으로서의 옷만 존재할 것 같은 장소다. 쓰리프팅 콘텐츠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착용샷이다. 그러니까 이건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안목과 스타일링 감각을 경주하는 패션 게임이다.
내가 쓰리프팅 영상을 흥미롭게 지켜본 이유는 하나다. 그게 트렌드를 추종하는 패션 콘텐츠보다 다채로운 아이디어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쓰리프팅의 선구자’로 불리는 베이 가넷의 표현을 빌리자면 쓰리프트 숍은 여러 ‘부족(Tribe)’이 공존하는 세계다. 베이 가넷은 1990년대 안티 패션 잡지 <칩 데이트(Cheap Date)>로 패션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물이다. <칩 데이트>는 중고 의류를 이용한 화보나 럭셔리 캠페인을 패러디한 가짜 광고를 싸구려 흑백 용지에 인쇄한 컬트 잡지였다. 하지만 <보그> 패션 에디터였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감각, 광고계와 연예계 인맥을 동원한 완성도 높은 화보는 ‘상업주의에 찌든 패션은 지겨워!’라는 그의 생각을 젊은이의 투정 이상의 무언가로 승화시켜주었다. 발행가 2달러였던 초기 <칩 데이트>는 훗날 수집가들 사이에서 150달러 이상에 거래되었다. 2003년 브리티시 <보그> 객원 에디터로 발탁된 베이 가넷은 또 한번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유르겐 텔러가 촬영한 화보에서 그는 뉴욕 쓰리프트 숍에서 산, 바나나가 그려진 티셔츠를 케이트 모스에게 입혔다. 그 화보에서 영감받은 피비 필로가 2004년 S/S 끌로에 컬렉션에 바나나 티셔츠를 내놓았다. 이 일로 빈티지와 하이패션의 가교라는 명성을 얻은 베이 가넷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활동으로 구제 의류의 신분 상승에 기여하고 있다. 런던 패션 위크의 부대 행사인 ‘옥스팜: 가난과 싸우는 패션’도 그중 하나다. 자선단체 옥스팜에서 기부받은 옷으로 스타일링하는 패션쇼다. 올해 2월 세 번째 옥스팜 쇼를 디렉팅한 베이 가넷은 50,000㎡에 달하는 기부 의류 창고에서 느낀 감회를 이렇게 설명했다. “옷마다 캐릭터가 있는데, 저는 그것을 조합합니다. 거기엔 펑크, 고스, 1960년대, 아메리카나가 혼재되어 있죠.” 이 코멘트가 담긴 올 초 <가디언> 기사는 ‘중고 패션이 사회의 변두리에서 주류로 자리 잡는 과정에 있다’고 분석했다.
리세일 산업의 뚜렷한 성장세는 올해 패션계의 최대 화두 중 하나였다. <보그 코리아>도 이 흐름을 여러 번 다뤘다. 영미 패션계의 당근마켓 디팝(depop.com)은 사용자가 2,000만 명에 달한다. 활성 사용자의 90%는 26세 미만이다. 팝 스타 올리비아 로드리고도 그중 하나다. 특히 럭셔리 리세일 분야에서는 수많은 플랫폼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파페치(farfetch.com)는 올해 6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그들의 럭셔리 패션 리세일에 참여한 고객이 2021년 전체 22%에서 2022년 46%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리세일이 MZ세대의 수익 창출 모델로 각광받으면서 플랫폼이 내세우는 ‘자원 순환’이라는 취지가 무색해지는 부작용도 있다. 요즘 운동화 한 켤레 살라치면 인기 모델은 시즌 중이라도 매장가보다 비싼 리세일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말로 포장되었지만 결국 사재기다. 틱톡 한번 찍고 되파는 용도로 리세일을 이용하는 소비자는 지속 가능성과 가장 거리가 먼 존재다. 이들에게는 리세일이 오히려 소비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패션 산업이 내세우는 지속 가능성이란 결국 글로벌 환경 위기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소비자에게 지갑을 열 용기를 주는 주문일 뿐이다. 그보다는 당대의 유행 상품이 포용하지 못하는 취향, 욕구, 그리고 경제력까지 커버할 수 있다는 데 중고 시장의 매력이 있다. 공들여 큐레이션한 빈티지 숍이나 주류 패션계가 밀고 있는 리세일이란 개념보다 뜻밖의 발견이 있는 쓰리프팅이 더 흥미로운 지점도 여기다.
어느 깜찍한 아시안 아메리칸 유튜버가 쇼핑몰 한복판에서 “지루해 죽겠네. 이럴 시간에 자선 매장에 갔어야 해”라고 투덜대는 모습을 보다가 과거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2000년대 중반 국제시장에서 그 유명한 ‘목욕탕 의자’에 앉아 옷을 고르는데 옆자리 중년 여성이 갑자기 이런 말을 건넸다. “우리가 돈이 없어서 여기 오는 게 아니에요. 옷이 좋아서지.” 2023년 시장조사 기관 원폴(OnePoll)의 조사에 따르면 쓰리프팅 천국 영국에서도 아직 45세 이상 인구의 절반은 중고 의류에 대해 ‘불결하다, 낡았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니 국제시장 패션 러버 언니가 한국에서 겪은 편견은 말해 뭐 할까. 그 무렵 광장시장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청년 셀러로 대거 손 바뀜이 벌어지면서 광장시장 구제 가격이 폭등하기 전 얘기다. 패션 러버 언니들은 묻지 않아도 자꾸만 “우리는 옷이 좋아서 여기 오는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이제 의류보다 투자가치가 있는 것에 마음이 기우는 편이지만, 그들의 후손이 유튜브에서 활개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즐겁다. 적은 돈으로 여러 가지 스타일을 실험해보고, 주류 패션계가 제공하는 시안에서 벗어나 창의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세상에 ‘유행’만큼 지루한 말이 없다. 원전과 오마주가 비슷한 거리에 공존할 정도로 유행의 순환 주기가 짧아진 지금은 더 그렇다. 새로운 패션 영감이 필요할 때, 쓰리프팅의 세계에 잔류하는 소수 부족을 만나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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