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날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키가 정말 큰 남자였다. 우리는 각자 가장 귀찮아하는 집안일을 얘기했다. 나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꼽았고, 그는 배수구에 낀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일을 꼽았다. 테이블 밑에서 우리의 무릎이 스쳐 지나갔고, 나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그 키 큰 남자가 아주아주 맘에 들었다. 그런데 그가 며칠 뒤 6개월간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친구들은 운명에 맡기라는 조언을 남겼다. 만날 인연은 결국 어떻게든 만나게 되며, 내 것은 결국 언젠가 나를 찾아온다는 식의 얘기였다. 실제로 대부분 이런 문제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것이 마음 편하다. 모든 것을 관장하고 나를 돌보는 누군가가 모든 걸 결정하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나는 운명이 다가오기만 기다리기는 싫었다. 나는 다소 무정한 ‘남자 사람 친구’에게 영상통화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물어봤다. 역시 휴가를 즐기던 그는 바닷가에서 전화를 받았다. 친구는 내게 세 가지 ‘행동 강령’을 내렸다. 너무 다정하게 대답하지 말 것, 무조건 바쁜 척할 것, 그리고 답장 사이에 긴 텀을 둘 것.
내가 평소 선호하는 연락 방식은 아니었지만, 나는 친구의 조언을 그대로 따랐다. 노트 앱에 메시지를 따로 작성한 뒤, 텍스트를 따로 ‘복붙’해 그 남자에게 답장했다. 내 ‘게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올 수 있도록 친구에게 파티를 열어달라고 부탁했고, 스타일 변신을 위해 앞머리를 자를지 말지 고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친구가 흥미로운 이론을 제기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보낸 문자, 좋아요, 타이밍처럼 사소한 일에 온 신경을 쏟는다. 상대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렇게라도 해야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다.
정말 그럴까? 나는 그 사람의 이모지 하나, 사진 한 장에도 마음이 바뀐 경험이 있다. 상대 또한 내 텍스트에서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처럼 정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과도한 관심과 노력을 쏟는 것은 때로 그 사람과 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그 이론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밥을 먹는 내내 우리는 내가 무얼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다른 친구와 페이스타임을 하며 같은 주제로 한참 얘기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나 자신이 싫어졌다. 그 후 나는 키 큰 남자에게 답장하는 걸 그만뒀고, 운명에 모든 걸 맡겼다.
“모든 걸 바칠 만한 남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상황 설명을 들은 엄마의 말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예전에 파티에서 만났던 남자에 관한 얘기를 시작했다. 둘은 커다란 가죽 소파에 앉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남자는 엄마 번호도 받아갔지만, 결국 연락은 하지 않았다. “예전 남자들도 똑같았구나?”라고 묻자, 엄마는 “당연하지. 그 남자, 그때 여자 친구가 있었거든. 심지어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았어”라고 답했다.
한참을 웃고 난 뒤, 엄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둘은 또 다른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또 한 번 소파에 앉아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번에도 남자의 연락은 없었다. 몇 년 뒤, 남자는 꽃다발을 들고 엄마의 집을 찾아왔다. 휴대폰이 발명되기 전에는 모두가 훨씬 로맨틱했으니까. 그가 준비한 한마디는 “나 이제 준비됐어”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둘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엄마가 검정 머리에 폭신한 눈썹이 매력적인 한 남자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 출신이었던 그 남자는 나의 아빠였다.
어찌 됐든,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만나게 될 사람은 결국 만난다”였다.
엄마의 말이 맞다.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한 후, 점점 키 큰 남자와 내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확신은 강해졌다. 어쩌면 그를 지하철에서 마주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클럽에서 맡겼던 코트를 찾으며 만나게 될 수도 있고. 매일 오전 11시 11분 시계를 확인한 뒤 키 큰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룸메이트 로티(Lottie)와 함께 옷을 맞춰 입고, “그는 나를 잊지 못할 거야. 그는 지금도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거야”라며 주문을 외웠다.
그에게 계속 연락이 오지 않자, 나는 내 믿음을 재고했다.
사랑은 언제나 변덕스럽고, 실패는 언제나 두렵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다소 무책임하게 모든 걸 운명에 맡겨버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무책임함은 때로 좋은 결과를 초래한다. 나만 해도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쓴 기사가 바이럴하게 퍼진 뒤, 운명처럼 에이전시와 계약하고 <보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게 됐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결국 모든 것이 운명이 아니라 내게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은 사람’이어야만 내게 좋은 일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그 키 큰 남자에게 연락이 온다면 그건 운명이 아니라 오롯이 내 덕분일지도 모른다. 내가 예전에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보고 마음을 바꿨을 수도 있지.
여태까지 우리가 만났던 남자들도 결국은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키 큰 남자의 마음도 내 마음만큼 변덕스러울 것이고. 내가 그와의 관계를 운명에 맡겨버린 덕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가 내게 연락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답장하지 않는 내 모습이 더 쿨해 보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이것조차 하나의 ‘게임’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 이 게임이 괜한 파티를 여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이다.
#THE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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