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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추상미술이 한국에 처음 왔을 때

2023.12.16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기하학적 추상’이라 하면 맨 먼저 무엇이 생각나나요? 몬드리안의 검정, 노랑, 빨강의 향연을 떠올리는 분도 계실 것이고, 점, 선, 면이 만들어내는 칸딘스키의 그림이 생각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배운 대로, 20세기 초 이 두 작가로 인해 기하학적 추상이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기도 하겠고요. 언뜻 기하학적 추상에는 시대와 국경이 없는 것 같죠. 하지만 이런 기하학적 추상미술도 한국 미술사에 뿌리내린 계기가 있지 않을까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전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이토록 보편적인 미술 사조가 한국에서 어떻게 태동하고 발전해왔는지, 그 계보와 흐름을 망라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전시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작품 곳곳에 숨겨진 ‘한국적’인 단서를 찾아가도록 독려함으로써 미술 안팎의 구체적인 역사를 실감하게 합니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 모습.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 모습.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 모습.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전은 기하학적 추상이 국내에 처음 등장한 1920년대부터 미술계 전반으로 확산된 1970년대까지, 각 시기를 거쳐 전개된 기하 추상의 역사를 추적합니다. 한국 미술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각기 다른 양상으로 존재하며 피고 지길 반복하던 기하학적 추상은 다양한 오해와 편견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동안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둘러싼 이런 인식에 일침을 놓습니다. 단순히 장식적인 미술로 치부할 게 아니라 미술의 영역을 넘어 건축, 디자인 등의 분야와 접점을 형성해왔다는 것, 한국적인 정서를 담지 않은 게 아니라 실은 한국 사회의 변화와 적극적으로 연동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같은 결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충분히 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단성주보’ 제300호 표지, 단성사, 1929년 2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및 제공.
김충선, ‘무제’, 1959, 캔버스에 유채, 43×58cm, 개인 소장.
최명영, ‘오(悟) 68-C’, 1967, 캔버스에 유채, 195×132cm, 작가 소장.
이준, ‘송-유향’, 1985, 캔버스에 유채, 130.5×9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 때문에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는 바로 한국의 시대상 자체입니다. 김환기, 유영국이 각국에서 실험한 기하학적 추상 이면에는 지금 봐도 세련되고 감각적인 1920~1930년대 시사 종합지 표지처럼 새로움과 혁신의 감각을 갈망하던 당시 경성의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전쟁 직후 신조형파에게는 미술품이 그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죠. 그 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연의 모티브로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뒤따랐습니다. 1960~1970년대에 기하 추상이 청년 작가들의 대안으로 떠오른 건 시대적 상황, 즉 미술이 산업, 건설, 과학의 발전을 반영하는 동시에 혁신적인 미술을 향한 이들의 실험 정신 덕분입니다. ‘그들만의 리그’일 것 같은 미술도 알고 보면 이렇게 세상의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변증법적으로 진화한 결과물인 거지요.

유영국, ‘산’, 1970, 캔버스에 유채, 136.5×13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윤형근, ’69-E8′, 1969, 면천에 유채, 165×1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승조, ‘핵 G-999’, 1970, 캔버스에 유채, 192×111cm(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번에 제가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인 추상미술가도 많습니다. 변영원, 김충선, 변희천, 이준, 전성우, 최명영, 최상철, 김한… 산 작업으로 사랑받고 있는 유영국의 초기 작품은 부조 형식의 기하학적 추상이었습니다. 윤형근의 명상적인 암적색 추상화는 1960년대 말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한 샛노란 기하학적 추상을 뿌리로 두고 있지요. 얼마 전 작고한 ‘단색화 대가’ 박서보의 초기작인 ‘유전질’ 연작의 오방색과 전통 패턴은 정말 반갑더군요. ‘배압법’으로 알려진 하종현은 젊은 시절 1960년대 현대화의 물결 속 도시를 추상화한 ‘도시 계획 백서’라는 연작을 선보였습니다. 한국적인 기하 추상을 선도했다고 평가받는 이승조의 대표 연작 ‘핵’은 1960년대 말 우주 시대의 분위기를 잘 담아낸 작품입니다. 차가운 파이프 형상의 이승조 회화와 함께 실제의 아폴로 우주선 발사 영상이 함께 보이던 그 풍경이 이번 전시를 함축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시는 내년 5월 19일까지 이어지니, 과천까지 가기에도 꽤 넉넉한 시간이군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전은 2024년 5월 1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립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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