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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침실에서 시작된다, 침실 문화의 귀환

2023.12.30

by 이소미

  • Paolo Armelli

모든 건 침실에서 시작된다, 침실 문화의 귀환

창의성이 피어나는 피난처인가, 아니면 가부장제가 낳은 최초의 감옥인가? 시간이 흐르면서 침실의 의미와 가치도 달라진다.

2017년 새로운 인터넷 스타가 탄생했다. 본명은 클레어 코트릴(Claire Cottrill), 클레어오(Clairo)로 알려진 이 뮤지션은 자신의 침실, 노트북 웹캠 앞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노래 ‘Pretty Girl’은 단숨에 유명해졌다. 당시 열아홉 소녀였던 그녀는 “그날(촬영한 날)은 머리도 떡지고 피부도 좋지 않았어요. 입을 것도 없었죠. 침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기 싫었어요. 그런 저를 위해 이런 촬영 방식을 택한 거예요”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6년 후, 이 뮤직비디오는 무려 9,500만 조회 수를 달성했고, 영국 주간지 <옵저버>는 그녀를 ‘세대를 대변하는 목소리’라 일컬었다.

이 사례는 침실에서 음악 작업을 시작했다는 빌리 아일리시와 같은 여타 뮤지션의 행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청소년에게 침실은 유일하게 사생활이 보장되는 성지일 뿐 아니라 일종의 작은 창작 ‘허브’이기도 한 셈이니. 생각해보자. 우리의 침실은 갖가지 인형, 영화와 콘서트 포스터, 개성 넘치는 옷가지와 가장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물건으로 가득하다. 이보다 더 아이디어가 샘솟는 장소가 또 있을까?

침실의 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모두 잘 담아낸 또 다른 뮤지션은 올리비아 로드리고다. 지난 9월 발매된 그녀의 두 번째 앨범 <Guts>에는 ‘Making the Bed’라는 수록곡이 있다. 이 노래에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침실로 말장난을 하는 가사가 등장한다(‘Making one’s own bed’라는 말은 이불 아래로 숨는다와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앨범 아트워크와 홍보 영상에는 올리비아 로드리고가 침실을 꾸미거나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음악 산업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청소년이 주인공인 <유포리아>와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같은 시리즈에선 침실을 그야말로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계층화된 세계’로 표현했으며, 그들의 삶과 감정의 대조적인 면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그린다. 세트 디자이너에겐 더할 나위 없이 ‘페티시적’인 장소다.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 등장한 캐릭터 레지나 조지의 침실만 떠올려도 알 수 있다. 2004년 이 작품에 참여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패트리시아 쿠치아(Patricia Cuccia)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버릇없는 소녀의 방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화에 나온 다른 주인공들의 방과 더 비교될 수 있도록요”라고 말했다. 커튼이 달린 거대한 캐노피 침대, 핑크로 물든 값비싼 가구, 이 모든 걸 담아낼 수 있는 드넓은 공간. 이 모든 건 의도된 것이었다.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 나온 레지나 조지의 침실. YouTube

반면 침실은 역으로 무시무시한 감옥이 될 수도 있다. 엠마 도노휴(Emma Donoghue)의 첫 번째 소설이자 영화로도 제작된 <룸(Room)>(2015)이 그렇다. 영화에서 어린 소녀 ‘조이'(브리 라슨 분)는 한 남자에게 납치돼 작은 방에 갇힌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아들을 낳고, 키운다. 꼭 뉴스에 나올 만한 범죄가 아니더라도 침실은 언제든 숨 막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

1977년 안젤라 맥로비(Angela McRobbie)와 제니 가버(Jenny Garber)는 침실 문화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분석한 ‘The Culture of the Bedroom’이라는 제목의 연구를 발표했다. 두 학자는 미국 교육(양육) 시스템을 실증적으로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들에 따르면 많은 부모들이 남자아이에게는 스포츠를 비롯한 사회화에 도움이 되는 야외 또는 외부 활동을 장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여자아이는 되도록 침실에 머물게 했다. 성범죄 등 외부 위험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침실은 소녀들의 세상의 중심이자, 가장 활기차고 창의적일 수 있는 장소가 됐다. 밤새 친구들과 파티를 하고, 처음 화장을 해보고, 음악을 듣고, 잡지를 읽고, 인터넷 채팅을 하고 자신을 마음껏 표현하는 그런 공간 말이다.

이처럼 침실의 ‘표현적’ 기능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이뤄졌다. 2007년 학자 메리 셀레스트 커니(Mary Celeste Kearney)는 에세이 <생산적 공간(Productive Spaces)>에서 침실과 10대의 진정한 문화적 생산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존재했다. 주로 페미니즘 관점에서 일어났는데, 이들은 이 미적이고 창조적인 운동의 기원에는 이중적인 잣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남성과 달리 여성은 외부 활동에 제한이 있었고, 가정적이어야 한다고 강요받아왔으니 말이다.

트레이시 에민의 ‘나의 침대'(1998). Nick Ansell – PA Images/Getty Images

침실 문화는 매우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젊은 아티스트들은 무심함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침실을 활용하는 동시에 혼란스러운 세상과 시끄러운 외부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아늑하고 따뜻한 장소로 여기는 듯하다. 이 현상은 코로나19를 비롯한 불안한 국제 정세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침실은 얼마든지 거부되고, 전복되고, 폭발할 수 있다. 1998년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이 내놓은 설치 작품 ‘나의 침대(My Bed)’가 이를 잘 대변한다. 그녀는 당시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의 흔적(술병, 담배꽁초, 사용한 콘돔, 얼룩진 탐폰 등)으로 뒤덮인 침대를 그대로 세상에 내보였다. 결국 침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젊은 여성이 자신의 통제력과 권력, 표현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첫 번째 장소인 셈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을 꿈꿀 수 있고, 스스로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있다.

Paolo Armelli
사진
YouTube, Instagram, Getty Images, Courtesy Photos
출처
www.vogu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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