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우리는 미술관에 모여야만 한다

2024.01.12

우리는 미술관에 모여야만 한다

1월 초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사진작가 구본창 회고전이 장안의 화제입니다. 하지만 미술관에 간 김에 다른 전시장도 둘러보시라 권하고 싶군요. 이슈가 되는 대규모 전시만 미술관을 채우는 건 아니니까요. 다소 덜 회자되더라도 이곳에서의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작지만 알찬 전시도 많습니다. 특히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같은 전시는 별 기대 없이 들어갔다가 보석 같은 작품을 만난 전시입니다. 평소 미술관에 자주 다니시던 분, 오늘날 미술관의 역할이 과연 무엇일까 궁금했던 분에게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현대의 미술관은 작품 전시라는 표피적 역할을 넘어 경험하고 소통하는 사회적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데, 진화하는 미술관의 책임 의식을 담아 기획한 전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전시 모습,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3~2024. 이미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사진 촬영: 코코아.
이우환, ‘항(項)-대화’, 2009, 철판, 자연석, 200×400×1.5cm(×2개), 50×87×60cm, 50×77×60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2012-77. 이미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세상 모든 전시는 예술을 통해 이야기를 건넵니다.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공유와 관계, 소통과 접촉이라는 현대미술관의 방향을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서울시립미술관은 퀸즐랜드 미술관, 브리즈번 현대미술관, 싱가포르 미술관과 연계해 공동의 경험과 가치 형성을 위한 다양한 이야기를 탐구하는 소장품을 펼쳐 보입니다. 특히 이들은 미술관에서의 경험을 정의하는 몇 가지 움직임을 제시하는데요. 이를테면 ‘사랑하기’는 나의 안전한 반경 너머 누군가를 마주하는 일이며, ‘번역하기’는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의지입니다. ‘추상하기와 침묵하기’는 언어 이면의 의미를 발견하고 관계 맺는 과정을 뜻하고, ‘세우기’는 공통의 감각과 경험을 만들려는 움직임이죠. 각 작품은 이러한 실천어에 맞게 선별·배치되어 전시의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아만다 헹, ‘대화를 합시다’, 1996~, 현장 퍼포먼스와 설치, 가변 설치.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소장, 2020-00353. 싱가포르 국립대학교에서 2017년에 진행된 퍼포먼스 이미지. 이미지 제공: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미술관.
디 하딩, ‘함께 숨쉬다’, 2017~, 유리에 오커, 목탄, 합성 안료, 22×542cm(12개의 패널, 각 22×45cm). 이미지 제공: 작가 및 디 하딩 컬렉션. 촬영: 롭 리틀.
키리 달레나, ‘지워진 슬로건’, 2014, 포토래그 바리타 면 섬유의 광택 종이에 잉크젯 프린트, 91.4×141.3cm. 이미지 제공: 작가.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의 페이지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은 유명과 무명의 정도를 떠나 미술과 삶을 넘나드는 수작입니다. 국가와 개인의 정체성, 젠더 정치와 싱가포르 사회의 문제를 탐구하는 아만다 헹은 ‘대화를 합시다'(1996~)라는 재미있는 작품을 선보입니다. 콩나물 다듬기라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활동을 예술적 상황으로 제안하는데, 테이블에 수북이 쌓인 콩나물을 중심으로 쏟아지는 여성들의 이야기에서 공통의 사회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자라·궁갈루·가링발 민족의 후손으로 조상들의 스텐실 기법을 활용해 문화유산에 담긴 미학과 정신을 드러내는 디 하딩이라는 작가도 만날 수 있는데요. ‘함께 숨 쉬다'(2017~)를 통해 토착 문화의 전통과 지식을 보존·전달하는 것 역시 미술의 역할이라 말합니다. 키리 달레나의 ‘지워진 슬로건'(2008~) 연작은 필리핀 마르코스 독재 정권 시대의 저항을 담은 사진 속 시위 팻말의 문구를 하나씩 지워가며 당시 탄압과 검열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죠. 본래 팻말에는 무엇이 쓰여 있었을까, 지금이라면 어떤 목소리와 기억을 써넣을 수 있을까 상상하는 과정에서 관람의 재미가 배가됩니다.

홍미선, ‘Code 10’, 1994(2020 프린트), 디지털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6×120.6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2020-103.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홍미선, ‘Code 11’, 1994(2020 프린트), 디지털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39.3×53.2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2020-104.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홍미선, ‘Code 2’, 1994(2020 프린트), 디지털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39.3×80.5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2020-102.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저는 곳곳에 놓인 홍미선 작가의 사진 연작 ‘Code'(1994) 앞에서 한참을 서 있기도 했습니다. 실뜨기를 하는 손, 그 손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패턴이 클로즈업되어 있습니다. 실뜨기는 상대와 협업해 실 하나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가는, 말하자면 매우 상호 관계적인 놀이입니다. 상대의 손놀림과 패턴을 유심히 관찰하고, 이에 화답해야 놀이가 성립되는 거죠. 이렇게 변화하는 관계를 인정한다는 건 곧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혹은 연결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게다가 아시다시피 실뜨기는 마음먹기에 따라 계속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가 제시하는 실천어, 즉 사랑하기, 번역하기, 추상하기, 침묵하기 등이 비단 미술관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님을, 결국 서로 끝없이 얽힌 우리 삶의 순환에도 꼭 필요한 행위임을 새삼 생각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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