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처럼 카츠처럼
지난가을 글래드스톤 갤러리 서울에서 알렉스 카츠의 개인전이 열렸다. 금잔화·수선화·백합·카네이션 등 찬란하게 피어난 꽃이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도록에는 나태주·김용택·정호승 등의 시가 함께 실렸다. 카츠는 젊은 시절부터 시인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영감을 캔버스에 녹였다. 7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해온 대가의 답변은 시처럼 짧지만 여운을 남긴다.
알렉스 카츠(Alex Katz)라는 이름은 언제나 담백하고 우아하며, 세련된 그림을 떠올린다. 절제된 원숙함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광고나 영화, 패션 화보처럼 클로즈업되거나 분할된 화면을 구성하는 독특한 방식, 하나의 화폭에 나란히 배치된 두 개의 이미지(얼굴), 과감한 생략과 단순화, 평평하게 칠해진 색면은 카츠를 대표하는 회화적 실험이다. 회화 조각 혹은 평면 조각이라고도 불리는 ‘컷아웃(Cutout)’은 나무나 알루미늄을 활용하는데,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작품과 전시 공간의 관계성을 강화해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한편 검정 드레스를 입은 에이다(Ada)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The Black Dress’(1960)를 비롯한 카츠의 작품은 패션과 관련해 자주 언급된다. 특히 광고에서 영감을 받은 ‘CK(Calvin Klein)’와 ‘Coca-Cola Girl’ 시리즈는 브랜드를 상징하는 색채와 인물을 통해 광고와 패션, 시대적 흐름을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패션 브랜드 H&M과의 협업을 통해서는 더 많은 대중이 그의 작업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도 남다른 화면 구성이 돋보였는데, 티셔츠와 드레스 등에 인쇄된 카츠의 인물들은 도시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또 하나의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작가의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 카츠는 1951년부터 현재까지 250회 이상의 개인전을 열었고 500회에 가까운 그룹전에 참여했다. 휘트니 미술관(1986), 브루클린 미술관(198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2015),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2022)을 비롯해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의 전시를 하나하나 소개하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높은 평가를 받는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많은 사람이 1927년생인 그가 지금도 한결같이 매일 작업을 하고 있음을 말하며, 성실하고 꾸준한 예술가의 태도와 실천에 존경심을 표한다.
카츠의 작업은 그의 일상에 기인한다. 그는 “자신의 주변 환경과 경험을 포착해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을 그린다”고 직접 말했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풍경, 꽃의 첫인상은 평범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작가를 매혹한 순간을 생생하게 담아내기에 충분하다. 다만 카츠는 자신이 보고 경험한 세계에서 찾아낸 소재로 특정 서사나 메시지를 전하기보다 시각적 표현 그 자체에 집중한다. 그를 둘러싼 삶의 순간은 예술적 이미지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구상적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 특히 인물은 심리적 교감을 일으키는 존재처럼 다가올 수 있다. 누군가는 그들에게서 서사를 찾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시각적인 부분이 우선이다. 카츠는 그들의 성격이 어떠하며 그들의 삶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포착한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이 어떻게 보였는지를 그린다. 인물의 모습에 자신의 심미성을 담는 데 집중한다. 이는 작업 초기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특징으로,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담론이나 메시지로부터의 자유를 의식적으로 고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미술은 무엇보다 본 것을 포착해 표현하고 눈으로 감상하는 것이다.
카츠는 추상미술(추상표현주의)이 절정이었던 1950년대 미국에서 구체적 형상을 그리는 재현적인 회화를 선보였고, 처음에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카츠는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했다. 그러나 평면성을 통해 회화의 본질을 추구하던 추상미술과 다르다고 해서 그가 전통적인 재현 회화, 환영적 회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세부 표현이 생략되고, 대담한 형상과 색면으로 구성된 카츠의 작품은 조형 요소 사이의 형식적 실험을 위한 구상적 회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분명 작가의 관심은 화면의 구성, 형태, 색채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카츠의 형상은 좀 더 간결해지고 추상에 가까워진다. 풍경과 꽃은 붓질과 분할된 면 그 자체로 다가오고, 인물의 뒤를 채운 원근감이 사라진 배경은 무한함과 평평한 표면을 동시에 전달한다. 따라서 카츠의 작업은 시각과 스타일에 집중한 추상과 구상의 결합이다. 그의 회화에서 한쪽을 향한 흑백논리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는 카츠의 예술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대구미술관의 전시 <알렉스 카츠(Alex Katz)>(2019) 도록에도 실린 다이애나 튜트(Diana K. Tuite)의 글, ‘알렉스 카츠의 컷아웃-인물의 기초 작업, 대상의 재구성(Grounding the Figure, Reconfiguring the Subject: The Cutouts of Alex Katz)’(2007)을 통해 사실주의(Realism)와 추상주의(Abstractionism)를 오가는 카츠의 작업 방식에 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더하자면, 카츠의 작업은 시를 닮았다. 눈앞의 순간과 대상을 그렸음에도 그의 회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까지 담아내는 듯하다. 시처럼 함축적인 작품은 단어 그대로 참 아름답다. 어떤 것도 그려지지 않은 배경의 색면은 빈 공간이 아닌 것처럼 충만하다. 시를 좋아하는 작가의 정취가 전달된 것일 수도 있다. 결과물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작업 과정이 어떤 식으로든 전달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카츠의 회화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결과물을 보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 물리적인 과정만 보아도 드로잉, 캔버스와 동일한 크기로 확대된 카툰(Cartoon), 목탄을 이용해 윤곽을 표시하는 것까지 준비 과정이 상당하다. 이 모든 과정이 있기에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시와 같은 작품이 완성될 수 있다.
얼마 전 글래드스톤 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알렉스 카츠(Alex Katz)>(2023)에 전시된 카츠의 꽃 그림 역시 지금까지 서술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카츠는 작업 초기부터 금잔화, 수선화, 백합, 카네이션, 튤립, 프리지어, 피튜니아, 히아신스처럼 주변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는 다양한 꽃으로 화면을 채워왔다. 거대하게 확대된 꽃은 생생함이 넘치고, 검은빛의 배경과 대비되는 선명한 색채는 고양된 생명의 에너지와 움직임을 전달한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과 조금은 호사스러운 리듬감이 함께하는 꽃의 형상은 순수하게 보는 행위에 집중하게 한다.
“주변의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얻으며, 눈에 띄는 모든 것에 끌린다”고 여전히 말하는 카츠, 그는 형태와 색채의 균형을 찾으며 그림을 그린다. 이런 그의 작품 앞에서 언어화된 설명보다 앞서는 것은 직접 눈으로 보고 매혹되는 경험 그 자체일 것이다.
당신의 인물화(초상화)는 당신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 과잉되거나 과장됨이 없다. 자연스러운데 아름답고 우아하다. 작품 속 사람들은 매우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무표정한 경우에도 사색이나 몽상에 빠진 것 같은 눈빛이다. 가장 신기한 것은 뒷모습만 등장할 때조차 어디선가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낸 듯, 굉장히 익숙한 사람처럼 다가왔다는 점이다. 또한 인물을 바라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상상하며 풀어내게 된다. “심리적인 거리를 두고” “메시지나 의미를 숨겨두지 않았다”고 해도 인물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 인물과의 관계가 작품에 담겨서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작품을 통해 작가와 감상자는 교감을 나눌 수 있으며, 작가의 정서와 내면이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인물을 그릴 때 그 인물에 대한 인상이나 일화, 경험을 떠올리는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시각적인 부분에만 집중하는가?
초상화를 그릴 때 그 사람의 인생 이야기나 경험에 대해 반드시 헤아리지는 않는다. 나는 비주얼에 집중하는 편이며, 스타일 자체가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인물화에 담긴 인물의 크기와 비율은 언제나 파격적이다. 2019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알렉스 카츠(Alex Katz)>에서 선보인 ‘Dusk 3’(1992), ‘Bill 1’(2017), ‘Bill 3’(2017) 등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정말 많이 받은 질문일 것이고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다시 묻고 싶다. 특정 인물을 선택하고 그의 모습을 그릴 때 어떤 구성 과정을 거치는가?
내 초상화의 색다른 크기와 비율은 모두 모양, 색상, 톤, 패턴으로 복잡한 구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쉽게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하필 그 인물을 그런 구성으로 그려야겠다고 결정할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장면이 당신을 선택한다”는 표현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도 듣고 싶다. 많은 감상자가 작가가 영감을 받거나 무언가를 결정하는 순간, 작가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이때 즉흥성은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
“장면이 당신을 선택한다”는 자신의 주변 환경과 경험을 포착해 눈앞에 있는 것을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즉흥성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인물을 많이 그리는 당신의 자화상이 궁금해 검색해보았다. 기대한 것보다 많은 작품이 찾아지지는 않았다. 자화상은 당신의 다른 인물화가 그렇듯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였다. 다만 일부 자화상에서는 긍정적 의미의 단호함이 전달되기도 했다. 자신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드는가? 또한 다른 이를 모델로 그릴 때와 자신을 그릴 때 다른 점은 없는가?
자화상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자화상을 그리지만, 다른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이고 편안한 스타일로 접근한다.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당신의 그림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인물이 그려진 배경도 색면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배경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는데도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비어 있어도 비어 있지 않은 공간이다. 그래서 허전함을 전혀 못 느낀다. 이것이 매우 매력적이었고, 배경마저 시적이라고 느꼈다. 당신의 회화에 등장하는 색면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1950년대 후반에 평면에 인물을 배치하기 시작하면서 창의적인 돌파구를 찾았다고 여긴다. 내 그림에서 색면 배경의 중요성은 인물을 보완하고 인물과 풍경에 깊이를 더하는 능력에 있다.
컷아웃은 그 형식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회화 조각 혹은 평면 조각에는 말 그대로 회화적 요소와 조각적 요소가 공존한다. 엄격한 장르 구분이 해체되고,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형식이 만들어졌다. 또한 회화를 중심에 놓고 보면 회화가 자신만의 독립된 세계를 벗어나 현실 공간으로 들어선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컷아웃 작품은 어느 장소에 전시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U’ 자 형태의 알루미늄 틀이 사용된 작품은 더욱 그렇다. 컷아웃을 제작할 때 공간(과의 관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조각과 회화의 관계, 특히 부정적인 공간이 피사체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탐구한다. 이 초상화는 입체와 평면 사이의 간극을 메워 내 작품에 다양한 관점과 레이어를 제공한다. 경계를 허물고 전통적인 장르의 구분을 뛰어넘는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다.
처음 컷아웃을 시도한 지 60여 년이 흘렀다. 이 작업에 대한 당신의 생각에서 변화하거나 더해진 부분이 있는가?
컷아웃에 대한 내 생각은 수십 년에 걸쳐 발전해왔다. 컷아웃은 1959년 우연히 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배경을 제거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됐다. 그 후 나는 컷아웃을 금속 위에 직접 그린 독립적인 ‘그림 조각’으로 만들었다. 일련의 작품은 계속 시간에서 순간을 정지시키고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보통 꽃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만큼 허망함을 표현하는 소재다. 그런데 당신의 꽃은 언제나 찬란하고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꽃 그 자체를 그리기 때문일 수 있고, 당신이 사용하는 색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번에 글래드스톤 갤러리 서울에서 전시한 꽃은 한층 더 추상화되었고, 배경도 어둡다. 물론 그래서 꽃의 생생함이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변화의 이유와 과정을 듣고 싶다.
내 그림을 처음 보는 서울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적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
꽃은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대상이다. 특히 많이 그리게 되거나 눈길이 가는 꽃이 있는가? 주변에서 그림 대상으로서 꽃을 발견하기 위해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가?
없다! 특별히 좋아하는 꽃은 없다. 나는 주변의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얻으며, 눈에 띄는 모든 것에 끌린다.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2019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을 기획, 준비한 이계영 큐레이터와 당신의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에는 평생 한결같이 매일매일 작업을 해온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당신은 늘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지만, 그처럼 작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작가로서 의지가 가능하게 했는가? 당신의 성격 자체가 그런가? 그리고 요즘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도 궁금하다.
여름 동안 나는 메인주에 있었다. 보통은 도시에 있다. 어쨌든 나는 매일 그림을 그린다. 매일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쏟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더 좋아질 거라고 믿는다. (VK)
- 글
- 이문정(미술 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 사진
-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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