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물에서 배우는 인생의 교훈
2024년에도 회귀물 유행은 계속된다. <이재, 곧 죽습니다>(티빙)와 <내 남편과 결혼해줘>(tvN)는 극적 재미를 떠나 누구나 한 번쯤 자신에게 던져봐야 할 중요한 질문을 담고 있다.
“젊고 예쁠 때로 돌아가고 싶나요?”, “인생의 한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를 택할 건가요?” 흔한 질문이다. “지금의 경험치를 안고 돌아간다면 예스, 아니면 노.” 역시 흔한 답이다. 요즘 유행하는 회귀물은 그 흔한 문답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은 실패한 생의 기억을 갖고 또 한 번 살 기회를 얻는다. 그리하여 남들보다, 심지어 과거의 자신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곳곳이 지뢰밭인 인생이라는 게임에 임하게 된다.
웹툰에서 시작해 드라마로 번진 회귀물 열풍은, 아이디어의 원전을 따질 필요 없는 한국적 판타지의 원형 하나가 추가되었다는 점에서 창작자들에게 반가운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소비되는 배경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도준(송중기)은 부잣집 머슴 노릇을 하다 살해당한 ‘흙수저’다. <이재, 곧 죽습니다>의 이재(서인국)는 취업에 실패하고 자살한다. 드라마는 그들이 현실을 ‘노오력’으로 극복하는 대신 인생을 리셋할 수 있게 해준다. 출생과 동시에 계급이 결정되고, 신분 상승 사다리는 붕괴하고,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대중의 체념을 반영한 판타지다.
로맨스 회귀물 주인공도 억울하긴 마찬가지다. <완벽한 결혼의 정석>의 한이주(정유민)는 부잣집 딸이지만 입양아라서 정서적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강지원(박민영)은 친구와 남편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살해당한다. 이들의 생이 망한 데는 출생 신분 외에 성격적 요인이 작용했다. 어지간히 당해도 반발하지 못하는 소심함, 사랑을 갈구한 나약함, 아무나 믿어버린 순진함 때문에 그들은 후회 가득한 죽음을 맞는다.
어느 쪽이건 한국형 회귀물의 출발점은 마찬가지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패배주의다. 소위 ‘이생망’은 유머러스한 밈을 떠나 현대 한국인의 시대정신에 가깝다. 현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 답답한 삶을 벗어나고 싶다는 회피 욕구를 거짓 해소해주는 게 회귀물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번 생을 떠나 영원히 사라지고 싶은 게 아니다. 승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높은 자의식, 자존감, 삶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기에 이 사회가 싫고, 이 인생이 싫을 뿐이다. 그래서 회귀물의 억울한 주인공들은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대신 이 생의 경험치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인생 2회 차에 도전한다. 남들에겐 없는 비밀 맵을 갖고 게임에 임하는 거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주변인의 속내가 뭔지 뻔히 안다는 건 편리한 일이다. 게다가 주인공들은 이 능력을 태어나보니 재벌 2세라거나, 어느 날 갑자기 돌연변이 거미에게 쏘여 슈퍼 히어로가 되는 식으로, 노력 없이 쟁취한다. <이재, 곧 죽습니다>의 이재는 매번 다른 인물로 열두 번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난도가 좀 더 높다. 하지만 목숨을 아까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자신이 빙의한 인물의 전사를 안다는 건 역시 유리한 조건이다. 그러니 치트키를 쓰는 게임 상대에게 더 강력한 치트키로 맞서고 싶다는 것이야말로 회귀물 유행에 반영된 대중의 진정한 욕망인지 모른다. 빠르고 확실한 승리를 향한 부질없는 갈망 말이다.
회귀물이지만 자신이 딛고 선 대중의 조급한 갈망을 비판하고 합리적 교훈에 도달하는 드라마가 <이재, 곧 죽습니다>다. 이재는 ‘나는 사는 게 두렵지 죽음 따윈 전혀 두렵지 않다’고 잘난 체한 대가로 죽음의 저주를 받는다. 열두 번의 죽음, 즉 열두 번의 삶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원래 생애에서 그가 동경한 재벌 2세로서의 인생은 사고로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생각한 인생도, ‘이런 놈이 왜 살지’ 싶은 인생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막 빙의한 이재가 보기엔 가치 있는 인생도, 결론은 죽음이다. 이재는 죽음을 속이려 노력해보기도 한다. 실패다. 그 과정에서 이재는 다른 인생을 빌려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도 얻는다. 자신의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친 여파를 보고, 함부로 끝낼 수 없는 인생을 떠맡기도 한다. 이재가 겪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삶이 확장되는 경험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조건을 가지고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음을 깨닫는다. 극적으로 보면 대단한 반전이 아니다. 죽음이 이재 앞에 나타나 저주 내용을 설명할 때 시청자들은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걸 현실에 대입하면 꽤나 무거운 메시지가 된다.
우리는 회귀물에 열광하며 대리만족이나 하는 대신 인생 2회 차처럼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죽음의 소용소에서>를 쓴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바로 그 행동’이란 게 자살일 수도 있고, 마약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범죄일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람을 배신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해야 할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게임으로 도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표현을 미루는 것일 수도 있고, 끊어야지 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무는 것일 수도 있고, 나쁜 연인에게 매달리는 것일 수도 있다. 행복과 건강을 포기하고 일에만 몰두하는 것, 공부를 미루는 것, 운동을 미루는 것,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 부질없는 물건에 돈을 쓰는 것,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미루는 것, 유해한 인연에 휘둘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다’며 나쁜 상황과 행동과 습관과 관성에 저항하지 않는 것 자체가 그 결과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짓이다.
자,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이건 드라마 리뷰가 아니다. 2024년이 밝았다. 아직 1월이다. 이번 해는 ‘늘 오는 새해’가 아니라 ‘인생 2회 차’를 상상하며 살아보는 해로 삼자고 드라마를 빌려왔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인생 1회 차 지원처럼 소심하게 구는 대신 인생 2회 차 지원처럼 과감하게 살자. <이재, 곧 죽습니다>의 인생 1회 차 이재처럼 아까운 인생을 낭비하는 대신 산전수전 겪은 이재처럼 이번 생을 가장 보람되게 살 방법을 생각해보자. 드라마 주인공처럼,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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