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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웰빙을 위한 글쓰기

2024.02.01

by 이숙명

    심리적 웰빙을 위한 글쓰기

    나는 최근 에세이 한 권을 썼다. 정신 건강에 관한 책은 아니다. 외국에서 집 지은 경험을 담은 책이다. 나는 지난 2년간 내게 벌어진 일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실 관계 위주로 정리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장을 쓰면서 놀라운 체험을 했다. 공사 중 발생한 분쟁과 시행착오로 인한 원한, 분노, 서러움, 짜증이 누그러지고 ‘다 지나갔다’라는 느낌이 들면서 속이 후련해진 것이다. 나는 글을 쓰기 전까지 그런 감정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도, 그게 얼마나 무겁게 나를 누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집필을 끝낼 때는 카타르시스의 눈물까지 흘렸다. 심지어 망하라고 저주하고 복수하고 싶던 상대에게마저 ‘너는 계속 그렇게 살렴. 나는 너를 여기 두고 갈 테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20년 넘게 글을 쓴 나로서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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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얘기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는 중요한 기억을 자꾸 잊어버리는 워킹맘이 등장한다. 말 그대로 ‘정신없이’ 바쁜 사람이다. 의사는 워킹맘에게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기 인생을 글로 쓰라고 지시한다. 그 결과 환자는 자기 상태를 스스로 돌아보고 연민하게 된다. 자기 반영적 글쓰기는 타인을 돕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 우울증과 불안 장애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상담 과정을 글로 쓴 <우울하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100만 부 이상 판매되고 25개국에 수출되었다. 그런데 과연 글쓰기가 원한과 앙심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될까?

    <복수의 심리학(Beyond Revenge)>을 쓴 마이클 E. 맥컬러프 교수는 2006년 ‘대인관계에서 당한 피해의 이점을 글로 쓰면 용서가 촉진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실험 참가자 304명에게 20분 동안 글을 쓰게 했다. 첫 번째 그룹은 최근 대인관계에서 당한 일의 충격적 특징을, 두 번째 그룹은 그 일로 인한 개인적 이익을, 세 번째 그룹은 다른 주제를 글로 썼다. 그 결과 개인적 이익을 찾으려 노력한 두 번째 그룹이 다른 참가자들보다 가해자에게 관대해졌다. 그들은 ‘내가 더 성장했다’, ‘더 강해졌다’, ‘더 현명해졌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썼다. 이런 태도는 궁극적으로 스트레스와 분노 레벨을 낮춰줌으로써 심리적 웰빙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에세이를 쓰면서 내게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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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박보영은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일기를 솔직하게 쓰고 금고에 보관한다고 했다. ‘정신과 의사들이 보면 칭찬하겠다. 이것이 선한 영향력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평생 밥벌이를 위해 글을 쓴 나는 일기 쓰기가 어렵다. 타인에게 보여질 글을 쓰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날것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부감이 든다. 기억을 위한 간단한 기록이 전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습관적 검열의 덕을 보았다. 에세이를 쓰는 동안 ‘독자들이 이 대목을 보고 내가 경솔했다고 욕하지 않을까?’, ‘너무 감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 상황을 이해시키려면 상대의 동기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끝없이 했다. 나는 자신은 물론 나를 엿먹인 모든 사람들의 변호사가 되어야 했다. 글의 흐름이 늘어지지 않도록 중요한 정보를 선별하고 자잘한 소재는 버렸다. 그렇게 흩어진 에피소드와 감정의 직소 퍼즐을 조립해가면서 이 경험을 큰 틀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경험의 주체가 아니라 큰 틀의 일부분으로서 나와 관계자들의 역할, 공과 실, 개선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소한 집착에서 벗어나 중요한 사안에 집중할 수도 있었다. 물론 타인 앞에서 나 자신을 충분히 방어하지 못해 쌓인 억울함도 해소되었다. 황당한 일을 겪고 집으로 돌아와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해!’라고 상상해본 경험은 누구나 있지 않나? 이런 상상은 실제로 스트레스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누구도 당신을 멈출 수 없다. 더 훌륭한 항변을 위해 말을 고를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물론 아무리 효용을 강조해도 글쓰기는 어렵다. 나도 그게 일이 아니었으면 한 자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이순신 장군이 전쟁 중이라고 일기를 안 썼으면 우리는 그의 위대함을 지금처럼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원균의 치졸함과 무능함이 역사에 박제되어 420년 동안 후손의 비난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의 행간을 해석한다면서 영화와 드라마마다 다른 성격의 이순신과 원균이 등장했겠지. 심지어 일기는 법적 효력도 있다.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데 당장 대처할 에너지가 없다? 일단 일기를 써야 한다. 그런 외부적 소득이 아니어도, 대인관계에 대한 글쓰기는 최소한 자신의 앙심을 해소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어떤 방식으로 쓸지 너무 고민할 필요 없다. 자기 감정의 배출도, 상황의 객관화도 저마다의 효능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안 볼 거란 안심도, 세상 모두가 보고 나를 판단할 거라는 불안도 활용하기 나름이다. 그저 펜을 들고 요즘 당신을 괴롭히는 일에 대해 한 줄 써보라. 그것이 시작이다. 글쓰기는 가장 평화로운 복수이자 가장 저렴한 테라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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